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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비방하다 보면 우리는 늘 그들에게서 어느 정도 멀어지게 마련이다.

우상에는 손을 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칠해 놓은 금박이 손에 묻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꿈을 꾼다. 그 내용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지만, 대체로 그것은 어떤 고통으로부터의 도피를 포함하고 있다. 따분한 일상, 직장 상사, 과제, 마감 기한... 그런 것들을 떠나 어딘가 멀리로 떠나길 소망한다. 우린 별것도 아닌 것에 쫓기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보잘것없는 현재의 자신이 아닌, 빛나고 잘난 무언가로 거듭나길 소망한다.


물론 이런 낭만은 길지 않다. 투덜거리며 현실로 돌아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주어진 과업을 마주하고, 박살 나고, 그래도 다시 일어선다.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살면서 셀 수도 없을 만치 떠올리는 낭만적 도피와 고통스러운 현실을 비교하면 절망스럽기 그지없는 것은 당연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가 주지했듯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정말이지 더럽게 크다. 하지만 그 간극 또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지 않은가.


여기서 현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에 대한 답 중 하나로 <지하생활자의 수기>가 있다. 일체 타협을 거부하고 지하로 숨어드는 것, 이상(낭만)이라는 몽상이 악몽이 될 때까지 그 안에 잠기는 것이다. 이건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제아무리 반사회적이라 봐야 결국 인간이고, 반사회적이라는 것조차 반항을 통해 사회를 향유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 지하생활자도 가끔은 인간을 그리워하는데, 하물며 평범한 우리들은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타인은 지옥'일지라도 결국은 타인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낭만을 현실에서 추구하는 것은 어떨까? 이게 바로 마담 보바리, 엠마 보바리의 선택 아닌 선택인데, 그 속살은 추하기 그지없다. 차라리 지하생활자의 추레한 외관과 찌질한 내면이 멋져 보일 정도로, 현실에 강림한 낭만이란 것은 추악하게 일그러져 본래 형태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보기조차 힘들다.


로맨스 소설 속 여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그녀는 한편으로는 성공했다. 가령, 그녀와 로돌프의 짧은 밀월은 잘라놓고 보면 그녀가 읽었던 소설의 단면 그 자체이다. 바람둥이 졸부와 망상에 찌든 시골 의사 와이프의 불륜이라는 추잡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묘사하는 글귀는 아름답기 그지없어 읽는 이는 잠시나마 몽롱하게 그들이 꽃피우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그려내곤 한다. 그녀의 '낭만'은 극이 진행될수록, 현실에 체화할수록 웃음거리로 전락하지만, 눈부시게 빛나는 순간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광채 나는 순간들에서 볼 수 있듯, 관점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 소설이 낭만주의를 변호하고자 했다면 그렇게 포장될 여지는 충분했다. 다분히 블랙 코미디적인 그녀의 최후(자칭 합리주의자의 독가루로 음독자살하는 낭만주의자라니!)가 비극적, 낭만적이지 못할 이유도 전혀 없다. 심지어 악역으로 지목될 남자들도 도처에 깔려 있지 않은가. 하지만 플로베르는 그 어떤 불순물도 첨가하지 않는다. 이 소설이 고전으로 남은 것도 바로 이 부분이라고 본다. 내용은 한없이 통속적인데, 그 흐름은 결코 통속적이지 않다. 독자는 틀에 박힌 치정 싸움 대신, 온전히 엠마의 선택이 빚어내는 결과와 그녀의 환상이 부서지는 과정을 바라본다.


엠마의 낭만 아닌 낭만이 파멸로 치달은 후, 십수 페이지의 에필로그에서 남은 인간들이 보여주는 모습 또한 이의 일환이다. 뒤늦게 불륜을 깨달은 남편의 아둔함과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잘 살아가는 속물들의 모습은 실로 사실주의의 매력을, 그 달콤 쌉싸름한 정수를 한가득 우려냈다. 한 인간의 부질없는 몽상은 막을 내렸고, 그 뒤에 남은 이들은 다시금 몰락하거나 득세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위대한 개츠비>의 쌍둥이 자매처럼 보이는 <마담 보바리>는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끝없이 부질없는 낭만을 꿈꾸는 우리의 자화상이라 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