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일자 독후감.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서해문집, 2005.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고전 중 가장 읽기 쉬운 책이라 봐도 무방하다. 특히나 요즘의 웹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체역사물을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이야기의 전개보다 설정놀음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설정덕후라면 틀림없이 고전이라는 생각도 잊은 채 유토피아라는 나라의 흥미로운 얘기들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구성 자체도 흥미롭다. 영리한 토마스 모어는 이 책을 유토피아에서 5년 간 살았다는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물론 모어가 창조해 낸 가상의 인물이다)의 이야기를 그저 기억나는 대로 옮겼다는 식으로 서술한다. 내가 만약 당대의 사람이고 이 책을 접했다면 모어의 이와 같은 거짓말에 끔뻑 속았을 것만 같다. 심지어 책의 마지막에는 모어에게 라파엘을 소개시켜 줬다고 책에 나오는 피터 힐리스에게 보내는 편지를 첨부함으로써 책의 내용이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어필한다. 편지에서 모어는 힐리스에게 《유토피아》를 저술했는데 만약 자신이 기억 상의 착오로 틀린 내용을 적었다면 이는 매우 부적절하니 꼭 라파엘에게 책의 내용이 라파엘이 말한 것과 차이가 없는 지 확인해달라고 부탁한다. 게다가 책에는 유토피아의 문자도 첨부되어 있다. 그러니 웬만해서는 이 모든 것들이 그저 모어의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기 어렵다.
모어는 왜 이와 같은 구성을 택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 책에서 당대의 여러 부조리를 비판했기 때문에 신변상의 위험을 줄이기 위한 술책이라 생각된다. 중세시대에 국왕과 영주와 성직자들을 모조리 비판하는 것은 사실상 그들에게 나 죽여주세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들을 향한 비판은 모어의 입을 통해서가 아닌 라파엘의 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책에서 모어는 어떠한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저 라파엘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특이한 구성덕분에 모어는 자신이 생각하는 당대 사회를 향한 비판을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것을 달성하면서도 자신의 신변은 안전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모어는 라파엘의 입을 빌려 구체적으로 어떠한 당대 상을 비판했는가. 그 주된 비판점은 바로 지배계급의 탐욕에 있다. 유토피아에는 금과 은을 비롯한 보물들이 넘쳐흐르지만 아무도 그것을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토피아에서 보물은 범죄를 일으킨 죄수나 노예들, 혹은 어릿광대의 장신구이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에서는 돈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시피하다. 학자 등을 제외한 극소수를 제외하고 전국민이 하루 여섯 시간의 일을 하고 공동으로 식사를 하고 공동으로 여가를 즐기는 이 국가는 너무나도 풍요롭기에 단 한 명의 빈민도 존재하지 않는다. 책에서 라파엘이
“돈을 없애버리면 사기, 절도, 강탈, 시비, 다툼, 언쟁, 소요, 살인, 배반, 독살, 그리고 교수형 집행인에 의해 아무리 죄 갑이 치러져도 여전히 막아지지 않는 모든 종류의 범죄가 당장에 사라지리라는 것은 누구난 달 알고 있습니다. 돈이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에 공포, 근심, 노고, 잠자지 못하는 밤들 역시 사라집니다. 빈곤이란 언제나 돈이 모자란 것처럼 보이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그런 빈곤도 돈이 완전히 폐지되면 금방 줄어들 거예요.”
라고 열변하는 장면은 초기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연설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독실한 성직자였던 모어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이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서 배금주의를 비판한 것일 테지만 말이다.
아마 아직까지 이 지구 상에는 모어의 유토피아처럼 빈민이 아예 없는 국가는 없을 것이다. 5백 년이 지났고 중세시대보다 훨씬 발달한 기술력이 인류를 도와주고 있음에도 하루 여섯 시간의 노동만이 전부인 세상은 꿈만 같다. 유토피아는 왜 이리도 요원한 것일까. 언젠가는 유토피아같은 시대가 찾아올까. 하긴 그때가 되면 우리는 또다른 유토피아를 만들어내고 갈망할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넷상의 명언에 따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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