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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데렉 파핏의 책. 원제는 Reasons and Persons. 초판은 1984년.
제목은 나름의 없는 문학성을 발휘해서 굳이 오역해 봤어. Reason은 (철학에서 주로 다루는 또 다른 주제인) 이성보다는 이유로, person은 개성보다는 사람으로 번역하는 것이 책의 내용에 더 맞지 않을까 싶지만, 원제의 운율을 존중해서. 데렉 파핏은 본래 시인이 되려고 생각했었던 철학자였고, 제목도 아마 운율을 생각해서 지었겠지.
파핏은 20세기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하나인데, 사실 내가 이 책을 잡은 것은 윤리학보다는 내 개인적인 관심사인 심리철학적 동기였어. 더글라스 호프스태터의 I am a strange loop 라는 책에 파핏이 이 책에서 소개하는 복제 순간이동 장치의 예시를 차용했는데, 그 예시가 상당히 흥미로웠거든. 그래서 도대체 원저자는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이 예시를 제시했을까, 궁금해서 읽게 된 거지.
이 책에서 다루는 물음들은, 왜 나는 이렇게 행동하는가? 무엇이 나에게 득이 되는가? 그 득을 주고 싶은 나란 무엇인가? 그게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나가 맞나? 얼마나 많은, 어떤 사람들이 존재해야 하는가? 같은 것들이야. 특히 윤리학에서의 비동일성 문제는 파핏이 이 책을 통해서 제기한 문제라고도 하는데, 위에서 이야기한 의문들에서 그게 대강 어떤 문제인지 느낄 수 있을 거야.
문학이건 비문학이건, 혹은 어떤 매체건 관계 없이, 뛰어난 책(혹은 작품)은 독자를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는 힘을 가지고 있어. 수백페이지로 이어지는 긴 책이 가질 수 있는 힘은, 읽는 사람을 천천히 자신의 깊이까지 끌고 들어가서, 그 깊이 안의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거야. 이 책은 바로 그런 힘을 여지없이 발휘하고 있지.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점점 저자가 만들어낸 세계에 한발씩 들어 가서, 자신의 삶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았을 사유를 할 수 있게 돼. 그건 이 책을 몇마디 문장이나, 혹은 몇페이지의 감상문으로 요약해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 지금 있는 곳에 발을 디디고 있는 채로는, '아 그래, 하고 싶은 말이 결국 그거야?'라는 반응으로 끝나게 되기 십상이니까.(물론 그런 거리두기도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이 발걸음을 떼어내어 책의 세계 안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에 비로소 겪게 될 경험과는 완전히 다르지.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던 기간 동안 마치 반쯤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을 때 즈음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다른 철학자들이 그를 기리는 글을 보면서, 그가 많은 사랑을 받은 철학자라는 것을 느꼈어. 나 역시 만나본 적 한번 없는 사람이지만, 그의 책을 읽으면서 왜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지.
파핏의 책을 읽다 보면, 한 사람의 생각이 가질 수 있는 힘과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돼. 그리고 비단 파핏 자신이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 뿐만이 아니라, 그의 생각을 하는 자세에서도 깊은 인상을 받지. 그리고 그의 힘을 빌어서, 나 역시 더 나은 생각을 할 수 있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책의 내용을 잘 요약할 자신이 없어서 책소개 글보다는 독서 수필 비슷한 글이 되고 말았는데, 그냥 이런 좋은 책이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아 줬으면 했어. 아는 사람들은 아는 책이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번역도 안 되어 있어서. 더 널리 알려질 가치가 있는 책인데 말이지.
이 책이 다루는 주제 중 하나인 비동일성 문제는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 윤리학은 철학 중에서도 실천과 가장 가깝고, 이 비동일성 문제는 현대 윤리학의 아주 중요한 테마 중 하나니까. 한국에서도 이 책이 번역되고, 논의되어야 하는 문제지. 파핏과는 별개로 가끔 나오는 반출생주의 역시 윤리학의 비동일성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는 걸로 보이고 말이야. 그 문제에 대한 인식 역시 대체로 피상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파핏을 기리며,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을 기대해 본다.
이한 변호사가 예전부터 추천한 철학자네
읽어 봐.
이한 변호가 언제 그랬음?
아니 할 말이 없으면 짧게 쓰거나 하다못해 비동일성 문제가 뭔지라도 자세히 얘기하면 좋았잖아...
비동일성 문제란 우리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미래의 어떤 특정한 사람의 존재와 그 존재가 겪게 될 고통과 떼어 놓을 수 없이 묶여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야.
예를 들자면, 책에서 파핏이 설명했듯이 어떤 나이가 어린 여성이 지금 당장 임신을 한다면 건강에 문제가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의 삶을 사는 A라는 사람이 존재하게 되지만, 더 성숙하고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을 때 임신을 한다면 더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더 나은 환경의 삶을 사는 B라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하게 되자. 문제는 이 경우, A와 B라는 사람은 동일한 하나의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어떤 사람이 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얼마나 많이 존재해야 할까? 하는 것들에 대한 문제를 파핏은 생각해 보자고 하는 것이고, 이 문제가 윤리학의 근본적인 공리에 관련된 문제라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