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2020년의 문학 두 번째.
스페인어를 조금씩 공부하고 있는데 언어를 배우려면 먼저 그 나라 문화랑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씹덕들에게 일어가 패시브 스킬이고 미드 영드 좋아하는 애들이 생활영어 곧잘 하는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스페인어권 영상물은 손이 잘 안 가서 문학을 먼저 읽어볼까 해서 잡은 게 이 책이야. 한국과도 연관이 있어서 더 흥미가 가더라구.
한국전쟁 당시 참전했던 유엔군에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대가 없이 참전' 했다는 꽤나 ㅎㄷㄷ한 수식어가 붙곤 하지(물론 이분들의 희생을 폄하하는 건 절대 아니야. 이 나라들이 참전하게 된 전후사정과 관계 없이 우리가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 당장 나부터도 멋모르던 시절에는 얼마나 이념에 충실한 나라들이기에 굳이 이역만리까지 파병할까 하는 순진한 의문을 가진 적도 있었지.
이 작품은 이렇게 종종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그려지곤 하는 유엔군의 신화를 정면으로 깨부수고 있어.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콜롬비아인 교수가 콜롬비아군 참전용사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신화에 가려져 있던 전쟁의 민낯을 추적해 나가는 게 책의 기본 골자야.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당시 콜롬비아와 전장은 그야말로 모순 투성이에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어. 일단 콜롬비아군부터가 군인 출신 대통령이 억압적으로 통치하는 나라에서 타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가야 한다는 근본적인 모순에 빠져 있지. 또 콜롬비아 국내에 워낙 폭력이 만연해 있어서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입대하고 역설적으로 전장이 비교적 안전한 곳이 되는 기가 막힌 현실이나 군인이라면 떨쳐버리기 힘든 야스에 대한 갈망도 잘 묘사되어 있지. 창녀촌 가려고 중간 기착지인 하와이에서 군인들이 떼로 무단 하선하는 장면이 지금도 기억나네.
참전군인들이 전후 골칫덩어리로 전락하고 본국은 물론, 가족조차 잊어버린 존재가 되었다는 부분도 인상깊었어. 여기나 거기나 당장 필요한 때는 금송아지라도 줄 것처럼 이빨 털면서 끌고가지만 볼일 끝나면 손 터는 것 매한가지인 것 같더라.
이렇게 집권세력의 이익과 정치공학에 따라 인생이 뒤틀려버린 '상처받은 사람들'의 상흔과 비참한 실상을 여과 없이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 읽어봐도 괜찮은 작품인 것 같아.
스페인어권 문학에서 영원한 최고존엄은 당연히 돈키호테일 거야. 이걸 부정할 수는 없지. 그렇지만 중근세 스페인과는 시간적, 지리적으로 상이한 근현대 라틴아메리카 문학에도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와 삶을 조망하고 있는 양질의 작품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고 많이 읽혔으면 해. 특히 기나긴 식민지배와 군부독재, 전쟁을 겪은 나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우리 정서와 통하는 부분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
오 잼겠다 ㄱ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