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2일자 독후감.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민음사, 2004.

인간 실격의 주인공은 사회가 자신에게 원하는 특정한 상(象)이 있음을 어릴 적부터 깨닫고  나름대로 보통의 삶을 연기해가며 살아간다. 그런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삶이 연극임을 간파해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부렁의 연극을 제한다면 그는 그저 허상의 존재, 분명 존재하나 동시에 분명 실재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주체로서의 자각이 없는 꼭두각시임이 들통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주인공의 고통은 그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데서 비롯한 것이다. 인간 사회의 모든 당연함이 태생적으로 그에게는 전혀 당연한 것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릴 적부터 당연함의 부자연성을 인식하지는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문득 그런 경험들을 하지 않는가. 남들은 모두 당연시하고 넘어가는 문제들이 나로서는 결코 넘어가기 힘든 걸림돌로 작용할 때가 있지 않은가. 내 경우의 예시를 몇 가지 들어보겠다.

돈보다 사람 목숨이 중요하다면서 왜 병원비가 없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환자를 쫒아내는 것이 합법이고 이 사회로부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가.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면서 왜 인체에 백해무익한 담배를 팔아치우는가.

겨우 몇 분의 차이로 누군가는 법적으로 성인이고 다른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가.

우주의 시간은 분절되지 않고 그것이 팽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한히 흘러가는데 왜 초와 분, 시와 하루로 그것을 갈가리 찢어놓아야 하는가.

같은 일을 해도 가정부는 돈을 받고 가정주부는 돈을 받지 않는 이유는 뭔가.

물론 내가 소설의 주인공처럼 위와 같은 의문들에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몰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세상의 극소수는 저러한 의문들에 목숨을 건다. 나는 이 사회의 진보가 그러한 시대의 광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여긴다. 불행히도 시대의 광인들 중 대다수는 주인공처럼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인간으로서 실격된 채 삶을 마감하였을 것이다. 시대의 광인들이라는 극소수의 부류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살아생전에 정상성을 획득하였을 것이다.

아마 지금 우리가 무시하고 천대하고 비웃는 이들 중에도 주인공과 같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모순에 짓밟혀 자아붕괴의 첨단으로 나아가는 그들의 인생에 조의를 표한다. 나는 겁쟁이이기에 저 멀리서 관망하며 안전한 소시민의 쾌락을 영위하겠다. 과연 두 부류 중 어느 쪽이 인간으로서 실격인지는 후대가 판단하겠다만 내 개인적으로는 두 부류 모두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비인간적이라는 하나마나한 생각이다. 인간의 본질을 굳이 찾아내자면 그 생래적인 모순성과 양면성만이 절대적이지 않을까.

그것의 유일한 해결은 오로지 저자가 택한 것처럼 스스로의 삶을 놓아버리는 것. 그렇기에 자살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라는 말은 자살의 찬미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