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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전쟁사에서 말보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동물은 없었을 것이다.
고대는 물론이요, 중세에서는 공격의 핵이었고, 근대까지도 보급을 위해 말을 사용하였다. 또한 다수의 생각과 달리 기병은 2차 세계대전까지 잘 쓰였다. 전쟁사를 논의할 때, 말이란 동물을 제외하면 전쟁사에 대한 논의가 되질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만큼 말은 전쟁에서 많이, 그리고 오래 쓰였다. ( 요즘 군대에서 로봇들을 이용하여 병사들의 군장을 가볍게 하려는 노력들이 지속되고 있다. 이 로봇도 말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에서 말한 시각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전쟁사는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일반인들조차 서양의 기병에 대한 여러가지 자료나 독자적 연구를 더 많이 하지, 한국의 기마전에 대한 연구는 찾기가 상당히 어렵다. 이상하단 생각이 들 정도다.
역사를 좋아한다는 사람들도 서양의 유명 기사단들에 대한 것들과, 전술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있지만, 한국 기병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만큼 한국 기마전에 대한 연구성과를 찾기 힘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학술적 차원의 논의가 아닌, 일반적 차원의 논의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책이라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작가는 서문에서 북방 기마민족을 상대로 어떻게 대등한 기마전을 전개했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하였지만, 독자인 내 입장에선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전쟁의 역사를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라 생각한다.
책은 의외로 쉽고, 간단하게 써져있다.
한국 기마전의 연구성과와 과제를 시작으로 각 시대의 기마전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나를 설명하였다. 전부 나열하면 글이 너무 길기에, 조선시대 호마의 생산과 호마목장 설치, 일본의 조선 침공과 기마전
이 두가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첫번쨰 주제인 조선시대 호마의 생산과 호마목장의 설치를 말하기 전에, 먼저 호마의 개념을 잡은 뒤 본 주제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윗 그림에서 보다시피 호마와 몽고마는 상당한 크기차이가 있었으며,
호마는 이처럼 중장기병을 위한 말로서, 상당히 덩치가 있었으며, 북방민족 특유의 사육법으로 길러진 말이다.
그리고 몽고마는 몽골족들이 쓴 말로써 경기병을 운용하기에 적합했다.
호마를 지칭하는 말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고려 전기에는 호마를 앞에서 말한, 북방민족의 말이었으며, 고려 후기엔 몽고마를 호마로 지칭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다시 북방민족의 말을 호마라 지칭한다.
호마에 대해 간단히 말해봤으니, 본 주제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첫번쨰 주제인 조선시대 호마의 생산과 호마목장 설치를 말해보곘다.
고려시대까진 여진족과 관계가 좋았기에, 여진족도 고려시대를 통틀어 40만필의 호마를 고려에게 진상했다. 그래서 고려시대엔 호마가 많이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은 여진족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여진족에게 호마를 진상받지 못하였으며, 건국 직후부터 호마가 많이 부족하여 여진족에게 호마를 사와야 하는 실정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호마의 수입이 끊겼기에 대부분의 호마가 과하마(크기가 작은 말)로 퇴화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전국에 목장을 건설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여기서 독자분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원나라가 엄격히 관리한, 주요한 말의 생산지인 제주도엔 고려시대부터 기른 많은 호마들이 있을텐데, 태종부터 세종까지 호마목장을 건축하는데 집착하는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조선 초기 제주의 목장에는 호마가 없다시피 하였다. 이유는 명나라가 지나친 숫자의 말을 징발하였기 떄문이다.
고려말과 초선 초를 통틀어 10만필을 명나라에 진상하였는데 호마가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태조부터 세종까지 전국에 목장을 짓는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이와 병행하여 궁중에 필요한 말들을 생산하기 위해, 궁 안팎에 마구간을 설치하고, 사복시란 말의 관리에만 전념하는 신하를 두었다. 그리고 성종대에 이르러 사복시에 대한 법제화가 이뤄지면서, 독립된 관아로서의 역할이 정당화 되었다.
왕이 쓰는 말을 내구마라 하고 신하들이 쓰는 말을 유양마라 한다. 태조부터 성종까지의 내구마와 유양마의 숫자는 일정하지 않았다. 세종대엔 유양마의 합계가 670필에 이르자, 백성의 고충을 생각하여 세종은 670여필 가까이 되는 유양마의 숫자를 300필로 감소시켰다.
그리고 이 숫자는 유지되다가 연산군대엔 내구마와 유양마의 합계가 2천필에 달하였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많은 수의 내구마와 유양마의 유지가 연산군 정권 붕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하였다.
하지만 내구마와 유양마의 숫자를 조절할 뿐, 군력의 증강을 위한 호마 생산에 대한 노력은 이와 별개였다. 세종은 '군정은 말보다 급한 것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호마의 생산에 대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호마의 생산 및 수입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현안이었다.
또한 앞에서 세종이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었다. 고려시대 종마로 사용되던 달단마가 세종때까지 수입이 끊겨서 대부분의 호마가 과하마가 되는 상황이 되었기 떄문이다.
그리하여 세종은 달단마를 사오고, 소를 키우는 곳을 호마를 키우는 곳으로 바꾸는 노력까지 하며, 전국에 호마목장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북방민족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두번째 주제인 일본의 조선침공과 기마전에 대해 말해보자
먼저 조선의 기병전술은 여진족과의 전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진법훈련 및 새로운 무기의 개발 등은 여진족을 상대로 맞서기에 충분했으며, 4군 6진 정벌을 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은 사정이 달랐다. 조선의 군 전략이 바뀔 수준의 전쟁이었다.
먼저 저자는 임진왜란을 조선, 명, 일본등 동아시아 삼국의 무기와 이 세나라의 기마전의 각축장이라 표현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시기의 연구는 전략전술 중심의 연구가 중점적으로 이뤄졌기에, 이 시기의 기마전 연구는 여전히 시작단계에 있으며, 이 책을 통해 조선시대 초기 기마전을 살펴볼 수 있는 탄금대 전투와, 왜란때의 기마전을 볼 수 있는 평양성 탈환전투, 행주산성 전투를 통해 조선군이 수성전술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검토하고자 했다.
이 중 탄금대 전투는 간단히 언급만 하고, 행주산성 전투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탄금대 전투의 패배는 신립의 공격적 전술로 인해 지형의 유리함을 버리고 배수진을 쳤기에 일어났다. 물론 신립입장에선 평야에서 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군의 전략에 맞는 지형은 탄금대라 생각하였고, 그 곳에 진을 쳤지만 그것이 오히려 패착이 된 것이다.
행주산성 전투는 조선군의 전략이 기병을 주력군으로 하는 속전속결전술에서 수성전술의 형태로 바뀐 것을 보여주는 예시다.
조•명 연합군은 경기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4천의 선봉대를 내보냈고, 일본군은 이에 맞서 4만의 전력을 내보냈다. 연합군은 당연히 패배하였다.
또한 권율도 행주산성에 들어가기 전까지 패배를 맛보았는데, 권율의 중군만을 제외한 나머지 근왕군들은 궤멸되는 수준의 패배였다.
이에 권율은 앞선 전투가 수성이 아닌 공격에 치중해서 패배했다 여겼으며, 수성을 취하다 연합군이 도착하여 승기가 보이면 공격을 감행하는 전술을 택하여 승리를 하였다.
그 뒤 권율은 고양의 행주산성으로 자리를 옮김으로,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으며, 수만의 일본군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조선의 평지 기마전이 수성전술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병자호란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글의 두가지 주제인 조선시대 호마의 생산과 호마목장 설치, 일본의 조선 침공과 기마전이란 두가지 주제들에 대해 간단히 말해봤다. 그럼 이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내가 글에서 따로 밝히진 않았지만 이 책엔 조선시대뿐만 아닌 삼국시대, 고려시대의 기마전에 대하여 자세히 나와있으며, 병자호란 이후의 기마전까지 고찰하였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기마전에 대한 것들이 거의 다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나라의 기마전이 궁금하다면 이 책은 필독서라 할 만하다.
거기다가 쉽게 썼다. 정말 좋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여러분들에게 일독을 충분히 권할 만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긴 글을 읽어줘서 감사할 따름이다. 글을 읽으신 모든 분들 모두 좋은 일만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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