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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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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에 대하여

한 천재에 대하여

그 불쌍한 자아에 대하여

그리고 사랑에 대하여

한줄요약
사랑이 부재하는 삶은 어떤 악취를 남기는가


쥐스킨트의 향수, 처음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말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 뿌리고 냄새나는 그 향수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냄새로 시작해 냄새로 마무리되는, 냄새의 이야기고, 냄새에 의한 이야기이고, 냄새나는 이야기다. 여기에 비정한 이야기꾼, 쥐스킨트의 화술(=필력 겸 문체)까지 곁들어지면서 정말 형용하기 어려운 진한 냄새가 책장을 덮으면서 풍기게 된다.

향수의 내용은 지극히 간단하다. 파리의 악취 속에서 태어난 그르누이라는 천재가, 가장 지고한 냄새를 자신의 것으로 손에 넣기 위해 성장하고 애쓰는 이야기이다. 그르누이는 희대의 천재인데, 그 천재성에 대한 묘사는 쥐스킨트를 믿고 보면 된다. 결코 가벼운 천재가 아니며, 전무후무한 재능의 소유자라는 걸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동시에 그의 소시오패스적 성향도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툭툭 튀어나온다.

향수에서 주목할 점은 몇 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바로 쥐스킨트가 비정한 이야기꾼이라는 점이다. 재담꾼이라 해도 좋다. 쥐스킨트는 "과거"를 고증하는 "현대인"작가라는 인식을 가지고 소설을 썼으며, 그러한 인식이 반영된 문장은 그가 우리에게 하나의 긴 썰을 풀어주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아주 재치있고 말 잘하는 친구가 얘기해주듯 말이다.

하지만 비정하단 부분에서 주의해야 한다. 쥐스킨트는 재담꾼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밝고 희망찬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인간미 없고, 정도 없고, 사랑은 더더욱 없다. 이곳에는 악한 인간과 악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 뿐이다. 선한 인간이 있다고 하면 그르누이의 희생양밖에 없을 것이다.

서사의 흐름 속에서도 그르누이가 신세 졌다가 떠난 이들의 말로를 전부 조명하는 것도 비정한 이야기꾼의 특징이다. 그런 말로가 어떤 이들에겐 "굳이? 왜?"라는 인상을 심어줄 순 있어도, 그런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조명됨으로써 작품을 아우르는 음울하고 비정한 분위기가 고약하게 풍긴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내가 도입부에서 '사랑'을 강조한 이유는, 이 소설은 아주 고약하게도 냄새를 집요하게 다루는 소설이지만, 그것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사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르누이의 탄생에 대해서 쥐스킨트는 그가 살기 위해 사랑을 버렸다고 했다. 즉, 사랑 대신 삶을 택해 살아남은 것이다. 그는 그 이후로 자신의 소명을 찾기 전까지 살기 위해 살아남는다.

그르누이는 사랑받지 못했고, 특히 냄새가 없단 점에서 더더욱 그러했다. 여기서 냄새는 '자아' 내지는 '영혼'에 속하는 것이다. 자아가 없는 그르누이는 놀랍게도 이 세상의 모든 냄새를 감별하고 분석하고 심지어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그는 냄새를 갈망했다. 더 많은 냄새를, 더 많은 영혼을, 그럼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자아를 찾길 갈망했다.

그러던 중 마레 거리의 소녀의 냄새를 맡게된 것이고, 이후에 로르의 냄새를 탐하게 된 것이다. 두 소녀의 냄새는 사랑의 근원이고, 사랑 그 자체였으며, 사랑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가장 순수한 자아에 속한 것이기도 했다. 그르누이가 이런 냄새를 손에 넣고자 한 건 사랑이 결여된 자아가 무의식 중으로 결여된 사랑을 갈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결국 그 사랑을 갈취한다. 그 자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그르누이는 깨닫고 만다. 자신이 갈취한 건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하게 만드는 자아일 뿐이다. 그는 흉내쟁이가 되었을 뿐이다. 아무리 자아를 뺏어도, 본연의 자아가 아닌 한 공허할 뿐이다.

그러니 마지막 식인 장면도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사랑 없는 삶을 살아온 자들로서 사랑을 갈취하고자 했을 뿐이다. 물론 신조차 모독하는 천재 그르누이에 의해 휘둘린 것에 가까웠지만, 그럼으로써 그들은 사랑하기 시작했다.(다만 이런 식으로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이 쥐스킨트의 관념을 접하는 것 같아 께름칙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사랑이란 도대체 어떤 개념인가?)

그르누이의 삶은 평생토록 사랑이 결여돼 있었다. 무두장이도, 향수상인도, 귀족도, 다른 향수상인도, 누구도 그를 사랑하기는커녕 이용하기에 바빴다. 그르누이는 거기서 이익과 비위를 맞춰주는 법을 배웠고, 사회 속에서 살아남는 법은 물론이고 성공하는 법까지 멋지게 해냈지만, 정작 사랑받고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그를 사랑해줬다면 얘기는 달랐을까?

나는 확신할 수 없다. 그르누이의 천재성을 알아보더라도 그걸 이해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고, 많은 몰이해의 영역을 남긴 채 자신과 다른 타인을 사랑한다는 건 어떤 것보다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의 운명은 사랑 대신 삶을 택한 순간부터 이미 정해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생선 썩는 악취 속에서 말이다.

그렇게 그의 삶의 족적은 결국 악취나 다름없었다. 책장을 덮고 환희에 찬 미소를 짓는 독자가 많을지, 아니면 충격과 공포에 빠진 독자가 많을지 생각하면 간단한 답이다. 사랑이 부재한 삶은 지워지지 않는 악취를 남기는 것이다.

분명 향수는 재밌는 소설이다. 재담꾼인 쥐스킨트를 믿어도 좋다. 하지만 그 내용과 결말부의 충격적 장면 2개로 인해 섣불리 추천할 수 없다. 프랑스를 배경으로 삼았음에도 독일인의 광기를 잘 엿볼 수 있다. 이탈리아도, 프랑스도 이런 식으로 결말 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바꿔말하면, 선정성과 폭력성을 감안할 수 있는 독자라면 향수의 악취를 흥겹게 들이마실 수 있다.

쥐스킨트가 만들어낸 악취에 취해보시라. 그렇게 되면 새삼 향기로운 사랑이 그리워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