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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독회 1기가 끝났음.

원래는 독회한 거 정리글을 올리려고 했는데

점점 독회 정리가 아니라 책을 요약하는 것처럼 되었음

문제는 내가 요약을 정말 못한다는 거임.

그래서 이런 글 모음으로 대신하기로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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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과 같은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동안 내가 별로 눈길을 주지 않았던 것들,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돌아보게 되었음.

적어도 나한테는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음.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번 독회에서 꼭 얻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들을 추려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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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인식론)

(육신통에 대한 글을 보고 이야기를 나눔)

Q. 아 그리고 신족통에 대한 설명이 지식의 형태가 아니고 능력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건 더 높은 차원의 지식을 깨우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면 되는거야?

A. 신족통은 신통변화를 일컫는데, 쉽게 말하면 초능력임.

이것에 대해서는 D11 께왓다 경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함.

그 경에서, 께왓다라는 사람이 세존께 신통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더 깊은 믿음을 가질 거라고 함.

하지만 부처님은 '께왓다여, 나는 비구들에게 인간을 넘어선 법에 기인한 신통의 기적을 나투라고 설하지 않는다.'고 하심.

(나투다는 초능력을 발휘하다라는 뜻임).

그리고 덧붙여서, 정말로 기적이라 부를 만한 것은 '가르침의 기적'이라고 하심.

범부로 하여금 괴로움에서 해탈하여 최상의 해탈•열반을 실현하게 만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말로 기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라는 거지.

예수가 사탄에게 기적을 일으키라는 유혹을 받았을 때,

사람은 빵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산다,

라고 대답한 것을 깊게 생각해보면 더 좋을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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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업과 윤회)

Q. 나는 현생에서 나의 업으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결과에서 책임을 피해갈 수 없는 건가?

A. 이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문제네.

개인적으로 나는 이것을 책임이라는 맥락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봄.

불교에서 업의 논리는 인간을 책임지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작동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제대로 파악하도록 이끌기 위해서 작동함.

업은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고, 인간의 마음을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에 놓게끔 유도함.

그래서 과거의 업은 현재의 결과로 향하고, 미래의 과보 역시 현재의 업지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됨.

왜냐하면 과거나 미래로 마음이 가는 경향, or 책임을 지는 것은

(특히 제대로 단련되지 않은 마음이라면)

후회와 걱정으로 이어지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임.

그러나, 이를 책임 회피로 해석해버리는 것은 곤란함.

세상을 제대로 파악하게 되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고(염오),

이는 곧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욕)으로 이어지기 때문임.

여러 번 강조하지만 불교는 피하지도 맞서지도 않는 중도의 가르침임.

그래서 이욕은 탐욕을 직접 불어 끄는 게 아니라 탐욕이 빛바래도록 하는 식으로 이루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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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도덕과 윤리)

Q. 다만 전부터 궁금했던 것은, 절에서도 기와를 구매하며 수능 같은 큰 일의 축복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고,

부처나 보살에게 복을 구하는 기도를 하기도 하던데, 이러한 종교활동은 본래 교리와는 다소 어긋난다 볼 수 있는 것인가...?

A. 굉장히 답하기 곤란한 날카로운 질문이네..

적어도 내 생각에는, 불자가 담마를 보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스스로 알게 되어 버려야 할 것을 버릴 거라고 봄.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돕는 것이 이제 승가에서 해야 할 것이겠지.

그러나 그러한 기복 신앙 활동을 무조건적으로 제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담마를 보도록 이끔으로써 스스로 그런 것들을 내려놓도록 해야 한다고 봄.

적어도 나는, 정말로 대승의 길을 걷겠다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타인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봄.

왜냐하면 그것은 nicca이고, atta니까.

나는 타인의 기복 신앙을 빼앗거나 금지할 수 없음을 알고서,

중생이 담마를 제대로 보도록 이끄는 게 참다운 대승의 길이라고 봐.

(nicca와 atta에 대해서는 다음의 링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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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 (열반)

Q. 인간사 희노애락은 물론 영화나 소설 한편을 봐도 쾌, 불쾌, 슬픔, 동정, 연민에 휩쓸리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가까운 사람의 장례식에 슬픈 눈물을 흘리면서 그것이 인간적이라고 표현하잖아?

삶의 의미나 존재의 이유를 찾고싶은 마음 또한 인간성의 하나인 것 같음.

더 나아가서 열반이라는 상태, 즉 즐겁거나 즐겁지 않거나, 행복하거나 행복하지 않거나

모든 것을 경험하면서도 동요하지 않는다면..

이를테면 가까운 이의 장례식에서도 동요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성을 버린? 벗어난? 더이상 인간이라고는 말하기 힘든 존재가 되는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

A.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제자인 아난다가 슬퍼하자 부처님이 말했음.

슬퍼하지 마라, 아난다여. 형성된 모든 것은 모두 무너지고 부서지고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그토록 말하지 않았던가.

아난다여, 무너지고 부서지고 사라지기 마련인 것에, 무너지지 말라 한다 해서 무너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즉, nicca는 anicca이고 atta는 anatta이다]

(중략)

형성된 것들은 모두 무너지기 마련이니 방일하지 말고 해야 할 바를 다하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다.

띨락카나를 제대로 보아 이미 소따빤나의 과위를 증득했던 아난다 존자조차도, 부처님의 열반을 슬퍼하였음.

그러나 많이 공부지어서 아나가미와 아라한의 과위를 얻은 제자들은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형성된 모든 것들은 nicca가 아닌 anicca이다. 그러니 여기서 슬퍼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음.

이것을 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성을 거르스는 것이다'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임.

그러나 나는 담마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함.

왜냐하면 사람은 ‘진실로 자기의 본성을 그리고 자기의 존재 양식을 만들어내는 신성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임.

또한 담마는 우리에게 인간을 뛰어넘을 것을 요구하지 않음.

열반이란, 불교의 벗어남이란 초월하는 것도, 이탈하는 것도 아님.

불교의 벗어남은 오히려 인간답지 않은 것들(불선법)에게서 떠나고 (계를 지키고),

인간을 인간답지 않게 만드는 오염원(번뇌)들을 다스리고 (사띠, 선정의 계발),

존재를 제대로 보는 (통찰지의 계발) 일들로써 성취됨.

C. ‘인간적이다’ 라는 것이 대다수의 사람의 행동양식이나 휴머니즘을 뜻할수도 있지만,

깨달음에 가장 가까운 상태 혹은 무명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가장 크게 품은 존재로 본다면 그건 참 즐겁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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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독회 1기 1회 (역사적 배경, 인식론)

불교 독회 1기 2회 (연기)

불교 독회 1기 3회 (존재의 세 가지 특성)

불교 독회 1기 4회 (업과 윤회)

불교 독회 1기 5회 (도덕과 윤리)

불교 독회 1기 6회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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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나교

트랜스 상태

무상 고 무아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

띨락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