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질문 좀 하려고 제목으로 어그로 좀 끌어봤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도움이 되는 책 좀 추천받을라고 글 썼음.
내가 생각이 잘 정리가 안 되서 글이 난잡해질 것 같아서 중간중간 요약 씀.
죄와 벌에서 에필로그에 변증법 대신 삶이 도래하고 있다고 쓰잖아. 이 때 변증법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확증할 수 없어서 드는 생각인데
변증법을 로쟈가 자수하기까지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한 '이야기'라고 해석한다면 이 구문은 그 의미 때문에 모순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음.
무슨 말이냐면, 이런 관점에서
에필로그의 '변증법 대신 삶이 도래했다'라는 문구는 '텍스트'(이야기)의 끝, 그리고 실제적인 '삶'의 시작으로 구분하는 의미를 가진 말로 보여짐.
그렇다면 이 소설을 통해 전개되는 이야기는 삶을 지향하는데,
문제는 한 인간의 짧은 생애에 그 텍스트는 삶으로 완전히 드러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음.
결국 텍스트의 의미를 완전히 녹여낼 수 있는 삶은 없으니 텍스트가 지향하는 삶은 미완의 삶이 되고,
미완의 삶은 다시 텍스트를 요청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지 않나 싶음.
- 중간요약: 삶을 지향하는 텍스트는 미완의 삶 때문에 다시 재생할 것이 요청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텍스트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게 되는 것 같음.
1. 텍스트의 의미가 고정되어야 한다.
2. 다른 텍스트와는 구별되는 존재적 위치를 가져야 한다.
첫째로, 미완의 삶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텍스트는 그 목적이 완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의미가 바뀌어서는 안 되고 텍스트 자체의 의미를 동일하게 가진 채 재생되어야 한다는 점임. (텍스트 자체가 가진 의미가 달라진다면 애초에 목표했던 삶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이고 그렇다면 완성도 미완도 없으니까.)
둘째로, 의미가 보존된 채 재생되는 텍스트가 계속 삶을 지향할 수 있는 힘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텍스트들과는 구별되어야 함.
무슨 말이냐면 예를 들어, 어떤 사람 A가 다른 누구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에서 드러난 삶의 모양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닮고 싶어한다면 그는 다른 텍스트보다 그 텍스트를 더 존재적으로 우위에 두는 것임.
그리고 그 삶은 완성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는 반복적으로 요청되는데 이 때마다 A가 그 이야기를 해석하는 관점이 달라져서 의미가 달라진다면 처음의 이야기는 완성될 수 없음.
그리고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텍스트를 '경전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음.
종교적 텍스트는 신화이든, 경전이든 이야기의 형태로서 고정되어 있고, 반복적으로 재생되니까.
물론 신화적 텍스트와 경전은 누구에게는 경전적 텍스트가 되고 누구에게는 그저 일반적인 텍스트에 불과함. 일반적인 텍스트에 불과한 성경은 독자에게 통찰은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삶이 어떠해야 한다고 요구하지는 못하니까.
그럼 여기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삶을 지향하는 경전적 텍스트는 스스로가 그 목적 안에 반복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성경이나 쿠란을 비롯해 경전들은 반복해서 읽히고 원시 종교 내에서 신화들은 반복해서 의례를 통해 재생되었었잖아? 그게 어떻게 보면 텍스트 자체가 내포하는 하나의 기능일 수도 있지 않나 하는거임.
- 중간요약: 자기보존적이고 구별된 경전적 텍스트는 반복하고자 하는 목적을 내포하고 있음.
그럼 다시 소설로 돌아와서 변증법이 끝나고 삶이 시작될 수 있을까?
죄와 벌은 자기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여기서 모순이 생기는 거야. 죄와 벌은 텍스트를 끝내고 싶어함.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만 그 텍스트가 목적하고 있던 미완의 삶이 다시 텍스트를 요청함.
그렇기에 죄와 벌의 목적을 위해서는 경전적 반복(텍스트가 삶을 요청하고 삶이 다시 텍스트를 요청하는)의 굴레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 같음.
그러나 이렇게 되는 순간 죄와 벌은 경전적 텍스트가 되어 버림.
그렇다면 그 목적을 위해 죄와 벌은 예술이기를 그만 두고 종교가 되고 싶어하는가 라는 의문이 생김.
여기서 톨스토이가 잠깐 생각 났는데, 폴 존슨의 <지식인의 두 얼굴> 이라는 책에서 톨스토이는 스스로 종교를 창시하고 싶어했다고 평가함.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음.(사실 이건 확실치는 않지만 그런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임.)
결국 동일하게 삶을 지향했던 톨스토이는 경전의 영역으로 들어갔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술의 영역에 남아 있고 싶어함으로써 어떻게 보면 실패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 요약 : 톨스토이의 소설은 텍스트 자체로서는 목적에 조금 더 이르렀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술에 남아있는 것으로 인해 텍스트의 목적을 완수하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닐까?
결론 : 대충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런 개똥철학을 확장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만한 책이 있을까?
그냥 이성을 이용한 머리굴림(변증법) 대신에 살아 숨쉬는 삶이 도래했다 이런 얘기 아니었을까....?
ㅇㅇ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긴 했는데 변증법을 다른 식으로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머리 굴리다가 소설 전체의 이야기를 지칭하는 식으로 생각해 봤음.
라스콜니코프 뚝배기에 차지하고 있던 온갖 이론들과 법칙, 사상들을 변증법이라고 은유한거지. 그것들 다 쓸모없고 쏘냐의 사랑으로 인해 진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인듯 - dc App
ㅇㅇ 더 생각해봐도 그렇게 보는게 맞는 것 같긴 하다
ㅇㅇ 그래서 나는 죄와벌 스토리의 정점이 에필로그에 있다고 생각함. 드럽고 추잡한 이야기를 견뎌 마지막에서야 회한으로 그 세계를 깨뜨리고 각성하고 한단계 성숙하게 되는 시점에서 제일 감동이 컸음 - dc App
드럽고 추잡한 이야기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