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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끝에 아이리스 머독 <바다여 바다여> 스포도 있으니 읽을 사람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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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현자는 무관심하다고들 한다. 천만에. 무관심은 영혼의 마비이자 때이른 죽음이다'




삶이란 무엇일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아니, 누군가는 알지도 모르지만 그건 아마도 그에게 한정된 정답이며, 그가 처한 상황 아래에서의 정답일 뿐이다. 타인에게는 그의 정답이 옳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 그렇기에 우리는 끝없이 방황하며 자신에게 맞는 답을 찾아나가는 것이리라.


유능한 의사이며, 당대 유명 평론가에게 '너 글 잘 쓰니까 허접한 거 그만 쓰고 제대로 써봐라'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글까지 잘 썼으며, 육체적으로도 전성 가도를 달릴 나이인 29세의 체호프에게도 이는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책의 역자이기도 한 석영중 교수의 해설에 따르면 체호프는 <지루한 이야기>의 주인공과 자신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강변한 것 같지만, 석영중 교수가 지적했듯 아무리 봐도 이 중편 소설에는 체호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성찰이 너무나도 진하게 녹아있다.



사실 주인공 니꼴라이의 인생은 꽤 성공적이다. 아름다운 아내를 얻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낳았고. 이들이 큰 사고 없이 장성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친구로부터 부탁받은 아이 역시 나름 잘 길러내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았다. 그의 인격과 사회적 지위 역시 훌륭하기 그지없다. 본인이 말하듯 인생을 돌아보면 '한편의 예술품'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사실이 공포와 고통을 완화시켜주지는 못한다. '머리통과 손은 벌벌 떨리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밤마다 자신의 죽음을 또렷하게 마주하는 와중에 좋았던 옛날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체호프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인생의 정도(正道)를 걸어온 인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어찌 보면 자기 인생이 잘 풀렸을 때 최후의 순간을 상상한 것이라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여타 영화의 엔딩이나 한 인물의 최후처럼, 사랑하는 이들의 애도 속에서 그림처럼 지나가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는다. 약 100쪽 내외로 이어지는 글은 그야말로 고통의 연속이다. 그 와중에도 속물들을 비판하는 신랄함은 활기차지만, 그 속물들이 자신의 친지들인 탓에 그 뒷맛이 씁쓸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잘 풀린 인생조차 그 끝은 고통스럽고 덧없다.


인생 내내 자신의 정답을 밀어붙여, 누가 봐도 올바르게 살았다고 할만한 대학자조차 그 끝에서는 자신의 정답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그러나 이젠 너무 늦었다는 것을 체감하며 그 정답을 끝까지 밀어붙여 '형식적으로나마 오점을 남기지 않기로' 해버리는 것이 고작이다. 그리고 무관심으로 상징되는 '때이른 죽음'을 맞을 채비를 한다. 암울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소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돌연 그의 양녀가 나타나 그에게 묻는다. '저 어떻게 살아요?'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최후의 최후의 순간에서야 자신의 인생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결여되었다고 후회 아닌 후회를 하는 노인네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묻는 젊은이라니. 주인공은 정직하게 자신도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양녀는 눈물을 닦고 노인을 뒤로한다.


그래서 정답은 무엇인가? <지루한 이야기>는 그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아마 후반부에 주인공이 말하는 '공통 이념'이 그것이리라. 하지만 그 공통 이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체호프는 함구한다. 사실, 체호프는 능력뿐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실로 완성된 인간이었다. 과학을 바탕으로 한 합리주의를 숭상하며 외면받는 약자들에게 헌신했던 그는 실로 현대의 영웅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그조차 인생의 정답은 제시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도 알지 못했으리라. 양녀(히로인?)와 주인공의 영원한 이별을 끝으로 막을 내리는 소설은 허탈하기 그지없지만, 한편으로는 완성되어 있다. 회한에 찬 채 죽어가는 노인이나, 다시금 살아가기 위해 짐을 꾸려 떠나는 젊은이의 모습은 일평생 정답을 찾아 방황하는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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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의 단편은 참 어렵다. 내용은 이보다 술술 읽힐 수가 없는데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들여다보기가 참 어렵다. 석영중 교수의 '그의 작품 중 난해하고 복잡한 소설은 한편도 없지만 쉽게 읽히거나 이해되는 소설 또한 단 한편도 없다'라는 해설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중단편집에 포함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과 <검은 옷의 수도사> 또한 그러한데, 이들은 <지루한 이야기>보다도 이 정도가 심해서, 사실 잘 읽어놓고도 무엇을 끌어내야 할지 모르겠다. 땅 파기로 치면 어디서 삽을 대야 할지조차 감이 안 잡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손 닿는 데부터 파기엔 너무 넓다. 감동은 그 자체로도 의의가 있지만 난 그게 왜 감동적인지 알고 싶은데, 체호프는 그게 참 어렵다. 어찌 보면 그래서 더 매력적이기도 하고 말이다.


언뜻 아이리스 머독의 <바다여, 바다여>가 생각나기도 한다. 이 소설도 참 좋아하는 소설인데, 그 다사다난한 작중 행적이 종결된 후에 어떤 깨달음을 얻은 주인공을 보며 감동하다가 에필로그에서 점차 예전 모습으로 회귀하는 꼴을 보고 있으면 뒤통수가 얼얼하면서도 그건 그것대로 감동적인 것이다. 문제는 이게 왜 감동적인지 모르겠다는 점? 아이리스 머독이든 체호프든, 이렇게 삶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작가들은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