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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도>는 박경리 문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일본 사소설 경향의 50년대 단편에서, 대하 장편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표류도를 변환점으로 하여, 단편에서 장편으로, 개인의 내면적 세계에서 타자와의 화해공간으로, 개인의 한에서 집단, 민족, 역사의 한으로 그 범위를 넓혀 갔다. (엄밀히 말해서 <애가>가 박경리의 첫 장편소설이긴 한데, 중요한 변환점은 <표류도>인 것으로 보인다.)

현회는 ‘마돈나’라는 다방을 운영하는 여주인이다. 한국전쟁 중에 애인 찬수를 잃었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데리고 산다. 그녀는 다방의 단골손님인 이상현을 사랑한다. 그는 유부남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사회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지만, 현회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올바르지만 불행한 결혼생활을 보낸 어머니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나의 배덕은 당신의 정절보다 위대하다.

박경리의 소설은 윤리 따위 개나 줘버렷, 하는 파격적인 인물이 나오지만, 그렇다 하여 모든 것이 용인되는 꿈의 세상에 머물도록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현회는 세간의 법을 뒤엎을 정도로 들끓는 열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디까지나 세속에 뿌리를 두고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이런 자유분방함과 비참함이 바로 박경리 문학에서 나타나는 전후의식이다. 로쟈는 박경리를 고소설에 가까운 문학 세계라고 비판했지만, 나는 박경리의 초기작에 드러난 전후감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박경리는 근대와 현대가 맞부딪히며 만들어낸 잡음을 그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잡아내고 있다. <토지>에서 김환은 별당아씨를 데리고 달아나야 했지만, 길상은 그렇지 않았다. 김환의 세계는 배덕이 파멸로 끝나는 고소설의 세계이지만, 길상의 세계는 배덕을 고찰하고 보류해두는 근대소설의 세계이다. (더 나아가, 로쟈가 말한 근대소설의 필수조건 중 하나인 ‘삼각관계’는 박경리 소설을 이루는 주된 소재 중 하나이기도 하다.)

<표류도>는 현회가 만난 3명의 남자들로 요약된다. 지성을 상징하는 찬수와 감정을 상징하는 상현, 그리고 의지를 상징하는 환규. 이것은 박경리의 삶을 남성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나 다름없다. 불행한 가정환경 속에서 독서에 빠져 살아야만 했던 어린 시절이 지성이요, 한국전쟁 중에 남편을 잃고 가족을 부양해야만 했던 청년 시절이 감정이요, 재혼의 실패와 아들의 죽음을 겪고 깊은 슬픔 속에서도 글을 써야만 했던 중년 시기가 의지이다.

50년대 데뷔한 전후작가들은 작가 생명이 길지 못했다. 전후 세대 특유의 도피와 위축 때문이란 말도 있고, 3.1세대와 4.19세대 사이에 낀 불운의 세대이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그 중에 거의 유일하다시피 박경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성과 감정의 영역을 넘어서 의지의 글쓰기로 내딛는 박경리 본인의 강직한 결심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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