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현대인의 욕망이 ‘간접화’되어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고자하는 자는 예수의 삶을 모방하고, 성공한 CEO가 되고자 하는 자는 스티브 잡스의 삶을 모방하며, 연예인이 되고자하는 자는 자신의 롤모델(아이돌, 배우)을 모방한다. 우리는 어떤 ‘중개자’―스티브 잡스, 이건희, 배우와 아이돌들―의 삶을 ‘모방’함으로써 자신의 이상에 도달하고자 한다. 즉 욕망이 중개자에 의해 ‘매개(간접화)’되어 있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현대사회 속 인간의 욕망이란 바로 그 중개자들에 의해 심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의 욕망은 자연적으로 내 안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수많은 중개자들에 ‘의해’ 심어진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목이 타는 더운 여름날 내가 마시길 원하는 것은 ‘쥬스’ 혹은 ‘탄산음료’지 단순한 ‘마실 것’이 아니다. 물론 땀을 많이 흘려서 수분을 갈구하는 것은 내게서 나온 ‘욕구’다. 하지만 그것이 ‘코카콜라’라는 하나의 구체적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은 TV CF가 나에게 심어준 ‘욕망’ 때문이다. 나는 ‘8·15콜라’나 ‘펩시콜라’, ‘마운틴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코카콜라’를 원하고 있음에도, 단순히 ‘마실 것’을 원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욕망이 간접화된 탓이다.
지라르의 말을 통해 현대인의 욕망구조를 이해했다고, 이제 욕망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독자들은 다시 나락으로 내몰린다. 지라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지만 (…) 이 통찰력은 무력하다. 꿰뚫어본다고 해서 통찰력 있는 사람이 매혹에서 풀려나지는 못한다.”(121쪽) 흔히 지라르는 ‘욕망의 삼각형’(그림 참조) 개념의 창시자로 사람들에게 유명하다. 하지만 지라르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욕망의 구조가 아니라 욕망의 구조를 깨닫는다 하여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는 오늘날의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욕망의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사실 지라르니, 욕망의 삼각형이니 뭐니 하지 않아도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지라르가 말한 것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영화와 TV 속 드라마와 광고, 건물 외벽에 걸린 화보들, 수많은 유튜브 스타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메세지를 보내고 있음을 안다. 그 메시지들은 우리를 더욱더 노예화한다. 우리에게 더 일하고, 더 공부하고, 더 살을 빼라고 독촉한다. 우리는 우리를 노예화하는 메시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미 사회가 그런 형태로 주조되었기 때문이다. 미디어뿐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인간들이 우리를 감시하고 옥죄는 간수 역할을 하고 있다. 누구는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느니, 누구는 살을 엄청 빼서 예뻐졌다느니 같은 이야기는 어디서나 좋은 대화소재가 된다. 패배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기에 사람들은 자발적 노예의 길에 들어선다.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 노예가 되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신으로 비칠 것”(113쪽)이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상적 존재의 중개자가 된다. 부자가 되고 싶어했던 자는 사업에 성공한 친구를 모방하게 되고, 멋있어지고자 했던 자는 친구가 입은 옷들을 따라 사게 된다. 끝내에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인간들이 모방해야할 중개자로 보이게 된다. 나는 문득 서울의 강남 대로를 처음으로 걸었던 몇 년 전이 떠올랐다. 고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관이 펼쳐졌다. 대낮의 햇빛마저도 가려버리는 고층빌딩과 주구장창 광고를 내보내고 있는 대형 스크린들, 살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비싼 옷을 걸쳐 입은 사람들과 보도 옆으로 지나가는 외제차들, 그리고 버스 정류장 옆에서 엎드려 구걸하고 있는 거지. 그때의 나는 그 거지보다도 비참한 심정이었다. 진정으로 내게 서울 사람들은 신으로 비쳤었다. 후에 이 책을 읽고 그때 내가 느꼈던 심정을 오롯이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지라르의 말처럼 이 책에서 제공해주는 ‘통찰력’이 나를 욕망의 유혹에서 풀려나게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 것이고 틀린 것인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된 듯하다. 몇 년 전 그날 강남대로의 인간들(거지를 포함하여) 중 어느 누구도 타인보다 더 낫지는 않다는 걸 지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PS 1/ 책 여러 곳에서 나를 묘사하는 듯한 구절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예컨대 지라르는 중개자에 의해 간접화된 욕망을 진리처럼 추구하는 인물을 ‘속물’이라고 부르는데, 이 ‘속물’을 욕하는 자는 실은 속물에게서 자신의 ‘속물근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속물이 아닌 자는 속물의 속물근성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속물만이 진정으로 다른 속물을 안다.” “가장 날카로운 통찰력이 분개심을 일으”키는 것이다.(127쪽) 이 글귀를 보는 순간 별다른 이유 없이 타인을 욕하곤 했던 옛 내 모습이 떠올랐다. 타인들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추악한 의도를 멋대로 읽어내고 그들을 비난(예컨대 기부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허영심이 많다고 말한다든지)했던 예전의 나는, 사실 나 자신의 추악함을 그들을 거울삼아 발견해냈던 것은 아닐까.
PS 2/ 지라르의 논의를 조금 더 확장시켜보면 다양한 사회적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명하지 않던 혁오밴드가 지상파 방송에 나와 사람들 사이에서 차츰 유명해지자 혁오밴드의 골수팬들이 자신들은 원래부터 이 밴드를 좋아했다고, TV를 보고 좋아하게 된 너희들과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골수팬들이 새로운 팬들과 자신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을 앎으로써 ‘특별한 사람’이 되고자하는 자신의 ‘욕망의 구조’를 새로운 팬들에게서 발견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때 욕망의 삼각형에서 이상적 존재는 ‘특별한 사람’일 것이고, 중개자는 '혁오밴드를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골수팬들은 스스로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혁오밴드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실은 ‘혁오밴드를 좋아하는 사람’이 됨으로써 ‘특별한 사람’의 권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혁오밴드를 좋아하는 사람’을 혐오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혁오밴드를 좋아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특별한 사람’으로서의 권위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애초에 그들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며, 특별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은 사실 ‘혁오밴드’라는 중개자를 빌려와 얻어낸 임시방편의 것임을 알려준다.
그네아줌마를 통한 삼각형의 욕망을 이해 할 수 있게 되자너 ㅋㅋㅋ
잘 정리한 글
지랄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근데 이 책 제목이 내용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잘 읽었음.
인문학에서 '낭만주의'는 개인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견해를 의미합니다. 낭만주의에서 보기엔 욕망 역시 개인의 내부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겠죠. 하지만 지라르가 보기엔 그것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낭만적 거짓'인거죠. 한편 위대한 소설들은 그 욕망의 구조를 올바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적 진실'인거죠.
ㄴ 답변 정말 감사합니다!
리뷰 잘 쓰네 부럽다. 댓글도 좋고.
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