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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 선집은 밀의 저서 여섯 권(공리주의, 종교론, 자유론, 대의정부론, 사회주의론, 여성의 종속)을 담고 있다. 단순히 원저 내용만 있는 건 아니고, 옮긴이의 밀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서문과 각 원저 하나 끝에 붙는 옮긴이 해제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던 중 '탈진실'이 시대의 표상이 되어버렸다. 과학기술의 부추김 속에 확증편향이 독버섯처럼 번져나갔다. 진영논리가 범람하면서 한국 사회가 갈가리 찢기고 있다. 변고가 아닐 수 없다. 이 모두가 '철학적 자해'의 후과였다. 진실을 찾아 엄정하게 살았던 밀이 다시 그리워졌다. 그의 철학적 절충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편견을 넘어 참된 자유를 고민했던 밀을 다시 읽었다. 그의 위로를 받고 싶었다. 이제 나는 이전보다 더 당당하게 밀과 사귀고 있다. 혼탁한 시대에 밀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보고 싶다. '존 스튜어트 밀 선집'이 그런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 옮긴이 서문
선집 전체를 한 번에 다 읽고 그에 대한 글을 한 번에 쓰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아 원저가 분리된 대로 총 6번에 걸쳐 선집을 소개하고자 한다. '서평'인데 왜 '소개'가 되었느냐 하면, 선집을 '평가'하려면 원저자인 철학자의 사상을 평가하거나, 옮긴이의 번역 실력이나 주석 같은 것을 평가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어느 쪽을 하든 이상한 내용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책이 굉장히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냥 소개해줘도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밀의 공리주의 철학에 대한 나의 생각을 열심히 써보긴 했는데, 이걸 추가하면 서평과는 또 거리가 멀어져버려서 그냥 다 빼버렸다. 기회가 있으면 이건 나중에 따로 올려보도록 하겠다...)
감상이라고 보기에는 약간 애매해서 말머리는 일반으로 두고 제목 앞에다가 책소개라고 썼다. 뭔가 잘못되어 있으면 완장들이 알아서 수정해줄 거라 믿는다. ㅎㅎ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는 제목 그대로 공리주의를 소개하는 책이다.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을 봤을 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에게 윤리학 교육을 하려고 한다기보다는, 공리주의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로잡아주려고 하는 느낌이 강하다. 분명히 공리주의는 다윈의 진화론만큼이나 여기저기서 영 좋지 않은 형태로 왜곡되고 있고, 아마 이러한 모습은 지금이나 예나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에, 밀이 이런 책을 쓴 것이 아닐까 싶다. 밀은 이 책에서 먼저 '효용' 개념을 '명확히' 제시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공리주의를 설명하고, 효용 원리를 설명(증명)하고, 더 나아가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공리주의 자체보다는 효용을 중점적으로 다루는데, 공리주의에 대한 오해의 근본적인 원인이 효용 원리에 대한 오해이고, 밀은 이를 해소하고자 하기에 그러하다.
밀의 글이든 옮긴이의 글이든 글 자체가 굉장히 훌륭해서 오히려 나의 문장을 거쳐 설명하고자 하면 본래의 가치를 훼손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냥 책 자체에서 문장들을 부분부분 발췌해오는 방식으로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듯, 독붕이들도 다른 누가 쓴 서평보다는 발췌된 책 내용이나 어느 독붕이가 찍어 올리는 책 페이지 하나에 더 강렬하게 반응하며 책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가. 흥미를 돋구는 부분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 독붕이들을 자극하는 데는 가장 좋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렇게 해봤다. 보고 흥미가 생긴다면 고민하지 말고 바로 지갑을 열도록 하자.
<공리주의>
1장 - 머리말
"어떤 과학의 제1원리로 궁극적으로 인정되는 진리들은 그야말로 그 분야에서 익숙하게 다루는 기본 개념에 대한 형이상학적 분석의 최종 결과물이다. 이런 진리와 과학의 관계는 토대와 건물보다는 뿌리와 나무의 관계에 더 가깝다. (중략) 그러나 과학에서는 특정 진리가 일반 이론보다 먼저 발견되지만, 도덕이나 입법 활동 같은 실천적인 분야에서는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모든 행동은 어떤 특별한 목적을 추구한다. (중략) 옳고 그름을 시험하는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간하기 위한 수단이어야지, 거꾸로 이미 가려낸 것의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는가?"
"공인된 제1원리가 없다 보니 윤리학은 인간의 실제 감정을 정화하는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래도 인간의 행복을 좌우한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에 여전히 크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효용 원리 또는 최근 들어 벤담이 말하는 '최대 행복 원리'는 도덕 이론을 정립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한다. (중략) 행동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고찰이 상당수 세부 도덕 이론의 근간을 이루고, 나아가 압도적으로 중요한 내용이 된다는 것을 그 어떤 학파도 부인하지 못한다."
"만일 누군가가 그 자체로 좋은 것을 전부 포함하는 포괄적 법칙이 있으며 그 나머지 좋은 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서 좋은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법칙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면 된다. 그러나 그 법칙은 흔히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증명 대상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수용 또는 거부가 맹목적 충동이나 자의적 선택에 의해 좌우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철학적 명제만큼나 이 문제도 증명 대상이 될 수 있다. 증명이라는 말 속에는 여러 뜻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고려가 어떤 성질을 띠며 어떤 방법으로 그 경우에 적용되는지 살핌으로써 어떤 논리적 근거에서 공리주의적 법칙이 수용 또는 거부되는지 검토할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인 과정을 통해 수용하거나 거부하기 위해서는 그 법칙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공리주의의 의미에 대해 잘 모르며, 이런 무지가 공리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게 가로막는 1차 장해물이 된다고 생각한다."
2장 - 공리주의란 무엇인가
"일부 무지한 사람은, 효용이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해주는 기준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 용어를 쾌락과 대비되는 것처럼 그저 좁고 통속적인 의미로 잘못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대해서는 그냥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가면 족할 것이다. 한편 공리주의에 대한 철학적 반대자들을 그렇게 터무니없이 무식한 사람들과 잠시라도 혼동한다면, 이것은 큰 실례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앞의 경우와 정반대로, 그리고 더 극단적으로, 철학적 반대자들이 모든 것을 효용에 갖다 붙이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리주의에 대해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찍는 낙인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에피쿠로스에서 벤담에 이르기까지 효용에 관한 이론을 주창했던 모든 사상가가 효용을 쾌락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쾌락 그 자체라고 보았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유용한 것을 기분 좋은 것이나 예쁜 것과 대비시키기보다, 오히려 언제나 바로 그런 것을 지칭했음을 모를 수 없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물론이고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는 숱한 저술가를 포함해서 무게와 권위를 지닌 책의 저자까지도 이런 하찮은 실수를 습관적으로 저지른다. 이들은 '공리주의'에 대해 그 이름만 알 뿐 도대체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공리주의를 흠집 내는 데 몰두한다. 이를테면 공리주의가 아름다움, 화려한 장식, 재미 등 쾌락과 관련된 몇몇 측면을 거부하거나 무시한다고 수시로 공격한다. 그런데 그들은 공리주의를 이렇듯 엉뚱하게 잘못 이해하기는 하지만, 이 말을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쓰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천박한 것이나 순간적인 저급 쾌락과 비교되는 우월한 것을 뜻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왜곡된 용법이 널리 알려지면서 젊은 세대는 공리주의를 곧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말하듯) 인생에 쾌락보다 더 높은 목적이 없다면, 다시 말해 쾌락 이상으로 더 좋은 욕망과 더 고상하게 추구할 만한 것이 없다면 이것은 극단적으로 야비하고 천박한 이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옛날 에피쿠로스학파가 돼지에 비유되면서 심한 야유를 받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중략) 이런 공격을 받으면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은 늘 똑같은 방식으로 반격을 가했다. 즉 자신들을 그렇게 비웃지만, 인간은 돼지가 즐길 수 있는 쾌락 이상의 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것처럼 상정하는 그들이야말로 인간을 비참한 존재로 만드는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중략) 에피쿠로스학파가 말하는 삶의 방식과 짐승의 그것을 비교하는 것이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이것은 짐승에게 해당되는 쾌락이 인간의 행복 개념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에피쿠로스학파가 공리주의 원리에서 자신들의 행동 규범을 도출해내는 과정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중략)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진 에피쿠로스학파의 인간존재 이론치고, 단순 감각 작용에서 생기는 쾌락보다 지성, 느낌과 상상력, 도덕 감정의 쾌락에 대해 더 큰 값어치를 부여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공리주의 이론가도 정신적 쾌락이 내재적 본질에서는 몰라도 항구성, 안전성, 비용 등의 주변적 장점에서 육체적 쾌락보다 한결 더 우월하다고 주장해왔다. 이 모든 점에 대해 공리주의자들은 그런대로 충분한 근거를 제시했다. 그러나 다른 방법, 말하자면 더 강력한 논거를 일관된 논리로 제시할 수도 있었다. 쾌락도 쾌락 나름이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쾌락이 다른 것보다 더 바람직하고 가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공리주의 원리와 어긋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것을 평가할 때는 양뿐 아니라 질도 고려하면서, 쾌락에 대해 평가할 때는 오직 양만 따져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전혀 설득력이 없다."
-> 조금 아쉬운 부분이고, 내용 전체를 봤을 때 혼자 조금 이질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옮긴이 해제에서도 이 부분을 지적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최대 행복 원리'를 따를 경우 우리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든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이익을 고려하든, 가능한 한 고통이 없고 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가능한 한 최대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존재 상태에 이르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 된다. 나머지 모든 것은 이 궁극적 목적에 비추어서, 그리고 그것에 도움이 될 때 바람직한 것이 된다. 자기 경험,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서 자의식과 자기 관찰의 습관을 통해 최선의 비교 수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이런 궁극적 목적을 선호한다.
(중략)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 또 다른 종류의 반대자들이 들고일어난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행복도 인간 삶과 행동의 합리적 목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런 것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경멸하듯이 묻는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권리를 가져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칼라일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여 그 뜻을 분명히 한 바 있다. 바로 조금 전에 당신은 '존재에 도움이 되는' 그 어떤 권리를 가졌던가? 나아가 그 반대자들은 인간이 행복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중략) 만일 이런 반론의 첫 부분이 질서 정연한 논리 위에 서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본질을 건드린다. 인간이 어떤 행복도 누릴 수 없다면, 도덕이나 어떤 합리적 행동도 행복을 목적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 왜냐하면 효용이란 행복을 추구하는 것뿐 아니라 불행을 방지하거나 완화하는 것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한편 스토아학파나 초월론자 못지않게 공리주의자도 자기 헌신의 도덕성을 주장할 자격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공리주의 도덕률에서는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마저 희생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그런 희생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행복의 총량을 증대하지 않거나 증대할 경향이 없는 희생은 한마디로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공리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인간 행동의 옳고 그름에 관한 공리주의적 판단 기준의 관건이 되는 행복이 행위자 자신뿐 아니라 관련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공리주의 도덕에 가해지는 또 다른 비난도 같은 각도에서 무장해제할 수 있다. 때로는 공리주의가 사람들을 차갑고 동정심 없게 만든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공리주의가 다른 개인들에 대한 도덕 감정을 싸늘하게 하며, 그런 행위를 촉발하는 도덕적 요소는 내버려둔 채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만 삭막하고 딱딱하게 고려한다는 것이다. (중략) 따라서 우리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의 옳고 그름만이 아니라 그 사람들 자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이 공리주의 이론과 모순되지 않는다."
"만일 대다수 공리주의자가 자신의 기준에 따라 측정된 도덕성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느라 사람을 사랑스럽거나 존경스럽게 만들어주는 다른 소중한 요소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고 문제를 제기한다면, 이런 비판은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도덕 감정은 함양하면서 동정심이나 미적 감각의 발전은 등한시하는 공리주의자들이 이런 실수를 범하곤 한다."
3장 - 왜 효용 원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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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 효용 원리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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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 정의는 효용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철학이 시작된 이래, 효용이나 행복이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된다는 이론 수용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정의에 대한 생각이다. 정의라는 말은 본능이라는 단어가 그렇듯이 즉각적으로, 아무 의심의 여지 없이 강력한 느낌과 대단히 자명해 보이는 개념을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대다수 사상가의 눈에는 이 말이 사물의 어떤 내재적 성질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정의로운 것은 자연 속에서 온갖 종류의 편의적인 것과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무언가 절대적인 것으로, 그리고 관념적으로도 편의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도 생각하지만, 길게 보면 정의와 편의는 결코 그렇게 분리될 수 없다."
"나는 감정적인 것 자체가 흔히 또는 적절하게 이름 붙였다고 할 수 있는 편의라고 불리는 개념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 속에 들어 있는 무엇인가 도덕적인 요소는 모두 편의라는 개념에서 나온다."
"우리는 앞에서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 벌을 내리고자 하는 마음과 그런 살마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있다는 지식이나 믿음이 정의감을 구성하는 두 가지 필수 요소라는 것을 알았다.
생각건대 어떤 개인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벌을 내리고자 하는 마음은 자기 보호 충동과 동정심이라고 하는 두 종류의 감정적인 것(둘 다 최대한 자연적인 것으로서 본능적이거나 본능을 닮았다)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정의가 문제 되는 곳에서는 늘 편의가 관련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다만 정의라는 말에는 특별한 감정이 수반되어 있으므로, 정의는 편의와 구별된다. 만일 이런 특징적 감정이 충분히 설명된다면, 이것의 특별한 기원이 무엇인지 따져볼 필요가 없다면, 이것이 사회적 선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도덕적 차원에서 분노를 느끼는 자연스러운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런 느낌이 정의라는 말이 해당되는 모든 경우에 존재할 뿐 아니라 나아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면, 이 정의라는 개념은 더 이상 공리주의 윤리학의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는다. (중략) 이를테면 그저 인간적 쾌락이나 안락을 증진해주는 데 불과한 것에 따라다니는 뜨뜻미지근한 감정과 비교해본다면, 그 당위성의 단호함이라든가 엄격한 제재라는 측면이 한눈에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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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으로 봤을 때 밀은 근본적인 원리를 규명하려기보다는 그 원리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서 우리가 도덕과 정의를 어떻게 논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 같음. 그 원리는 애초에 책상에서 백날 고민한다고 나오는 것도 아닌 과학의 영역에 가깝고 심지어 그 과학도 인과관계를 밝혀내는 데 있어서는 불분명해지는 포인트가 있으니까...
ㄹㅇ 쾌락의 질에 대한 얘기는 굳이 고집해야 했나 싶음. 혼자 다른 얘기들이랑 따로 놀고 있는 게 자기 취향 넣고 싶어서 일관성 포기하고 억지로 집어넣은 느낌임 - dc App
그 질문에는 이 글이 답이 될듯?
https://www.civiledu.org/m/437
ㄹㅇ정치철학으로서의 공리주의는 인기가 너무 없는듯
밀 선집 감상은 볼 때마다 사고싶게 만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