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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 독후감: 정신질환자 니체는 낙타였나 아이였나
니체는 정신질환자였다. 말년에 길거리에서 채찍을 맞던 말을 끌어안으며 오열하다 쓰러졌더라는 얘기는 철학을 모르는 사람들도 알정도로 유명한데, 그 사건 이후 완전히 정신을 잃고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냈다. 사실 니체는 어릴 적부터 두통을 앓았고, 군입대 시절 낙마 사고를 겪는 등 병치레를 달고 살았다. 1879년, 35살의 다소 어린 나이에 교수직을 내려놓은것도 건강상의 이유 때문이였다. <도덕의 계보학> 은 그가 바젤 대학의 교수직을 내려놓은지 8년, 정신병원에 입원하기 3년 전, 1887년에 쓰여진 책이다. 보통 1882년부터 그가 정신이상으로 쓰러지기까지가 니체 철학이 완성된 시기라 평가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학>, <우상의 황혼>, <디오니소스 송가> 등 그의 주요 작품이라 평가받는 저작들이 모두 이 시기에 나왔다.
니체의 철학은 위버멘쉬와 영원회귀로 대표되는데, 그 유명한 낙타-사자-어린아이의 비유에서 어린아이가 바로 ‘초인', ‘넘어선 자' 즉 위버멘쉬를 나타낸다. 위대한 철학자 니체는 그가 현대에 철학자로써 받는 높은 평가에 반해, 그리고 ‘superman’, ‘초인’ 으로 번역되는 겉보기에 찬란하고 강력한 이상적 인간상의 철학을 주장했던것에 반해 불행하고도 초라한 말년을 보냈다. 퇴직한지 3년이 지난 후인 1882년 러시아계 사교계 여성 루 살로메에게 두 번 청혼을 거절당했고, 청혼 후 위태롭게, 가까스로 유지돼던 그녀와의 동거 관계는 그녀의 배신으로 비참하게 끝이 났다. 그후 니체는 작은 민족이 당하는 불행의 총량을 다 합쳐도 의지가 강한 인간이 느끼는 불행의 총량에 미치지 못한다는 자신의 말을 몸소 증명이라도 하듯 불면증, 우울증 그리고 아편에 빠져 지내게 된다. 그럼에도 1885년 그는 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써내는데, 그 책에 대한 당대 학계의 평가는 냉담하다못해 적대적이였다. 같은해에 그의 여동생은 그가 혐오하는 바그너의 친구이자 반유대주의자였던 남자와 결혼해 남미로 떠난다. 이와같은 그의 초라한 말년을 보고 ‘신은 죽었다' 외엔 니체에 대해 아는게 없는 사람들은 흔히들 그가 자신의 철학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고, 결국엔 그 자신도 자신의 이상상에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위버멘쉬 개념에 대한 몰이해, 니체의 생애에 대한 겉핥기식 평가에 기반을 둔 오해에 불과하다.
‘도덕 혁명가' 니체는 본 책에서 플라톤 사상에 뿌리를 둔 기독교 철학과 윤리관을 은유적으로, 동시에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그것들에 기반해 정의 되던 윤리적 가치들을 재정의 한다. 그에 의하면 ‘좋음'과 ‘나쁨’은 어원학적 관점에서 본래 우월함과 열등함을 의미했고, 강한 자들에 대한 열등한 자들의, 지배자에 대한 노예들의 패배의식과 원한에서 선과 악이 탄생했다. (이때 지배자와 노예는 포괄적 의미를 가진다.) 선악은 열등한 자의 머리에서 탄생한 것이며, 당대의 도덕은 노예 도덕인 것이다. 죄와 정의는 채무 관계에서 발생했고, 양심의 가책은 강한 자들로 구성된 무력집단인 국가 조직의 등장과 그에따라 발생한 죄와 정의를 등에 업은 형법에 의해 힘에의 의지가 밖이 아닌 본인 내부로 향하는 것을 뜻한다. 모든 국가적 공동체에서 이루어진 조상과의 채무 관계가 신과의 채무 관계로 발전했고, 국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채무가 불어나면서 그것이 이행됄 수 없을정도로 거대해졌다. 그리고 채권자가 채무자에 대한 사랑으로 직접 채무를 갚아 준다는, 니체가 보기에 경탄스러우나 동시에 기괴한 기독교 철학이 등장했다. //그런데 수백년간 서양을 지배해 온 기독교 철학의 금욕적 이상이란 무엇일까? 철학은 고대 그리스의 이(離)교, 플라톤에서부터 이어져 온 탄탄한 반석인 금욕적 이상에 제 몸을 지지해야만 생존할 수 있었고, 자의든 타의든 간에 철학자는 명상적 인간이란 가면을 덮어써야 했다. 명상적 인간은 고대의 예언자, 중세의 마법사를 포함하는 개념인데, 그들은 대중에게 경멸받지 않기 위해 두려움의 대상이 돼어야만 했다. 대부분의 문명에서 그들은 두려움의 대상이 돼는 데에 성공했다. 이때 철학자는 예술가가 작품에 자신의 모든 의지를 집중하듯 정신성의 ‘최적 상태'를 추구하는데, 그들은 대중들에게 익숙한 명상적 인간이라는 프레임을 이용해서만이 최적 상태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최적 상태는 자신만의 생존을 긍정하는 상태, 즉 강제, 방해, 소음으로 부터 자유롭고도 명석한 두뇌와 사고, 도약, 비상을 추구하는 상태이며, 청빈, 검소, 순결은 이를 유지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철학자가 금욕적 이상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들의 ‘덕' 때문이 아니라 이기적이라고까지도 할 수 있는 그들의 기질, 의지 때문인 것이다. 한편 금욕적 사제에게 금욕적 이상은 도구로써 사용된다. 니체에 따르면 금욕적 사제는 양심의 가책을 영리하게 사용해 세상에 병을 퍼뜨려 왔다. 금욕적 사제가 병을 퍼뜨리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그들은 “너 자신만이 너에게 책임이 있다" 라고 가르쳐, “나의 괴로움엔 분명 누군가에게 책임이 있다" 고 생각하는 병든 자에게 먼저 상처를 입힌다. 그다음 의사를 자처해, 치료제가 아닌 환각제, 진통제를 처방한다. 마지막으로 의사는 상처에 죄책감이라는 독을 발라 병든 자를 죄 지은 자로 규정되게 하고 길들여지게 한다. 그런데 금욕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금욕적 이상의 반대 개념, 대응물은 무엇일까? 혹자는 천문학을 포함한 현대의 학문이 그것이라 하겠지만, 니체는 학문이 금욕적 이상의 최종 형태라고 설명한다. 금욕적 이상은, 니체가 책의 첫장부터 암시해 왔듯이, 인류의 고통에 하나의 의미를 제공한 것이다. 인간은 고통 때문에 고통받는것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에 고통받기 때문이다. 금욕적 이상은 이 무의미의 간극을 매꾸어 준 것이다. 금욕적 이상이 고통의 의미가 돼었다… 더 나은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병든 자, 절대다수의 노예들은 이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할까?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 우리는 이 책을 읽고 무슨 생각을 했나?
병든 자는 과연 자신이 니체가 설정한 ‘병든 자'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만약 알았다면 그것에 동의할 수 있을까? 자신의 불행이 자신이 선망하던 또는 시기하던 이의 불행보다 훨씬 미미했단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자신같은 사람은 수천명이 희생돼도 좋다는 니체의 말에 수긍할 수 있을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을 받은 바그너는 어떻게 반응했던가? 니체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 니체를 혐오하는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니체의 여동생과 그녀의 남편이, 반유대주의자들이, 파시스트들이 그의 사상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보라. 당대의 관점으로 봤을 때, 물론 니체가 보기에도, <도덕의 계보> 는 사실 아무 의미 없는 저서였을 것이다. 이 책 이전부터 노예 도덕의 전복을 문학적 아포리즘으로 부르짖었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는 비난을 받았다. 사실 굳이 이유를 대지 않더라도 니체는 이 모든 결과들을 필연적으로 예견했을 것이다. 노예들이 노예 도덕을 부정할 리 없기 때문이다. 병든 자들은 모르겠으나 ‘길들여진 자' 들이 그들의 병을 알아볼 리 없고 그들의 ‘주인님’ 을 비난할리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19세기 유럽에 과연 미처 길들여지지 않았던 병든 자가 과연 남아 있었을까. 위 명제들은 너무나 명백하다.
그러나 니체는 그들 가운데서 망치를 들었고 복수초가 눈을 녹이고 꽃을 피우듯 그들 가운데서 눈부신 저서들을 써냈다. 사실 그는 언제든 ‘병 들수' 있었다. 자신의 고통에, 강력하고 파괴적이며 아무 의미 없는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니체는 그 고통을 위엄 있는 사자처럼 온전히 마주했다. 고통의 무의미함을 온전히 마주했다. 인류 최고의 발명, 열다섯 세기동안 인류를 ‘구원' 한 것에 망치를 내리쳤다. 그리곤 삶을 사랑하라고 했다… <도덕의 계보> 는 그자체로 니체가 이미 ‘넘어섰' 음을 방증한다.
//반성: 원래 현대인은 노예인가 주인인가 병들었는가 건강한가 만약 병든자라면 어떻게 이 책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 철학의 효용까지 녹여내려고 했으나 사고력과 필력 모두 모자람을 깨닫고 주제를 대폭 축소했다… 거기에 노예 도덕과 위버멘쉬에 대한 ㄴ용이 금욕적 이상에 대한 내용에 비해 너무 빈약하다. 사실 이 주제는 순전히 내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니체를 아는 사람들은 진부한 말들이 반복되고 있는데다 너무 질질 끌리고 있다고 생각할것이다. 아직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완벽보단 완성이 더 중요하다는 겸손한 생각아래 글을 억지로 완성시키느라 나름 분투했다. 더 정진하는 수밖에 없다. 책을 이해했다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 그건 사실 대단한게 아니다. 다시 읽어봤는데 결론이 너무 감상적이고 투머치하다는 느낌이 든다… + 마지막 문장엔 <도덕의 계보> 대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 들어가야 더 맞는데 도덕의 계보 독후감이라 어쩔 수 없이 전자를 선택했다. 구어체로 쓰인 책보단 경구로 쓰인 책이 더 의미에 잘 부합하기 때문.
++ 초고니까 너그럽게 봐주되 많은 조언 부탁해... 문장들이 아직 매끄럽지가 못하네
본문을 읽어보고 싶으나 행간이 너무 좁아서 모바일로 도저히 못 읽겠읍니다...
앗 수정할게 - dc App
수정해쓰
그럿게 별로니...ㅠ - dc App
ㄴ ㄴㄴ 개추한건데 ㅋㅋㅋㅋ - dc App
추천 누른거임 ㅋㅋ - dc App
아 ㅋㅋ - dc App
밑에 표현 물어본 게 독후감 때문이었구나
근데 제목이랑 내용이 너무 관계없지 않나?
음 '낙타였나' 라는 워딩 때문인것 같은데 결국 하고싶은말은 니체는 위버멘쉬, 어린아이의 경지에 도달한게 맞다! 였어 - dc App
니체는 스스로 "나는 초인이 아니라 초인이 나타날 수 있도록 길을 깔아주는 다리"라고 하지 않았나? 말년에 미친 건 논외로 해도 기존의 믿음들을 부순 '망치'는 아이의 도구보다는 사자의 도구에 가깝지 않나 생각함. 내가 초인을 이해 못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고...
오..낙싯바늘 얘기는 들어봤어도 그건 못들어봤네.. 근데 난 노예들의 세상 속이서 배신과 실연으로 인한 극심한 우울증 속에서도 그의 저서들이란 가치를 만들어 낸 것에서 니체는 어린아이 라고 할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어 '망치칠' 이란 단어가 어감자체가 사자가 할 만한 것 같지만서도 사실 그 은유의 원관념은 '저서를 써낸 것' 이잖아 - dc App
다리 얘기는 한번 찾아보고 다시 생각해봐야 할것 같네. 그리고 나도 사실 니체는 처음 읽어본거야 ㅠㅠ 필력이 부족해서 전달이 덜됐나봄 - dc App
잘 읽었다. 니체의 삶과 철학은 참 아이러니한 거 같아... - dc App
고마워 니체 정말 어렵지 근데 그래서 재밌는것같아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