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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의 시대는 최악의 시대였다.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최고의 시대를 꼽는 것은 사람마다 의견이 갈릴 것이나, 최악의 시대로는 히틀러의 집권 시기, 그 중에서도 프랑스 점령 직후부터 패망까지를 꼽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히틀러의 광기와 행운은 파리를 점령할 때까지 점점 커져만 갔다. 행운은 그 이후 점점 내리막길을 탔으나, 광기는 행운과 다르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일로만을 탔다. 오늘날 천운이 따랐다는 문장도 히틀러의 행운에 비하면 왜소해 보일 정도라는 평가를 받는, 히틀러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위험천만한 스탠스와 도박수는 독일 국민으로 하여금 우연이 아닌 총통이기에 해낼 수 있었던 노림수로 인식되었고, 히틀러에 대한 지지와 소망은 국민들의 열망과 설레발을 땔감으로 삼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전쟁 전부터 히틀러 한 사람의 발 밑에 있던 집단이었던 나치당은 더더욱 히틀러의 비위를 맞추는 인사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이후 패망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정치적인 무리수와 인종말살정책 등의 인간이기를 포기한 정책도 점점 강화되었다.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유대인들과 다른 유색인종들, 그리고 나치에 협조하지 않은 이들이 매일같이 죽어나갔다. 작가인 한스 팔라다가 주인공으로 삼은 부부도 나치가 무차별적으로 난사한 죽음이라는 총알을 피해가지 못했다.



 여기 한 부부가 있다. 한스 팔라다의 『누구나 홀로 죽는다』는 프랑스 점령이라는 탐스러운 뼈다귀가 나치당이라는 개새끼들의 입에 물리고, 부부는 아들이 전쟁 중 사망했다는 슬픔을 억지로 삼키게 된 시기부터 이 부부의 죽음까지, 3년간의 족적을 그들과 함께 발맞추어 걸은 책이다. 진중하고 과묵해 속을 알 수 없다는 평가를 자주 받으나 능력만큼은 모두가 인정하는 오토 크방엘과 남편에게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안나 크방엘. 이 둘은 본디 나치에 사소하게나마 대항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현 체제에 순종적이었으나, 이러한 방임과 무관심이 아들의 죽음이라는 슬픔으로 돌아오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사소한 형태의 저항을 2년 동안 지속하는 것으로 나치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히틀러를 포함한 나치당을 비판 내지 비난하는 편지를 눈에 띄는 건물에 몰래 두는, 사소하지만 위험천만한 짓이었다. 크방엘 부부는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 행동을 200번이 넘게 되풀이하다 끝내 덜미가 잡혔고, 그들이 원하던 미래인 민심의 동요와 자신들에 대한 동조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심문 당시 깨닫게 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로 편지를 보자마자 신고했고, 18통을 제외하고는 모두 경찰에 보고되었다. 남은 18통도, 아마 대부분이 훼손되어 주운 사람들이 그 글을 읽었다는 책임 소재를 완벽히 말소했을 것이 확실했다. 크방엘 부부는 긴 기간의 노력과 막대한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지만, 그 결실은 너무나도 보잘것없었다. 그들을 체포한 경감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들의 의지는 아무에게도 전달되지 못했다.



 크방엘 부부는 모진 고문과 학대로 고통 받고 비루한 죽음을 맞이할 때도,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결국 너희의 저항으로 바뀐 것이 없지 않은가?‘라는 현실적인 질문에 히틀러의 야욕과 광기가 우리의 자식을 앗아갔으며, 히틀러에게 저항하지 않고 모른척하거나 그에게 동조한다면 우리가 아들을 잃었듯 히틀러가 그 사람들의 소중한 것을 앗아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답변했다. 실제로 작품에 등장하는 1940년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은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나치를 두려워하든 나치에 동조하든 간에 상관없이 나치당에 의한 저열한 공격과 침략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여자 편력이 심한 양아치 에노는 한 경감의 자리보전을 위해 살해당한 후 자살로 둔갑되었으며, 모든 자식들이 나치에 피와 땀을 쏟도록 종용한 페르지케 노인은 훗날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으로 나치의 수족으로 출세할 가능성이 커진 아들에 의해 정신 병원에 수감된 후 학대당했다. 나치는 절대로 체제를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만 공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저 히틀러와 나치당의 명목으로, 당의 높은 사람과 가까운 사람이 가깝지 않은 사람을 핍박해 돈을 빼앗고 심한 경우 반역자라는 누명을 씌워 목숨과 재산을 몰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누구나 홀로 죽는다』에서는 썩어빠진 지배층의 강압이 작품의 전체적인 풍조를 대변한 듯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이고 현실적인 성정을 지녔다. 잘못된 현실에 사소하지만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크방웰 부부마저도 이상주의자보단 현실주의적인 측면이 강하게 드러나는 인물들이다. 이 현실주의자들을 전부 아우르는 규칙은 법이 아니라, 상류층에게 누가 얼마나 더 큰 꼬리를 열심히 흔드냐에 따라 우열이 나뉘었고, 이 규칙은 단 한 번도 작품에서 반례를 낳지 않은 채 무조건적으로 지켜졌다. 편지를 둔 크방웰 부부는 실상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과한 학대를 동반한 심문을 당한 끝에 교수형을 선고받았고, 횡령을 저지른 페르지케 노인은 아들에 의해 죄가 완전히 무마되었다. 수사관이 죄수를 험하게 학대하고, 감옥의 의사가 환자에게 취해야 할 조치를 일부러 외면해 죄수가 미필적 고의로 죽어나가는 것은 죄가 성립되지 않았지만, 죄수들에게는 좋은 평을 들었지만 소장에게는 죄수들의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는 이유로 반목한 프리드리히 로렌츠 목사가 한 죄수의 투신을 막지 못한 것은 명명백백한 죄로 취급되었다. 권력을 쥐거나 상대적으로 권력에 가까운 인물들이 권력을 쥐지 못한 인물들을 학대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여지없이 공권력의 철퇴를 맞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치의 만행을 장장 800쪽에 가까운 분량에 상세하게 묘사한 것은 작품에 대한 몰입감을 책임져 주었지만, 사실 난 개인적으로 『누구나 홀로 죽는다』를 읽으면서 이 책이 좋은 책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적어도 나한테는 맞지 않는 책이다. 여러 인간 군상들을 보여줬지만 작품의 큰 갈래와 크게 상관없는 사람들이 차지한 분량이 상당했으며, 많은 조명이 투자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인물들의 행적이 보란 듯이 깔끔히 매듭지어지지도 않았다. 나쁜 강자가 착한 약자를 부당하게 괴롭히는 플롯은 너무 많고 잔혹하게 되풀이되어 이 책의 태생적으로 막대한 분량과 함께 독자에게 너무나도 긴 호흡을 요구했다. 글 자체도 술술 읽히지 않는 편이었다. 다루고 있는 소재가 소재인지라 가슴이 쉽게 끓고 먹먹해져 쉽사리 이야기를 해쳐나갈 수 없었고, 글 자체도 친절한 편은 아니라 더더욱 돌파하기 쉽지 않았다. 예컨대, 오토 크방엘의 행동을 묘사할 때, 첫 줄에는 오토라고 부르고, 둘째 줄에는 그를 크방엘이라 부르고, 다시 셋째 줄에는 그를 다시 오토라고 부른 문단이 존재한다. 모든 문장이 이런 식으로 꼬여있지는 않았지만, 팔라다가 독자를 너무나도 불친절하게 대했다는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결국 이 책에 대한 호평과 혹평은 독자의 가슴의 먹먹해지는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느냐와 부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나뉠 것이다. 사실 이 불편하고 얹힌 듯한 감정은 『누구나 홀로 죽는다』에 몰입한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나치가 개새끼들이라는 것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기에. 다만 굳이 이 음습한 분위기에 억지로 긍정적인 일면을 투자해 해소하는 것을 원하지 않더라도, ‘앞부분의 인물들이 서로 등쳐먹을 계획을 세우고 권력에 휘둘리는 모습의 분량을 조금 축소시켰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들 것이다. 800쪽에 가까운 분량의 대부분이 음습하고 잔혹함과 동시에 자신의 생각을 강화하기 위해 비슷한 관점이 되풀이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그 험난한 여정 중 아무리 봐도 불필요해 보이는 경로가 있다면 소설을 완주했다는 성취감과 보람이 어느 정도 무너져 내리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