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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평온의 기술, 인물과사상사, 2018.


저자인 강준만을 좋아한다. 극심한 노빠인 내 아버지는 내가 중학생이 되고 난 뒤 저자의 김대중 죽이기, 노1무현 죽이기를 비롯해 미국사 산책시리즈, 한국사 산책시리즈를 읽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나는 그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책들을 읽었다. 다행히도 나는 친부의 사상을 곧이곧대로 답습하지 않았고 오히려 꽤나 많은 부분에서 반발적인 작용이 행해졌다.


그럼에도 저자 자체에 대한 나의 평가는 극도로 호의적이었는데 그것은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읽은 매우 편협한 분야의 책들 중에서 저자만큼의 박식함과 간단명료한 문장을 보여주는 책이 없었음에 기인한다. 지금은 저자보다 글쓰기에 있어서 나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 해서 저자가 싫어졌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세상에는 저자보다 더 깊은 사유와 울림을 주는 글을 쓰는 사람들도 있구나 깨닫게 된 것뿐이다.


어찌됐든 이와 같이 저자에게 호의적인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이 책이 출간되었고 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지체없이 책을 부대로 주문해 읽었다. 책은 개인적 지침에 있어서 마치 성경과도 같았다. 개인주의적 리버럴 성향인 저자의 글은 비록 내 정치성향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을 지라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내게 제목 그대로의 평온함을 안겨주는 데 꽤나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거기다 개인의 평온함과 사회의 평온함을 한데 묶는 능숙한 글솜씨는 내게 부러움을 샀다.


그런데 오늘 접한 소식은 나로 하여금 그것이 이 사회의 정상이기에 접할 수 있었던 생각임을 깨닫게 하였다. 나는 이제 이 책에 쓰인 많은 평온함에 대한 조언들이 적어도 공적으로 평온함을 뒷받침되어 있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공적 영역 자체가 나 자신을 거부한다면 제아무리 개인의 노력으로 평온을 갈구해도 소용이 없을 수밖에 없다. 온 세상이 나를 상처주려고 덤비는데 평온이 있겠는가? 저자가 책에 쓴 대로 대자연을 만끽하고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한 삶에 몰두한다고 평온이 다가오는가? 어불성설이다.


비극은 사회의 변화 없이는 반복된다. 최근에 제주도 녹색당의 트랜스젠더 활동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모자라 오늘은 국가에 의해 거부된 트랜스젠더 군인이 세상을 제 손으로 마쳤다. 왜 우리는 남들의 죽음에 의해서만 바뀌어야 하나. 왜 우리는 그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평온할 수 있는가. 그들의 평온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국가? 여당? 정부? 아니면 이 빌어먹을 사회를 꾸려나가는 우리 모두?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평온의 핵심이 나를 위한 삶이라며 남들의 눈치나 남들의 인정 등 남들을 의식하지 말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세상의 모두가 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모두가 나를 별종으로, ‘비정상으로 취급한다면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평온의 기술은 핍박받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지녀야 하지 않을까.


변희수 하사가 당신의 평온을 택한 방식을 존중한다. 그리고 그러한 존중을 표할 수밖에 없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죄송할 따름이다.


우리의 평온은 적어도 우리가 살아있는 한 결코 개인적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