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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제시된 AB라는 확고한 두 가지 선택지를 외면하고, 생각지도 못한 C를 채택하는 플롯은 이젠 그다지 새롭지 않다. 이 플롯으로 반전을 이끌어내는 방식은 이젠 먼저 앞서간 수많은 고전적인 플롯들처럼 참신함이라는 빛을 잃은 지 오래다. 그러나 만약 AB가 너무나도 확고해 이것들을 저버리고 새로운 출구를 찾아 나가는 것이 좀처럼 쉽게 연상되지 않는 경우에도 이 플롯을 진부하다고 느낄 수 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는 이 의문을 해결해줄 수 있는 확실한 열쇠가 되어줄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A는 현실성에, B는 이상, 이데아, 메타포(은유) 등을 전부 아우르는 비현실성에 대응된다. 그리고 이 작품의 화자이자 나름 잘나가는 초상화 전문 화가인 는 작품의 끄트머리에서 현실에 마냥 안주하지도 않고, 자신이 겪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부정하지도 않는 모호하지만 확실한 소신(C)을 가지게 되었다. 화자가 현실과 비현실 사이 어딘가에 모호한 위치에 서게 된 것임과 동시에, 세상을 현실과 비현실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으며, 현실의 반대어는 비현실이 아님을 내포하는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잠시 거처로 삼은 집의 주인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우연히 마주한 이후 온갖 비현실적인 현상을 겪은 는 최종적으로 아내의 외도로 인해 시작된 이혼 절차를 밟던 것을 멈추고 아내와 다시 재결합함과 동시에 별거 당시 내려놓았던 초상화 시장에 다시금 뛰어들었다. ‘의 이러한 행동으로부터 비롯되는 의 외견은 비현실로의 외도를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현실에 안주한 소설 속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그와 동시에 는 자신이 겪었던 현실 세계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경험을 부정하지도 않고, 꿈에서 관계했던 아내의 배가 실제로 부풀어 오른 일은 꿈에서의 자신이 아내를 임신시켰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는 등 비현실성을 전면적으로 무시하지 않기도 한다. 현실과 비현실에서 고루 희로애락을 겪은 화자는 자신을 둘러싼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현실과 비현실이라는 두 개의 명확한 상자에 분류하는 것을 단념하고 자유분방하게 흩뿌려진 현실 세계와 비현실 세계 사이에서 과거보다 홀가분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게 되었다.

 

 

 ‘의 모호한 위치와 태도 덕분에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지극히 모호하게만 느껴진다. 이 모호함은 하루키가 직접 공언하지 않는 한 절대로 명확해질 수가 없으며, 하루키는 자신의 의도를 독자들에게 공공연하게 밝히는 작가가 아니니 명쾌한 해답을 바라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유일하게 통용되는, 명확한 진리는 오직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 또한 무조건 존재하다는 것뿐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발견한 후 강렬한 영감과 묘한 흡입력을 느꼈지만, 그 덕분에 비현실적인 사건에 휘말렸다. 그리고 행방불명된 아키가와 마리에를 찾기 위해 기사단장을 죽였으며, 비현실 세계에서 겪은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 얼굴 없는 남자에게 현실의 펭귄 인형을 주었다. 이 이익과 손실로 이루어진 시소는 그 어떤 존재보다도 현실과 비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존재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리하게 재단하려는 행동이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을 뒷받침해주는 또 하나의 예다.

 

 

 기사단장 죽이기』의 등장인물 중 와 나름대로 두터운 친분을 쌓은 멘시키 와타루는 그 누구보다도 저 확고한 법칙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인물이다. 애초에 화자에게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 준 사람도 그였다. 초상화 그리는 일을 잠시 내려놓은 에게 자신의 초상화에 어마어마한 액수를 내걸어 와 면식을 쌓은 이도 멘시키였으며, 자신의 초상화가 성공적으로 완성된 이후 에게 의 미술 수업을 열렬히 듣는 내성적인 아이이자, 유전학적으로 멘시키의 딸일지도 모르는 아키가와 마리에의 초상화를 자신에게 그려줄 것을 부탁한 것도 멘시키였다. 멘시키의 에 대한 의도적인 접근은 모두 마리에의 초상화를 다소 떳떳하지 못한 경로로 얻기 위한 행동이었다. 게다가, 불필요한 거짓말을 삼가고 자신의 개인적인 부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는 않는 그의 신사적인 성품은 이러한 계산적인 면모를 돋보이게 한다.

 

 

 ‘는 아내와의 재결합 이후에는 멘시키, 마리에와 구축된 기존의 관계를 차츰 줄여나갔는데, 이것은 화자가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다는 확고부동한 법칙을 거부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멘시키와 마리에의 관계는 의 딸 사이의 관계와 동일하고, 친자 여부를 굳이 확인하지 않겠다는 발상 역시 동일하다. 그러나 멘시키는 만약 마리에가 자신의 친딸이 맞더라도 현실적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친자 확인을 거부했다면, ‘의 경우에는 비록 꿈에서의 관계가 매개로 작용했지만 딸이 자신의 유전자를 타고났음을 믿어 의심치 않음과 동시에, 만약 딸이 자신의 친딸이 아니더라도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기에 친자 확인을 거부한 것에 가깝다. 애초에 화자가 조건과 엄정한 시소에 사고가 함몰되었다면 먼저 외도를 해 친부불명의 자식을 밴 아내에게 다시 재결합을 제의하지는 않았으리라. ‘는 이제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손익을 엄격하게 따지는 것은 현실에 찌든 사람들만 하는 짓이다.

 

 

 명확한 증명과 정의를 내세우기 좋아하는 현대인들의 혀를 절로 내두르게 하는 『기사단장 죽이기』의 모호함은, 독자들이 이야기의 중심보다 지엽적이고 자극적인 대목에 집중하는 결과를 낳았다. 무라카미 하루키하면 빠질 수 없는 건조한 선정성과, 일본 문단에선 드물게도 난징 대학살의 부당함과 잔혹함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는 점이 다른 작품들보다 선명하게 느껴진다. 솔직히 하루키가 선정적인 내용을 작품에 삽입하는 것은 이제는 별반 놀라운 일도 아니고, 또 나는 문학 작품에 성관계가 등장하는 것에 큰 거부감 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지만, 화자가 13살짜리 여자애와 가슴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목은 조금 충격이었다. 금세 뭐 하루키니까...’ 싶어 신경 쓰지 않기로 했지만. 반면 난징 대학살의 참혹함을 일본 작가가 짧지만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은 정말 드물고 놀라운 일이다. 이 용기를 노벨상을 받기 위한 하루키의 정치적인 스탠스라고 애써 호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들이 있다는 점은 더더욱 놀라웠다. 메시지를 비판할 수 없으니 메신저를 공격한 확증편향의 훌륭한 예다. 백보 양보해서, 하루키가 오롯이 노벨상을 받기 위한 일념만으로 제국주의 일본 시절의 치부를 드러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박수받을 일이지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의도의 옳고 그름과 결과의 옳고 그름은 별개의 일이다. 의도가 불투명하면, 결과의 옳고 그름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