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2일자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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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화, 장강일기, 학민사, 1998.


장강일기는 1987년 출간된 녹두꽃을 제목을 바꾸어 재출간한 책이다. 제목의 장강(長江)은 양쯔강을 의미한다. 저자는 1919년 말 상하이로 건너가 1946년 봄 마찬가지로 상하이에서 귀국선을 탈 때까지의 약 26년의 세월동안 유유히 흐르는 장강의 물살을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그 기나긴 세월동안 변치 않고 흘러가는 장강을 저자는 무슨 심정으로 지켜보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저자인 정정화는 1900년에 태어났다. 그의 첫 회고록이 1987년에 나왔으니 한국 나이로 여든여덟이라는 초고령의 나이다. 그런 저자가 책을 내면서 서문에 쓴 문장을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욕심이 없되 허망하지 않고, 뜻이 있되 결코 나대지 않는 자연의 모습처럼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자연처럼 가는 것이 진정한 영웅과 참된 열사의 길이요 뜻이었거늘, 하물며 나같은 범부, 졸부가 뭐 남길 게 있다고 붓을 들고 나섰는지 나 자신이 생각해도 무척이나 후회스럽고 다시 물렸으면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7쪽)” 아! 이 어찌 범부의 글이고 졸부의 문장인가. 여든여덟의 나이에 이토록 총명하고 올곧은 문장은 어떻게 자신의 겸손을 포장하기 위해 나올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그러한 문장은 저자의 인생이 증명해주듯 자기 한 평생을 올곧음과 겸허함으로 체화해야만 비로소 자연스레, 친한 지인과 일상얘기를 하듯 흘러나오면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표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거진 30년을 타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음에도 해방된 조국에서 갖은 고초를 당한 뒤 칩거한 저자에게 민족과 국가의 선생으로 모셔야 마땅할 지경인데 저자는 서문에서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은 겸손을 얘기해 읽는 이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자아낸다. “도대체 내가 이름 석자를 내걸고 항일 독립운동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여든 여덟의 나이되도록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무릇 혁명가들이란 혁명의 의식이 확고히 굳어짐으로써 그 대열에 서는 것이 상례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니 부끄러울 뿐이다. 내가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서 항일투사들과 생사 존몰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는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나를 알고 지내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치켜세우는 것은 오로지 나의 그런 재주없음을 사 주는 까닭에서일 것이다.(8쪽)“ 


 물론 저자의 말대로 저자가 처음 임시정부에 가담한 계기는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하였다. 1900년 8월 3일 부친 정주영과 모친 김주현 사이에 2남 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난 저자는 1910년 열한 살의 나이로 안동 김씨 가문의 김의한과 혼인했다. 그녀의 시아버지는 농상공부대신을 지닌 김가진이었다. 1919년 10월 김가진 부자가 상해로 망명했는데 저자는 이를 시어머니가 나중에 보여준 신문을 통해서나 알았다. 당시 저자는 첫딸을 낳자마자 잃었는데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첫 아이를 잃은 갓 스물 아낙네의 말 못할 심정, 남편 없는 시댁에서의 고달픈 시집살이, 며느리를 친딸처럼 감싸주시고 귀여워해 주시던 시아버님의 구국이라는 대의를 위한 망명, 이 모든 조건이나 상황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판단을 흐리게 하는 안개였다.(45쪽)”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저자는 “미세하나마 거부할 수 없는 충동(46쪽)”을 느꼈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있는 상해로 가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독립운동을 위하였다기보다는 남편도 시부도 없는 시댁에 홀로 있기보다야 노구를 이끌고 외지에 있는 시부와 남편을 시중드는 편이 더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거금 800원을 받아 1920년 1월 중순 상해에 도착한 저자를 시아버지는 저자가 “상해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쨌을까 싶을 정도(51쪽)”로 기쁘게 맞아주었다. 상해에 도착한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저자는 하루하루 힘들게 연명하는 상해 임시정부의 모습에 자신이 조선에 들어가 친정에서 돈을 좀 구해 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어 대뜸 임시정부 법무총장 신규식을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신규식은 위험하다며 저자를 만류했으나 끝내 고집을 꺾지 못하였고 결국 저자는 1920년 3월 국내로 파견되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로 결정되었다. 국내 잠입경로는 연통제를 따랐다. 상해에서 안동까지 배를 타고 가 그곳에서 일경 형사로 위장 중인 최석순을 만나 그의 누이동생으로 연기를 해 무사히 압록강 철교를 건너 신의주로 도착한 저자는 신의주의 비밀 연락소인 세창양복점의 주인인 이세창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서울까지 갈 수 있었다. 서울에 도착한 저자는 신규식의 조카인 신필호의 집에 20여 일 간 머물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4월 초에 상해로 출발했다. 이후 엄한 아버지로 인해 겨우 언문만 뗐던 저자는 임정 인사들과 상해 유학생들로부터 한문, 영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등을 공부하며 지내다가 1921년 늦은 봄에 두 번째로 조선에 밀파되었다. 곧바로 예산의 친정을 찾은 저자는 아버지로부터 자금을 건네받은 뒤 김규식의 이질인 서재현과 함께 상해로 귀환하였다. 이렇게 두 차례의 자금 조달은 성공적으로 마쳤으나 이후 안동과 신의주의 거점들이 발각되어 최석순은 상해로 피신하여 임정에 투신하였고 이세창은 투옥되어 그 뒤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뒤 상해 임시정부가 내분으로 세력이 쇠퇴되었고 저자의 일가 역시 상해를 떠나 만주로 갈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때마침 김좌진이 남편에게 서신을 보내 아버지를 모시고 만주로 오라고 하였으나 여비가 없었다. 결국 여비도 모을 겸 저자는 1922년 6월에 세 번째 국내 진입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 당시는 국내 연락을 맡았던 입정의 교통국과 연통제가 모두 와해되어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에 저자는 이욱이라는 사람과 동행해 열차가 아닌 인력거로 국경을 넘었으나 일경의 검문에 체포되고 만다. 서울 종로경찰서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나자마자 저자에게 시아버지 김가진의 부음이 전보로 전달되었다. 국내에서 장례식을 치른 뒤 조의금을 자금으로 쓸 요량으로 모아 시동생 김용한과 함께 상해로 돌아갔다. 


 그해 10월 네 번째로 귀국길에 오른 저자는 자금 모집활동을 하며 얼마간 친정과 서울의 외가에 머물다가 1923년 2월 아버지의 죽음을 맞았다. 동해 7월에 상해로 귀환한 뒤 이듬해 12월에 다시 국내에 잠입, 반년 간 별다른 공적인 임무 없이 친정에 지내다가 1925년 6월 다시 상해로 행했다. 1926년 남편이 영국인이 경영하는 전차회사에 취직한 후 상해 생활은 비교적 안정되었다. 이때 저자는 첫 아들을 낳는다. 여담이지만 이 아들의 이름은 김자동으로 필자도 이번 독서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번역한 그 김자동이라고 한다. 이때 당시 저자는 아이를 돌보며 백범을 비롯한 임정 인사들의 식사를 차려주고 임정 인사들의 가족들을 보살피는 등 살림에 여념하였다. 


 서른 살이 되던 1939년 여름, 아들을 데리고 저자는 여섯 번째이자 독립 이전까지 마지막의 귀국을 하였다. 육 개월간 체류한 뒤 1931년 초에 상해로 귀환한 저자는 “독립이 되기 전에는 다시 귀국하지 않을 것(100쪽)”이라 다짐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만보산 사건으로 인한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 일본의 만주사변으로 인한 독립운동 근거지 파괴 등으로 매우 큰 곤경에 처해있었다. 이를 타개하고자 나선 것이 백범의 한인애국단이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의거는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을 즉시 호전시켰다. 동해 4월 29일 있었던 윤봉길의 의거는 저자에 따르면 “냉대하던 중국인 이웃들은 금방 우리 모두가 의거에 관련되거나 한 것같이 인사를 하고 고마워했다.(110쪽)”라고 할 정도였다. “참으로 통쾌한 일(110쪽)”이었으나 이로 인해 임정은 바로 다음 날 절강성 가흥현으로 피신하였다. 이는 임시정부가 중경까지 8년여간 5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가흥에 있을 무렴 백범의 어머니인 곽난언이 백범의 초청을 받아 임정에 머무르면서 살림을 도맡아했는데 이는 저자를 포함한 살림꾼들의 귀감이 되었다. 한번은 그녀의 생신을 맞아 저자가 비단 솜옷을 하나 선물드리니 그녀가 “지금 우리가 이나마 밥술이라도 넘기고 앉았는 건 온전히 윤 의사의 피갑이야. 피 팔아서 옷 해입게 생겼나? 당장 물려 와.(120쪽)”이라 꾸짖었으니 그 아들에 그 어머니라 하겠다. 이렇듯 임시정부 인사들의 살림을 맡던 저자는 중국 정부와 교섭을 맡고 있던 박찬익의 주선으로 한때 신강성 성장을 지낸 임긍이란 사람을 소개받았다. 임긍은 선생의 남편인 김의한을 전원공서에 취직시켰는데, 그것은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는 지방 행정 관리였다. 그리하여 저자는 1934년 봄 강서성 풍성현에 도착했는데 물가가 무척이나 싸 당시 남편의 월급은 20원으로도 “그야말로 호강을 할 수 있는 거금(123쪽)”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풍성현에서 1년, 호남성과 호북성의 인접 지역인 강서성 무령현에서 3년 합해 4년을 강서성에서 “비교적 편안한 은거생활(123쪽)”하다가 1938년 2월 다시 호남성 장사시의 임시정부 일행에 합류하였다. 물론 그동안 임정과 연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예컨대 1935년 9월에 경우 약 반년간 아들을 데리고 남경에서 백범의 어머니를 모시기도 하였다. 


 1938년 7월 17일 임시정부는 일본군을 피해 장사에서 광동성 광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의 마수가 광주에까지 뻗쳤고 그해 10월 다시 피난 가는 기차에 올라야만 하였다. 이후 주강을 따라 광서성의 유주까지 배를 타고 가는 여정이 시작됐다. 저자는 배가 잠시 정박하기만 하면 육지로 올라가 재빨리 장을 봐와 반찬을 해 임정을 먹여 살렸다. 그렇게 한 달하고도 열흘을 꼬박 배 위에서 지내고 나서야 유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그곳에서 약 반년 간 머물렀다. 


 1939년 4월 임시정부는 버스 여섯 대를 나누어 타고 유주를 떠나 사천성으로 향했다. 중간에 여비가 부족해 버스가 멈추었는데 저자가 강서성에서 4년을 지내는 동안 모은 200원을 선뜻 내놓아 버스는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4월 말 사천성 남쪽 끝에 있는 기강현에 도착했고 중경에 다시 새 살림을 차리기 시작했다. 1940년 한국독립당이 재창당하면서 저자 역시 창립 당원이 되었고 동해 6월에는 한국여성동맹의 간사로도 참여하였다. 동해 9월에 중경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익진영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한국광복군에 합류하면서 임시정부로 통합을 이루어 갔다. 이러한 통합으로 각 당파의 여성들이 통일을 이루어 결성한 것이 대한애국부인회였다. 대한애국부인회는 국내외 부녀는 총단결하여 민족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여 분투하자는 강령을 내걸었다. 당원의 대부분이 한국독립당원이기도 한 한국혁명여성동맹은 임시정부의 활동을 후원하였다. 이와 같이 저자는 독립운동 단체에서 직책을 가지고 활동하면서 “중경시내에 있는 임시정부나 광복군에서 외국손님을 접대한다든가. 자체 내에 큰일이 있거나 할 때는 토교에 있는 부인들이 중경으로 가서 일을 돕곤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총책임을 지고 일을 치러야 했다(193쪽)”고 한다. 그때부터 저자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집안을 돌보던 역할에서 이제 임시정부의 실제 안살림을 뒷바라지하는 책임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이는 기쁘기만 한 소식이 아니었다. “해방의 기쁨을 만끽한 것도 그 순간뿐이었고, 계속 주변 정세를 눈여겨 보면서 초조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일본의 압제로부터 독립이 되었다고는 하나 조국의 장래는 독립의 그날부터 또한 겸의 짙은 먹구름 속에 파묻혀 있었던 것(236쪽)”으로 저자가 당시 상황을 설명했을 만큼 독립이 되었다고 해서 임정의 활동이 끝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새로운 각오로 임해야 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10월 이후 임정 요인들이 중경을 떠나 귀국한 뒤에도 토교에 남아 뒤처리를 마친 뒤 다음 해 1월 하순이 돼서야 토교를 떠나 상해로 향했다. 5월 9일 저자는 미군이 난민 수송선으로 쓰는 LST에 탑승해 꿈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귀국한다. 1931년 초에 상해에 귀환해 독립 전까지는 조국 땅을 밟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뒤 장장 15년 만의 귀국이었다. 


 귀국한 뒤 저자는 “주부로서의 역할이나 충실하게 하리라(273쪽)” 다짐하였고 남편 역시 “정치에 투신할 생각은 없었던 것(273쪽)”이었다. 하지만 아직 실질적 독립이 안 된 조국이었기에 할 일이 남아있다 판단하고 한독당을 중심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귀국한 뒤 변변한 수입이 없었기에 미국에서 들여온 사로용 옥수수와 백범이 달에 한 번 건네주는 돈 만원으로 궁핍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후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에 대해 저자는 “독립된 조국에서 국민의 대표자를 뽑는 역사적인 첫 선거는 그나마 남한에서만의 반토막짜리 선거였고, 그것마저도 우리끼리의 자주적인 선거가 아니라 ‘유엔 한국위원회의 감시 하에’라는 단서가 붙어(281쪽)”라며 비판조를 얘기하고 있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의 생각을 지니고 있던 터라 이는 오랜 동지 관계였던 이승만과의 절연으로 이어졌다. 한편 이때 저자는 임정 때부터 알고 지낸 부통령 이시영으로부터 감찰위원회 위원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한 그로서는 도저히 참여할 수가 없어 거절을 표했다.


 한편 이때 백범의 가족들을 비롯해 임정 인사들의 유해를 중국에서 모셔오는 작업이 벌어져 저자의 시아버지인 김가진도 그 작업에 포함될 수 있었으나 몇 해 안에 통일정부가 세워질 테니 그때 가서 모셔도 늦지 않는다는 남편의 고집에 결국 김가진의 유해는 타국에 남게 되었다. “당시의 정세가 쉽게 통일정부를 세울 만큼 밝지 못했다(289쪽)”는 저자의 판단을 남편이 귀 기울였다면 하면서 저자는 안타까움과 죄스러움을 이야기한다. 김가진의 묘는 문화대혁명때 비석이 파괴되어 비도 없이 아직도 상하이에 묻혀있다고 하니 지금이라도 국내로 이장하는 게 도리라 생각된다.


 1949년 6월 26일에는 백범 김구가 암살되었다. 상해 시절부터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96쪽)”하며 뺀질나게 저자의 집을 드나들었던 그였다. 아들의 졸업식에 와서 자신의 친아들이나 다름없다고 얘기한 그였다. 일제의 서슬퍼런 감시에도 살아남아 해방을 맞은 그였다. 그런 그가 해방 조국에서 동족의 총에 숨지다니. 저자가 이범석의 부인 오광심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백범이 피살된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안두희가 계급장을 버젓이 단 정복을 입고 간수들과 같이 앉아 장기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아직도 백범의 암살과 관련해 명명백백히 밝혀진 바가 없으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1950년 6월 25일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서울에 남아있던 저자와 남편은 결국 남편이 납북되는 비참한 생이별의 결과로 나타난다. 둘의 사이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열 한 살의 나이에 동갑내기인 성엄에게 시집왔을 때 우리는 이성지합이니 부부유별이니 하는 지아비 지어미의 사이이기 이전에 서로 입술도 비쭉거리고 혓바닥 놀림도 해대는 소꼽동무였다. (중략) 동고동락의 40년 세월은 둘 사이를 묶는 어설프고 설익은 애정보다도 더 질긴 끈이었고, 믿음이었으며, 이해였고, 포용이었다.(302쪽)” 이데올로기가 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40년 부부도 생이별을 해야만 했을까. 저자는 이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옛 동료이자 지금은 북에서 일하는 김흥곤을 찾아가 남편의 소식을 물었고 남편이 무사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남편에 관한 마지막 언사였다.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저자는 김흥곤과의 만남이 화근이 되어 부역죄라는 죄명으로 조사를 받고 기소되어 차가운 옥에 갇혔다. 스무 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조국 땅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30년 가까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였다. 그런 그에게 해방된 조국은 빈한한 환경으로도 모자라 중국에서 독립운동할 때도 당해보지 않은 옥중 신세를 겪게 만들었다. 일경으로의 경력이 있음이 분명한 간수들이 독립운동가인 저자를 욕하고 구타하고 채찍질하였다. 결국 저자는 5년 구형에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국회에서 몇 해 후 이와 같은 ‘비상사태 하의 특별조치령’의 위헌성과 위법성을 결정한 법안을 통과해 전과기록이 삭제되었다. 그러나 아무런 보상조차 받지 못하였다. 그나마 그 이전까지 저자는 이른바 ‘요시찰인’으로 시민증에 ‘요’자가 찍힌 채 지내야 하였고 요시찰인 명부에 이름이 올라갔단 이유로 두 번 ‘예비검속’을 당했어야 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것이 조국이 독립운동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단 말인가. 


 이후에도 저자는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허망한 명예나 이름을 바라서(316쪽)”도, “알량한 재력이나 권력에 미련이 있어서(316쪽)”도 아니었다. 그것은 저자가 “살아있는 한 내가 지내온 날들과 연결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고 끝나는가를 똑똑히 보고 싶어서(316쪽)”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국의 나날은 해가 지난다 하여 나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땅에서 맞이하는 내 나라의 아침은 춥고 쓸쓸한 것(316쪽)”이었다. 한편 1954년 아들이 미군부대 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일보에 견습기자로 들어가 언론계에서 새 생활을 시작하여 이승만 정권 당시 경무대 출입기자로 일할 때가 있어 이승만의 면전에서 직접 회견할 기회가 수 차례 있었으나 결코 집안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5·16 쿠데타 직후 언론인 다수가 박정희 정권의 초빙으로 정계에 투신해 출신가도를 달릴 때도 아들이 그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다고 하니 백범 모자와 마찬가지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강직함은 결국 노구의 독립운동가에게 “셋방살이나마 다행으로 여기고 살아야 했다.(317쪽)”이란 글을 쓰게끔 만들어야 했다. 아니, 사실 그건 강직함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강직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비열한 사회의 문제라 봐야 맞는 말이겠다.


 책에는 필자가 정리한 내용 말고도 임시정부의 내부적인 내용 등 아주 흥미로운 내용들이 널러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매우 귀중한 역사적 자료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필자는 이보다 더욱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이 책에서 찾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의 저자, 정정화 선생에 대한 해방된 조국에서의 대우에서 비롯한다. 왜 해방 조국은 선생에 대해 이런 대우를 대접해야 했나. 국내 잠입 때 일경에 붙잡혔을 때도 손찌검은 당하지 않았던 선생에게 어째서 해방 조국의 경찰이 손찌검을 하였는가. 선생은 책 말미에 “아프고 고장난 것을 낫게 하고 고치자고 찾아갔던 병원인데, 황색 카드 탓인지 무료 시술 탓인지 백내장 수술을 한답시고 그만 눈 한쪽을 아예 못쓰게 만들어 놨으니 다시는 그 황색 카드 들고 보훈 대상자입네 하면서 병원 문고리를 잡지는 않겠다고 수십 번을 벼르긴 했지만, 뭐가 잘못돼서 이렇게 됐는지 속시원하게 말이라도 들어 봤으면 싶다.(324쪽)”라고 말한다. 이게 정말로 선생이 백내장 수술이 잘못된 한을 얘기하고자 쓴 것일까? 평생을 고초에 휩쓸린 당신에게 국가가 그나마 부여해준 황색 보훈 카드마저도 되려 눈을 멀게 만들었다. 이게 단지 백내장 수술에만 한정된 얘기일까? 어쩌면 선생뿐 아니라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우리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무엇을 해드렸는가. 선생이 아흔 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내년이면 20년이 되었는데 우리는 얼마나 선생의 이야기를 알고 있으며 또 귀담아 들었는가. 평생을 겸손으로 일관한 선생의 삶에 이 나라의 후손으로서 끝없는 죄스러움만 느낄 뿐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하는 건 바로 이 죄스러움을 우리 세대에서 끝내야 한다는 것일 아닐까. 선생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