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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의 문학 세번째


1909년 10월 26일, 초대 조선 통감이자 현직 추밀원 의장이던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 역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여. 대한 의군 참모중장을 자칭하는 사내의 권총에 맞은 거지. 그렇지만 어찌어찌해서 이토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이 사건을 계기로 섣부른 대륙 진출보다 한반도에 대한 동화정책, 즉 '조선의 내지화(內地化)'가 선결과제임을 통감하게 돼. 이토는 이후 16년을 더 살았고, 이는 일본 제국의 대외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부터 한반도에서 강도 높은 민족 말살 정책을 실시해. 조선인들의 이름은 일본식으로 바뀌었고, 공사 모든 영역에서 조선어와 조선 문자의 사용이 철저히 금지되었어. 또 한반도에 일본 열도와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지우기 위해 노력한 결과, 5세기 진구 왕후의 삼한 정벌 이래 조선은 계속해서 일본령이었다는 주장이 정설로 자리 잡게 되지. 1987년(쇼와 62년) 현재, 역사도, 문화도, 언어도 잃어버린 조선인들은 '내지와 반도는 한 나라'라는 총독부의 선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어. 그렇지만 이들은 그러면서도 어째서 내지인과 다를 바 없이 제국의 충실한 신민인 조선인이 평생 동안 갖은 차별에 시달려야 하는지 마음속 한편에 의문 한 조각을 품은 채 살아가고 있었지.


한편, 러일전쟁의 승리로 관동주(요동반도 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고 조선반도와 대만을 합병한 일본제국은 만주국 문제에 대해 미국 등 열강의 양해를 얻는 데 성공하여 실질적으로 만주에 대한 통치권을 획득하며 광대한 영토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어.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된 일본 제국은 핵무기와 200만이 넘는 병력을 보유하며 미국, 소련에 이어 지구상에서 세 번째로 강력한 나라로 군림하게 돼. 아편전쟁 이후 끝없이 쇠퇴를 거듭하던 중국은 급기야 화북지방을 장악한 중화인민공화국, 강남지방을 영유하는 중화민국,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만주국의 세 나라로 분단되어 일본 제국을 견제할 수 있을 만한 역량을 전혀 결집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야. 《비명을 찾아서》는 이렇게 실제 역사보다도 일본 제국의 실력과 위상이 극대화된 상황-즉, 제국에 대한 동화만이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인 시대-를 살아가는 한 조선인의 심리를 따라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어.


주인공 기노시다 히데요(木下英世)는 능력 있는 직장인이자 성실한 가장으로 인정받으며 언뜻 보기에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삶을 누리고 있어. 그렇지만 그에게는 아무리 애써도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이었지. 히데요가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크고 작은 불합리한 처우가 여기에서 기인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지만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40년 세월 동안 애써 이를 회피해 오던 히데요는 차츰 이 부분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게 돼. 이는 그가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과 맞물려 제국이 공인하는 '충량한 신민'의 마음가짐과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그를 몰고 가게 되지.


조선 역사와 언어에 대한 관심을 심화시켜 나가던 히데요는 각성한 식민지 지식인이 언젠가는 대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와 직면하게 돼 . 바로 조선 민족이 제대로 자립하기 위해서는 독립이 필수적이나 현실적으로 몰락할 기미는커녕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식민 모국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었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정부는 이미 오래전에 소규모 테러 집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어. 상하이 뒷골목의 어느 허름한 주택 앞에 걸려 있는 때에 전 태극기가 아직 이들이 소멸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간신히 증거하고 있을 뿐인, 현실적으로 어떤 영향력도 갖고 있지 못한 초라한 조직에 불과했지.


물론 히데요 이전에도 조선 출신 지식인들 중에는 조선의 현실이 조작되었음을 인식하고 독립의 필요성을 느낀 자들이 여럿 있었어. 그러나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이 벽에 부딪힌 후 전향하여 현실적으로 조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이고 철저한 내지화가 필요하다고 부르짖는 전향자가 되어버렸지. 그렇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으로 여겨지는 이 길 대신 다른 길을 찾고자 해.


"... 그는 담배 연기를 깊이 마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문제는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는 일은 어렵고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따라서 마음이 굳지 않으면 안 된다. 조급하면, 역사적 안목을 갖고 대하지 않으면, 절망하게 된다. 그것이 가장 큰 위험이다. 가야마 선생이 빠진 함정이 바로 그것이다. 가야마 선생은 "나는 역사를 믿는다"라고 말했다지만, 그는 결코 역사를 믿은 것이 아니다. 역사를 믿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믿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식견과 양심을 믿는 것이다. 그것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의 식견과 양식을. 따라서 역사를 믿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는다. 조선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조선 민족이 조선 민족이 아닐 때 비로소 잘 살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 몇천 년 동안 이어온 한 민족의 거대한 역사와 문화를 그렇게 간단하게 부정한 사람, 그를 어떻게 역사를 믿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가야마 선생은 다만 자신의 판단만을 믿고 자기 나름의 처방을 내놓은 것이다. 애란의 애국지사들처럼 피를 흘릴 용기가 없었던 비겁한 지식인의 나약한 처방을, 마취제에 불과한 처방을, 그럴듯한 말로 당의정으로 내놓은 것이다."

《碑銘을 찾아서 ~ 京城, 쇼와 62년 ~ 하》, 285페이지에서


작가는 단순히 기노시다의 상념 만을 따라가지 않고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여 군부가 영향력을 잃지 않고 건재한 채 민주화를 방해하는 가장 큰 반동 세력으로 자리잡은 제국의 현실을 묘사하는 데에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어. 억압적인 식민 통치 기구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식민지 뿐만 아니라 제국 본토에서도 신민들의 자유를 극히 제한하고 있는 상태야. 뿐만 아니라, 군부의 규모와 영향력이 지나치게 비대하기 때문에 정치권은 항상 군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어. 설상가상으로 육·해·공군의 알력다툼이 상상을 초월해서 수시로 쿠데타가 발생하여 정권이 교체되고 계엄령이 선포되는 등 흡사 60 ~ 80년대 한국 군사정권을 연상케 하는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지. 기노시다는 일본 본국의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다음과 같이 독백해.


"문득 속에서 무엇이 치밀어올랐다.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이 속으로 뛰쳐나가 옷을 벗어던지고 하늘을 우러르며 목청껏 소리치고 싶은 충동이 몸을 사로잡았다-'만주국이 있는 한, 조선이 식민지로 남아 있는 한, 일본에 진정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그것이 일본이 받는 천벌이다. 천벌이다.' 대신 그는 술잔을 들었다. 술로 눌러, 그 충동을 다시 뱃속으로 넣었다."

《碑銘을 찾아서 ~ 京城, 쇼와 62년 ~ 하》,  126페이지에서


이 작품은 출간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한국 대체역사소설의 대표주자로 내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야. 십 수 년 전에 장동건이 주연으로 나온 '2009 로스트 메모리즈'라는 영화를 기억하는 독붕이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 작품이 원작이야. 만듦새 자체는 잘 봐줘야 범작 수준인 영화였지만 영화 초반에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 달라진 과거가 지나가던 장면 만큼은 인상적이었지. 작가가 작품활동 외적인 일로 종종 구설수에 오르곤 했는데 본작은 충분히 좋은 작품이니 걱정 없이 읽어봐도 좋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