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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의 비문학 두번째.


  역사에 별 취미가 없는 독붕이들도 교과서에 나오는 시대구분이 꽤나 편의적인 기준이라는 걸 어디서 들어보기는 했을거야. 애초에 시간이라는 게 구획되지 않고 흘러가는 건데 인류가 살아온 기나긴 세월을 나눈다는 건 기본적으로 그 기준을 불문하고 자의적일 수밖에 없지. 서구 역사가들의 고전적인 삼분법(고대-중세-근대)은 그 절정이고.


어제까지 구석기였다 오늘부터 중석기에 돌입했다는 이유로 선사시대 인류가 뗀석기를 몽땅 내다버리지 않고 화승총의 발명과 동시에 전장에서 냉병기가 사라지지 않고 상당기간 공존했던 것처럼 항상 시대와 시대가 중첩되는 시기가 있기 마련이지.


서구 중세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의 기본적인 시각도 이와 유사한 것 같아. 책을 덮으니 중세에 '암흑기'라는 꼬리표를 달았던, 이제는 한물 간 통념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커지더라. '고대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면서도 근대를 준비하는 맹아가 한창 형성되고 있던 시기' 정도로 기억하면 무난하지 않을까 싶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흔히 도시 부르주아들이 봉건 영주와의 투쟁 및 협상을 통해 '쟁취'했다고 알려져 있는 도시 자치권이 '완전한 자치'의 획득이 아닌 '봉건적 착취의 한계선 설정(즉, 자의적인 수탈의 금지)'에 가깝다는 부분이었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더라. 생각해보면 당연한 건데 말이지. 여기서 시작해서 차츰차츰 밀고 당기는 알력다툼을 거치면서 부르주아의 권한이 점점 커져 갔겠지. 교과서에서는 불과 한 줄로 끝나는 서술이겠지만 여기에 얼마나 지난한 갈등과 타협이 있었을지 상상해보니 아득해지더라구.


500페이지가 채 못 되는 볼륨 안에서 중세사회의 두 중추라고 할 수 있는 국왕과 교황에서 시작해 기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구성원들의 삶을 조명하고 한 발 더 나가서 이들의 정신세계까지 알차게 다루고 있어서 완독하면 꽤 큰 독서 포만감을 느낄 수 있지.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른 책으로는 집문당에서 나온 서양 중세사가 있는데, 분량도 훨씬 많고 책 자체가 학술적인 측면이 강해서 문장도 좀 딱딱해. 만약 서양 중세에 관심있는 독붕이가 있다면 내가 소개한 이 책이나 주경철 선생님의 세 권짜리 유럽인 이야기 시리즈, 또는 즐거운상상에서 펴낸 중세의 사람들로 입문하는 게 적당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