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팡세의 6회차 독회날입니다. 위대의 장에 관련된 내용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독회는 2/19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주최자의 판본은 민음사로, 본문에 표기되어 있는 숫자들에 관해서는 을유판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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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 (397) :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에 있다. 나무는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비참함을 깨닫는 것은 비참하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
비참하다고 느끼면서도 우리가 자신으로 하여금 더 나은 것이 되려고 하는 한은, 그것은 위대한 것으로써 작용할지도 모른다.
215 - (339) : 나는 손,발, 머리가 없는 인간은 상상할 수 있다.(발보다 머리가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경험이다.) 하지만 사유없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돌이거나 짐승일 것이다.
생각한다는 그 한가지 이유만이 우리를 위대하다고 여기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려 들때, 우리는 더 이상 위대하지 않다.
225 - (278) : 신을 느끼는 것은 심정이지 이성이 아니다. 이것이 곧 신앙이다. 이성이 아닌 심정에 느껴지는 하나님.
보이지 않지만 믿게 되는 것은 이것에 기인한 결과일 것이다.
228 - (369) : 기억은 이성의 모든 활동을 하는데 필요하다.
도덕과 예절은 배우고, 기억하고, 체화되고, 진심으로 여길때에야 처음으로 기능할 수 있다.
감정은 기억함으로써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감정일지라도 본능적으로 표출하는 방향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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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위대’ 파트가 바로 팡세의 핵심이 아닐까 싶음. 몽테뉴를 비롯한 회의주의자들과 파스칼의 차이는 바로 이 ‘위대’에 있음. 몽테뉴와 파스칼 둘 다 인간이 비참한 존재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파스칼은 더 나아가 비참함을 알고 있기에 역설적으로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함.
무너진 집은 비참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만이 비참하다는 파스칼의 표현을 생각해보면, 파스칼은 ‘비참’을 사유의 근원으로 보는 듯하고, 그의 신앙론과 엮어보면 자연을 초월한 신앙에의 시작으로도 보는 것 같음. ‘비참하기에 위대하다.’라는 명제는 이렇게 성립되는 게 아닐까 싶음.
추가적으로, 신을 느끼는 것은 심정이지 이성이 아니다, 심정의 직관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계승한 얀센주의자다운 면모를 보여줌. 머 팡세에서 늘상 하던 말이긴 하지만.
그렇게 보면 파스칼은 결국 인식이 존재를 위대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던 걸까? 무너진 집이나 쓰러진 나무는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비참한 상태에선 그걸 얼마든 인식할 수 있으니...
파스칼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한 처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더 나은것으로 하고자 하는 그 태도에 위대함이 깃든다고 생각한게 아닐까 싶어. - dc App
인식이 위대함으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 생각한 것 같음. 우리가 삶의 비참함을 인식한 덕분에, 자연적인 세상을 넘어서 초월적인 신의 세계로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되니까...
어찌 보면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
드디어 파스칼의 명언 오브 명언인 생각하는 갈대가 등장! 반가웠음ㅋㅋ 이번 장에서도 역시나 신앙심과 기독교적 믿음에 대한 파스칼의 신념은 빠지지 않았음. 마찬가지로 회의주의자로 일컬어지는 데카르트류 이성신봉자들에 대한 비판도 msg처럼 중간중간 첨가된게 패턴 자체는 지난 장들이랑 비슷했던듯. 다만 이번 장에서는 인간의 실존적 위치에 대한 파스칼의 생각을 좀
더 엿볼 수 있었음. 공간이 아니라 사유에서 자유를 제한당한다는 점에서 파스칼이 얼마나 범우주적으로 사고하는지에 대한 본인의 자신감을 알 수 있었고, 현인들이 이런 점들을 짚을 때마다 뭔가 범속한 나는 늘 데카당스에 빠지는 거 같음. 우주적 존재로서 나는 먼지만도 못한 존재인데 열심히 살아 뭐하나... 하고 탕진잼을 시전하면서 텅장을 만들어버리는 것.
욜로잼은 위험함. 하여튼 이야기가 딴 데로 빠졌는데 파스칼은 결국 인간 따위가 세상 모든 섭리와 자연의 이치를 다 파악할 수는 없으니 동식물보다 좀더 이성적이라 깝치지 말고 경건하게 신의 뜻을 '이성'이 아니라 느끼라고 얘기한게 아닐까 싶음. 직관에 대한 언급은 아마 그런 부분으로 해석하면 어떨까...
신을 이성을 통해서 제단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통해서 느끼는 것이 겸허한 자세를 만듬과 동시에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고 본걸까? - dc App
나는 인간의 위대함과 신을 느끼는 직관은 별개로 이해했음. 전자는 사고의 확장을 얘기하는 거라 지극히 이성적인 영역, 후자는 일종의 도덕적 정언명령이기 때문에 어떤 판단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고 봤음
"우리는 이성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심정을 통해서도 진리를 안다"의 구절을 보니 이성과 직관의 구분이 좀 더 명확하게 전달되는 거 같기도 하다. 이런 부분은 생각을 못했었는데 XD - dc App
파스칼의 머릿속에서만 단상으로 존재하는 사유들을 나름의 근거들로 따라가는 거라 빡세긴 함ㅋㅋ 나도 내 해석에 대한 자신이 없음
미안하다.. 팡세 책을 본가에 두고왔다..
파스칼이 이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흥미로웠음. 213. , 214등에서 이성의 한계, 그 결함을 지적하면서도 사욕에서 (기독교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처럼 훌륭한 질서', '하나의 놀라운 규범'을 만들었다면서, 또 인간의 존엄은 이성으로부터 비롯된다면서 이성을 인정함. 믿음과 이성을 구별한 오컴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그것과는 좀 다른 것 같아서 헷갈림..
진정한 신앙은 신이 내린 심정의 직관으로밖에 얻을 수 없지만, 그 임시변통으로 이성을 활용하라는 걸까? '두 본성의 표시'라고 한 것과 앞의 전락한 왕 이야기를 한 걸 보면 원래 진정한 인간은 이성과 신을 인식할 수 있는 직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타락해서 직관의 본래 능력을 잃어버려 비참해졌다는 것 같기도 함
각자의 좋은부분을 인정하면서도 그 둘을 구분지으려고 노력했다고 보여지더라.이런 부분들이 오히려 한가지만 가지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알려주려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점은 에피논다스의 구절에서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아. - dc App
처음부터 심정의 직관으로 신을 확신하는 게 가장 좋은 신앙이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엔 이성을 통해 신을 납득하고 이후에 심정적인 확신을 쌓아가는 게 좋다는 뜻인 거 같음.
에피논다스 구절에서는 '정신', 이성만을 다루고 있는 게 아닐까? '사람이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과 '사유는 인간의 위대를 이룬다'도 있으니까..? 어렵다 ㅋㅋ
구/그러면 파스칼은 이성을 통해 얻는 신앙/직관을 통해 얻는 신앙을 구별하고, 후자에 우위를 두었다고 할 수 있겠네
좀 이분법적이긴 한데 나는 인자함과 용맹함을 가졌던 것처럼 (중략) 두 양극단을 통해서... 라는 부분에서 이성과 심정의 극단을 떠올렸거든. 그래서 비약이 심하긴한데, 이성과 감정이 서로 맞물리는 작용을 하는게 아닐까하고 생각했어. - dc App
근데 이성하고 심정을 다루고 있다고 하면, 뒤의 "그러나 이것은 ... 정신의 민첩한 움직임일 뿐이고"나 " ... 정신의 민활성을 표시하오"같은 말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거 같음. 설마 이성하고 심정을 왔다갔다한다고 생각했지는 않을 테니까
듣고보니 그런거 같네... 내가 또 잘못 생각했나보다 Xl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