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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갤에 시지프신화 좋아하는 사람이 많네


나는 개인적으로 실존주의 자체를 높게 치지 않아서, 카뮈와 사르트르도 별로 좋아하지 않음


예전에 썼던 시지프 신화 리뷰를 조금 고쳐서 다시 한번 올릴게


자기가 좋아한다고 너무 화내지는 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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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카뮈의 글을 읽고 있으면 이 사람이 무언가 혼란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문제의식은 분명 칸트의 철학과 동일한 출발점에서 시작하지만, 정작 그 문제의 해결방식은 칸트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부조리는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명철한 이성이다(시지프 신화 75면).”

 


즉 물자체에 대한 파악불가능을 이성이 스스로 인식하는데서 부조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물자체의 영역에는 칸트가 특수 형이상학으로 분류한 일점근원으로서의 신, 총체성으로서의 세계, 제1원리로서의 자아가 포함된다. 이걸 파악할 수가 없기에, 즉 이 세계에는 그 무엇도 진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에 모든 존재들은 당위를 잃어버리게 되고, 인간은 그저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부조리가 시작된다.


물론 이는 올바른 추리이다. 이 세계에 당위성이 없다는 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의 삶 따위에 의미가 없다는 것, 단지 우리는 이 세계에 피투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은 백번타당한 말이다.


잠깐, 다시 한번 묻자. 정말 그런가? 우리는 이 세계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는가? 칸트의 입장에서 보면 카뮈의 철학은, 이성을 ‘규제적’이 아닌 ‘구성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부조리라는 것은 결국 이성이 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데 의미가 없으니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미를 찾으려는 이성의 활동 자체가 사실은 현상계의 논리인 인과성을 물자체의 영역에까지 대입해버리는 이성의 오류추리, 이율배반, 이상이다. 내가 태어난 이유, 이 세계의 진정한 진리, 절대불변의 진리 같은 것들은 당연히 이 세상에서 찾을 수가 없는 것들이다. 애초에 발견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려고 하니 인간은 부조리하다는 기이한 결론을 내려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성은 이 세계 즉, 현상계의 원리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있는 존재이다. 현상계는 법칙에 지배되고 있으며 그 너머의 것을 이성은 파악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성은 현상계의 법칙(인과성, 생리적 현상 등)이나 어떠한 정신적 경향성(욕먹으면 화나고, 칭찬하면 기분이 좋아지는)에 종속되지 않은 존재이다. 칸트 식으로 표현하자면 타율에 제약되지 않는 존재, 즉 무제약자이다. 물론 이것을 ‘인식’한다거나 ‘대상화’, ‘개념화’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가 스스로를 찍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은 그 스스로를 온전히 인식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실천’을 통해 우리의 이성이 무제약자임을 파악할 수 있다. 가령 상대방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나더라도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든지, 자신이 믿는 신념에 의해 단식행위(물론 우리의 육체는 법칙성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고 심할 경우 죽게되겠지만)를 한다든지 하면서 이성이 무제약자임을 ‘인식’하지는 못 해도 ‘의식’할 수는 있다. 그래서 칸트는 물자체의 영역은 ‘순수이성’으로 파악하려고 하지말고, ‘실천이성’ 즉 윤리적인 행위를 통해 다가가야 한다고 말했던 것인데, 카뮈는 논리는 여기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그의 실존철학이란 기껏해야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계는 의미가 없다, 우리는 이런 부조리함에 대해 끊임없이 거부하고 반항해야 한다”라는 수준에서 멈춘다. 말하자면 카뮈는 이성의 한계만 알 뿐, 이성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카뮈에게 이성이란 무제약자가 아닌 세계 내부를 벗어날 수 없는 제약자에 불과하다.

이성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림으로 인해, 이 세계에서의 윤리에 대해서도 그는 잘못 판단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볼 때 책임지는 사람은 있을 수 있으나 죄인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카뮈의 이 말은 멋드러진 말이긴 하나, 그의 논의가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논리적 파탄성을 노정하고 있다. 책임지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귀책사유를 지닌 자, 즉 법의 영역에 속한 인간은 있다는 말이고, 죄인은 없다는 말은 윤리적 영역에 속한 인간은 없다는 말이다. 즉 카뮈는 윤리는 사라지고 법만 남은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본원적 당위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든 추구할 수 있으며 다만 속한 세계에 따라 그것이 위법일수도, 합법일수도 있을 뿐이다.


카뮈가 범죄를 근원적으로 옹호하고자 저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기보다는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윤리적 가치가 사라졌음을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칸트는 ‘실천이성’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카뮈는 칸트의 노선을 따르지 않고 ‘실존주의’로 나아간 것인가? 우선 그의 사상적 기반인 실존주의가 애초부터 ‘주체철학’에서 파생된 사상이라는 점은 기억해야한다. 『시지프 신화』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 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밖에,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어떤가, 이성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카뮈의 범주 운운이 칸트를 노리고 한 말임은 명약관화하다. 그는『시지프 신화』에서 칸트가 정립한 주체의 인식체계(감성의 두 가지 직관형식과 오성의 범주, 이성의 규제적 사용 등)에서 주체 그 자체의 문제만 논하자고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주체가 죽을지 살지가 중요한 것이지, 주체의 인식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는 알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근원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주체’를 어떤 ‘실체’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주체는 실체가 아니라 구성된다고 말하는 수많은 현대 철학자들, 가령 라캉이니 알튀세니 하는 자들을 소환하려는 것은 아니다. 카뮈 후대의 철학자들을 데리고와 카뮈를 반박하는 건 너무 손쉽고, 비겁한 짓이다. 내가 살펴보고 싶은 사람은 16세기의 데카르트이다.


카뮈의 논리는 데카르트의 논리와 똑같은 형태이다. 즉 데카르트가 주체 외부의 것들을 의심함으로써 코기토를 도출해낸 것처럼, 카뮈 역시 주체 외부의 것들을 부정함으로써 실존적 주체를 도출해내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주체 외부의 것들이 부정당했을 때 주체는 필연적으로 공간과 시간을 탈각한 공허한 형태일 수밖에 없는데, 데카르트가 이를 신존재증명을 통해 다시 공간과 시간 속으로 되돌려놓고 있는 반면, 근대(이미 신이 부정당한 시대)의 카뮈는 신에게 의존할 수 없기에 역으로 신에 의해 고통받는 존재 즉 시지프를 소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카뮈가 시지프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은유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주체를 다시 시공간속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어떤 ‘행위’를 ‘반복’하는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카뮈의 공허한 주체는 시지프의 은유를 통해 독자들도 눈치채지 못하게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온다.


또한 카뮈는 자신이 도출해낸 논리가 사실은 사회라는 지극히 시공간적인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가 적어도 ‘언어’를 사용해 논리를 구축하는 한, 그의 주장 또한 현실 속 타자들의 ‘상호인정구조’에 기반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상호인정구조 속에서는 카뮈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모두가 추구해야할 윤리적 가치라는 것이 존재한다. 비록 그 윤리적 가치가 법이라는 형식에 의해 대표되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인간은 예술과 철학을 통해 그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현대의 ‘언어적 전회’ 이후 예술과 철학이 무엇보다 언어 그 자체에 천착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벤야민 역시 카뮈처럼 법이 신화적 폭력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카뮈와 달리 언어 그 자체에서 법 이후의 인간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 역시 법이 끝난 지점에서 인간의 모습은 어떠할까라는 고민에 천착한 작품이다. 카뮈는 여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에게서는 언어에 대한 어떤 성찰도 찾아 볼 수 없다. 카뮈의 실존철학은 ‘사회에서 유리된 개인’이라는 신화에 근거해 있다.

 

 

 

생각해볼만한 부분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는 폐허가 된 미래세계를 그리고 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다. 소설은 세계가 어떻게 해서 폐허가 되었는지, 주인공인 아이와 아버지가 어찌해서 살아남게 되었는지, 아내는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설명을 해주지 않는 점에서 완벽하게 실존철학적 모토를 그 주제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세계에 살아가는데에는 이유 따위 없다. 우리는 아무 이유없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이다. 다만 코맥 매카시의 결론은 실존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가 한 일 중에 가장 용감한 일이 무엇이었냐고. 아버지는 대답한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뜬 것”이라고. 이것은 부조리에 반항하라는 카뮈의 말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틀렸다. 아이의 아버지가 정말 죽어버렸으면 하는 끔찍한 세상에서 용기를 내 매일아침 눈을 뜨는 것은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지, 자신의 부조리에 맞서기 위해서가 아니다. 결말에서 아버지는 죽고 아이가 다른 양육자를 만나는 장면은 작가가 진정으로 꿈꾸는 세계가 무엇인지 말해준다. 의미란 없어 보이고 왜 살아야하는지도 모르는 이 세계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은, 물론 부조리에 맞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카뮈가 그런 것은 없다고 말했던)추구해야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코맥 매카시는, 그것이 공동체라고 말하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