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갤에 올라오는 몇 가지 주제들에 관한 생각
1. 책 (or 문학)을 왜 읽냐?
아마 도서갤, 독서갤 그리고 그 이상 문과생 또는 더 포괄적으로 2000년간 인간이 생각해온 몇 가지 근본적인 주제중 하나일 것이다.
나의 결론부터 말해보겠다.
'그것(독서하는 이유)을 정의하는 행위나 사유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차라리 포커스를 독서에 대해 왜 정의하려하는지 본인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으로 두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우린 이미 행위와 사유가 하나의 근본적인 이유로부터 나오는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느정도 시간을 투자하여 (또는 몇몇의 게시글처럼 남들에게 물어봐서) 그것을 밝힌다한들 그것은 그 순간, 그 때의 독서의 이유일 뿐이다. 즉 독서의 이유에 대한 절대원인(바뀌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정의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다. 고로 독서갤러가 재미로 본다고 해서, 무언가를 얻기위해서 본다고 해서, 또는 지적 허세를 위해 본다고 해도 그것은 영구적이지 않기 때문에 전혀 의미가 없다.
우리가 밥을 먹는 이유도 그렇다. 밥을 먹는 행위의 이유는 영양공급의 목적, 사교의 목적, 식도락의 목적등등 수없이 많고 그 이유는 그 사람한테서 영구적이지 않다.
다만 그 때 독서의 이유를 왜 알고 싶었는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적어놓는다면 그리고 그런 생각이 날 때마다 보고 다시 새롭게 정리하여 적고 이러한 행동을 반복한다면, 좀 더 발전된 방향으로의 사유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다.
2. 자살
독서갤러라면 아마 까뮈나 사르트르등의 실존주의 문학을 한 번쯤은 접해봤을지도 모른다.
실존주의도 뭐 다양한 범주가 있고 하나의 말로 정의하긴 힘들지만 간단히 설명해보자면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을 빌릴 수 있다.
'인생은 B와 D사이의 C이다.'
즉 Birth와 Death사이엔 Choice, 선택만이 존재한다는 것
그렇게 실존주의에선 생과 죽음 앞에서 우리의 선택만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본다.
자살은 그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가장 완벽에 가까운 실존주의적 실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까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깨달았듯 죽음이란 어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절대적인 보편적 진리이다. 그런 불변의 진리 앞에서 그 진리를 맞이하는 순간을 스스로 정한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 생중 가장 최고의 선택이지 않을까? (물론 죽음뿐만 아니라 생도 절대보편적 진리지만 태어나는 것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살기 싫어서 자살을 한다.'(이 관점에서는 '죽고싶어서 자살을 한다.'가 더 좋은 표현이긴 하다)라는 말은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삶에 완전히 미련 없을 때, 정말 죽고 싶을때, 실존주의자로서 완벽한 삶을 실현시키고 싶을 때 해야하는 말이겠지.
다만 그것이 단순히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어서 하는 말이라면.. 그래서 자신이 살기위해서 죽음이라는 아름다운 선택을 인질로 내놓는 행위라면
정말 더럽고 추하게 느껴질 뿐이다.
1줄요약
1. 니 좆대로 생각하셈 2. 뒤질꺼면 아갈털지말고 빨리 뒤져라
응 개똥철학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기는 일기장에
흠 어렵다...
똥
글쓴이 댓글 정리 좀 부탁해.
글이 단번에 들어오지는 않네
씨발 똥냄새 여태 안 치우냐
개념글이라 대단한글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보잘것없는글이네..
캬...... 사르트르의 환생...
'자살은 그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가장 완벽에 가까운 실존주의적 실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혹 카뮈의 철학 에세이인 ‘시지프 신화’를 읽어 본다면 글쓴이의 생각에 변화가 조금 생길지도? 단적으로 말해 가장 궁극적인 실존주의적 실현이란, ‘부조리에 끝까지 맞서는 것’이지. 회피하는 게 아냐. (특히 카뮈의 경우 더더욱 그래.) 그 저서에서 카뮈는 ‘부조리’를 회피하는 대표적 예시로 ‘자살’을 들어. 결국 카뮈 입장에 따르면, ‘자살’은 실존주의적 실현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 중 하나가 되지.
물론 실존주의 작가들이 저마다 논하는 실존주의가 하나로 명확히 합치되기 어렵다는 점엔 동의해. 하지만 그럼에도 글쓴이의 해당 문장에는 오독의 여지가 엿보이는 것 같아.
음, 조악하지만 조심스럽게 카프카로 예시를 들어 볼게.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실존주의적 투쟁이라고 보는 글쓴이에겐 카프카가 가장 친숙하게 여겨질 것 같아서야.
일견, 카프카가 ‘인간이 부조리에 대처하는 방식’을 표현하는 면은 카뮈의 면보다는 훨씬 무기력해 보여. 그러나 카프카의 저서에서 역력히 엿보이는 ‘좌절로의 무기력한 최후’에조차, 인물들은 결코 ‘죽어서 이 부조리로부터 벗어나리라’를 말하지 않아. 그럼 카프카 저서의 인물들은 무얼 말하나?
길이가 늘어져 미안하지만, 내 글이 부족해 자칫 혼동을 야기할 것 같으니 잠깐 정리 차원에서 부연을 덧붙이도록 할게. 부족하게나마 뜻매김 해 보자면, 글쓴이도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부조리’란 ‘세계와 나의 관계 양상’을 뜻하지. 이 ‘부조리’를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 공포와 무지 속에서 소외감과 이질감을 느끼게 되고. 사실 죽음 역시 ‘부조리’의 일면에 속해. 죽음 역시 ‘세계와 나의 관계 양상’ 중 하나란 소리야. (속되게 말하자면,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공포와 무지에 시달리지.)
그럼 다시금 질문으로 돌아가야겠지. 카프카의 인물들은 어떻게 투쟁(실존주의를 실현)하나? 결국 그 방식이란 카뮈가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부조리(죽음)’에 맞서서 끝까지 발버둥치는 것이지. <변신>의 그레고르며, <이방인>의 뫼르소는 사실 같은 사례야. 다만 각기 인물들이 보이는 태도에서 미묘한 차이점이 있을 뿐이지. ‘죽음’이라는 부조리를 마주하며 투쟁하는 과정에서, 그레고르는 무기력함에 의한 절망을 토로하는 것이고. 반면, 사형 판결을 기다리는 뫼르소가 희열감과 환희를 느낀 까닭은 뭔가? 자칫 죽음으로 부조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 보이기 쉽지만, 실상 ‘죽음’에 맞서면 맞설수록 역설적으로 ‘삶(부조리에 저항하는 나 자신의 존재)’을 더더욱 역력히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
물론 나는 문학적 해석에 단일한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하지만 글쓴이가 실존주의 문학을 아끼는 아무개라면, 본문의 해석은 조금은 섣불리 이뤄진 게 아닌가 싶어서 지난하게 댓글을 달게 됐어. 불쾌하게 여겨졌다면 미안해. 그리고 이 글이 잘 읽히지 않는다면 그건 순전히 내 능력 미달인 탓이니 너그러이 감안해 주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