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일자 독후감.
정혜영, 대중문학의 탄생, 아모르문디, 2016.
한반도의 일제 식민지기를 규정하는 다양한 이론 중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게 있다. 말 그대로 식민지를 겪으며 한반도가 근대화의 길로 나아갔다는 이론이다. 꽤나 많은 이들에게 식민사관이자 친일사관이라 비판을 듣지만 사실 엇나간 비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한반도가 식민지를 겪지 않았어도 자생적 근대화를 이룩할 가능성과는 별개로 현실 역사에서 식민지기를 통해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닌가. 우리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점은 그러한 근대화가 조선 인민들을 위한 것인지 일본 제국의 지배계급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지 근대화 자체는 아니란 이야기이다.
식민지에서의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주체적일 수 없다. 그것은 식민지 당국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근대에 들어 탄생한 대중문학은 특히나 일제의 관심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대중문학은 말 그대로 대중들에 의해 읽히는 문학이다. 그렇기에 대중문학은 독자인 대중들의 삶을 반영함과 동시에 특정 이데올로기를 전파해 대중들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식민지 조선인들의 힘겨운 생활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거나 그들을 계몽시키고픈 욕망과 내선일체·대동아전쟁 찬양 등 일제의 이데올로기에 동원시키고픈 욕망. 이 두 상반되는 욕망 사이의 긴장 속에서 식민지기 대중문학이 어떻게 나아갔는지를 이 책은 훌륭히 보여주고 있다.
책은 1부 ‘식민지, 대중, 번역탐정소설’, 2부 ‘근대적 역사의식과 역사소설’, 3부 ‘전시동원체제의 연애소설’, 4부 ‘식민지 근대성과 종합대중잡지’ 총 4부에 11장으로 구성돼있다. 모두 새롭고 의미있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지만 나는 1부 3장 ‘방첩시대와 소년탐정소설’을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먼저 1부 3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37년 6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소년》에서 연재한 소년탐정소설 《백가면》은 소년독자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받는다. 《백가면》은 수길과 대준이라는 두 소년이 탐정 유불란과 함께 백가면이라는 이름의 괴한과 적성국 스파이들을 상대로 대결을 펼치는 내용이다. 그들이 대결을 펼치게 되는 계기는 강박사의 발명품 때문인데 그것은 신무기의 설계도로 “그 발명품을 손에 넣는 나라는 어느 나라든지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을 정도”라고 작중에서 설명하고 있다. 《백가면》은 과학자인 강박사나 탐정인 유불란을 통해 과학적 지식을 보급하면서 독자들을 계몽, 나름의 과학대중화 운동을 실천한다. 한편 수길과 대준은 ‘충’, ‘효’, ‘의’라는 조선의 전통적인 유교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따르는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백가면과 중국인, 러시아인, 영국인 등의 스파이들은 당연히 신무기의 설계도를 손에 넣어 일제의 패망을 원한다. 그들의 목표는 주인공 무리에 의해 실패로 돌아간다. 즉 식민지 조선의 탐정과 소년들이 힘을 합쳐 일제의 패망을 막는 것이다. 게다가 탐정인 유불란의 경우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일본인 경부들과 긴밀한 협력을 선보인다. 결국 《백가면》을 읽는 10대와 20대 초반의 독자층은 일본제국이라는 ‘내 나라’를 지켜야한다는 애국심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또한 《백가면》은 1930년대 중반부터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는 1940년까지 신문, 잡지 등에 스파이나 첩보전 관련 내용이 빈번히 소개되고 전파되었던 방첩 시대와 연관되어 있다. 특히 《백가면》의 연재 종료 년도인 1938년에 ‘조선방공협회’가 설립되었다는 사실 역시 의미심장하다.
이렇듯 식민지기의 대중문학은 《백가면》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현실의 반영, 대중의 계몽, 일제 이데올로기의 전파라는 삼중의 목적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책에서도 탐정소설뿐 아니라 역사소설, 연애소설, 대중잡지 등 여러 사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식민지기의 환경 속에서 대중문학은 어떠한 목적성 없이 대중을 향한 문학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러한 카오스야말로 식민지기의 문학, 아니 식민지라는 시대의 특징이라 보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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