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일 2020/10/23
- 148일차 2021/03/19
- 오늘 읽은 책
1. 일리아스 - 호메로스 - 숲, 천병희 역
727p ~ 777p - 51p
-148일차, 드디어 이 벽돌을 끝냈다.
고전 도장 깨기를 위해서 시대순으로 맨처음에 위치한 책부터 읽기로 고른 책이 이 일리아스인데, 매우 두껍고 무거운 책이어서 도장깨기의 첫 스타트를 매우 뿌듯하게 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뒷세이아는 후일로 미루어야겠다. 후반부를 읽는 동안 왼쪽 페이지가 점점 무거워지면서 왼쪽 손목에 올라오는 무게감이 과하게 느껴지니, 책을 이렇게 두껍게 편집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의문도 살짝 든다. 덕분에 700페이지 가량의 마라톤 분량을 채울 수 있긴 했다.
내가 왜 이렇게 두꺼운 벽돌을 읽었냐하면, 고전을 독파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내가 왜 고전을 독파하고 싶었냐하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들이 바로 이 고전을 탐독했다는 사실을 어느샌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 그들 천재성의 비밀이 이 고전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 축적의 역사 속에서 그 비밀을 알아낸다면 그래서 내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진 않겠지만은 개인적인 영역에서만큼이라도 위인들의 성과를 약간이나마 따라 갈 수 있지 않겠냐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작품을 써낸 천재작가이자,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이며, 인간관계도 무척 좋았고, 추문도 없다 싶히하며, 오래오래 살기까지한 괴테는 나의 영원한 롤모델이자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이다. 니체가 독일 최고의 명저라고 평한 괴테와의 대화를 읽자. 근데 시발 뭐 좆같이 살다 갔으면 어쩔건데 어차피 자기들 꼴리는것만 취사선택할거면서. 그런 의미에서 자기자신을 등불로 삼으라 했던 부처님 말씀도 읽어보려고 책 하나 장바구니에 담아둠ㅎㅎ.
암튼 그래서 기원전 7,80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3천년전 사람이 노래했던 대 서사시를 읽는 것 만으로 그 가치가 내 이상향 중 일부가 되고, 현재 나의 일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삶이나 작품의 내용이나, 나의 삶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일리아스를 읽어야하는 걸까? 일리아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이고, 그게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그런 의문을 이제 한번 생각해보고 답을 내려보고자 한다.
일리아스는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위대한 전사들이 신들의 약속과 그들의 꾀 아래서 명예를 위해 전쟁을 치루고 싸우다 죽는 서사시이다. 모든 인간의 운명은 신들의 결정 아래 끝을 맺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리아스는 분명하게 인간들의 이야기이다. 호메로스는 주로 흙먼지가 날리는 대지의 이야기를 길게 노래하며, 올륌푸스의 이야기는 노랫말이 적다. 그러면 이 노래는 오로지 인간들의 이야기인가? 그것은 아니다. 일리아스의 신들은 한명 한명이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신들이라. 그들의 숨결과 그들의 말과 그들의 꾀와 그들의 몸짓이 인간의 운명을 굽이치게 하는 힘을 가졌으면서도, 그들 스스로가 인간과 다름없는 모습에 독자는 오히려 나는 그들에게 더 몰입할 수도 있었다. 반면, 파도가 굽이치는 해안가와 바람이 부는 들판, 높다란 성벽으로 둘러쌓인 나라와 집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보이는 모습은 마치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에 도달하려는 듯, 무척이나 강렬하다. 때문에 그들의 분노, 슬픔, 기쁨과 조소, 용맹함은 인간의 것을 넘어서려는 시도처럼도 보인다. 그래서 호메로스도 "신과 같은" 이라는 표현을 자주 내뱉었다. 신들은 인간적이고, 인간들은 되려 인간을 넘어서고자 한다. 이러한 역설적인 대비에도 불구하고, 아니 되려 이 역설 때문인지, 신들과 인간들의 영역과 역할은 확연히 구분된다. 그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바다처럼 넓은 차이가 있고, 오를 수 없는 산 만큼 높은 벽이 있으며, 보이지 않지만 뚜렷이 보이는 선이 있다. 인간은 신의 약속을 넘어설 수 없다. 그들의 운명은 신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간다. 그렇다면 왜 신들은 그토록 인간적이며, 인간들은 한계까지 자신을 밀어붙일까?
본편 뒤에 실린 호메로스 해설에서, 일리아스는 귀족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으로, 귀족이 자신들의 생활상을 이상화하기 위해 신이라는 존재를 사용했다는 해석을 읽을 수 있다. 당시 귀족의 모습이 바로 일리아스 속 신들의 모습이기에, 신들은 인간적일 수 밖에 없다. 평민들은 평민들의 삶을 살아가며 그토록 애쓰지만 귀족의 의지대로 굽이치는 운명의 흐름에 몸을 맡길 수 밖에 없다. 불평등에 대한 인식이 극단에 달해있는 이 시대, 인류 역사상 분노의 시대는 여러번 반복됬을테지만, 이런 방식의 해석은 불평등에 대한 분노를 가속시키는 역할을 할 뿐, 그 외에는 무슨 소용인가? 타깃을 정하고 분노를 표출해 사회를 터트리려는 사람들에겐 일리아스라는 "증거"가 매우 유용할 수 있겠다. 그들의 공소시효는 기원전 700년까지 내려가나보다. 그러나 그 분노가 혁명을 일으켜 새시대가 도래한들 나에게는 무슨 소용인지, 혁명 후 도래한 세상에 내 자리는 물론 당신의 자리도 없을 것이다. 솔제니친이 수용소 군도에서 꼬집었듯, 철장 안에서도 나만은 무죄라고, 저들은 죄인이지만 나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법이다. 하지만 사회는 변화해야하는 법, 반복된 혁명의 역사가 인간 사회에 지진을 일으켰고, 우리는 그들 시체 위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시대정신이라 외쳐대는 어떤 사상의 흐름에, 그 흐름을 주도하는 누군가의 의지대로 내 운명이 굽이치도록 내버려두어야하나? 나 개인의 삶을 버리고 시대를 위한 시체가 되어야하나? 하지만 자신의 명예를 위해 상대 또한 드높여주었던 일리아스의 전사들과 달리 내 명예를 드높여줄 상대는 어디있는가? 지금 이 시대의 자신의 적을 드높여주는 전사가 있기는 한가? 나는 혁명가들의 수단으로써 소비될 뿐인가?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문다.
그렇다면, 신과 인간,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넘을 수 없는 벽을 어떻게 해석해야 나에게 바로 유용할 수 있을까? 다시, 왜 신들은 그토록 인간적이며, 인간들은 한계까지 자신을 밀어붙일까? 고전을 읽다 길을 잃으면, 고전에 대한 평가를 따라가보자. 아래는 일리아스 뒷표지에 적혀있는 현인들의 말이다.
"호메로스는 그 스스로가 자연이다. 자연은 그 속에서 끊임없이 산물을 창조한다."
- 카를 구스타브 융
"도처에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역설적으로 곧 끝나고 말 생에 대한 찬사이고, 목숨보다 그리고 신보다 더 위대한 인간들에 대한 증언이다.
- 앙드레 보나르
"나는 일리아스의 장면들을 충분히 '그리스적인' 방식으로 이해하지 못할까봐 두렵다."
- 프리드리히 니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호메로스가 가지는 한계만큼이 우리 삶의 한계라고."
- 헤라클레이토스
저들이 저마다 찾아낸 가치들은 서로 다르겠지만은 위 말들을 종합해 이런 식으로 표현해본다.
끊임없이 산물을 창조하는 자연 속에서 우리는 우리 삶의 한계를 보았다. 생을 가리는 죽음의 그늘이라는 한계 아래서 되려 드높아지는 생의 가치, 고대 그리스의 신과 같은 인간들이 목숨보다 중요시한 생의 가치는 무엇일까?
먼저 우리 삶의 한계란 무엇일까? 우리 삶의 끝,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음이 인간의 한계이다. 그리스인들이 생에 대해 찬사를 보낸 이유는 죽음 이후에는 곧 가치가 끝나버리기 때문이지 않을까? 호메로스의 노래는 죽음도 바래지 못할 가치를 지키고자 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죽음도 바래지 못할 가치는 무엇일까? 그러고보니 호메로스야말로 죽음을 초월해 2천년이 넘도록 이어지는 가치를 남기지 않았던가? 위대한 업적은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중요시한 가치는 바로 죽음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업적이라 생각해본다. 이제 우리는 위대한 업적은 죽음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죽음도 초월해버리는 업적이란 대체 무엇일까? 호메로스가, 일리아스 속 전사들이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인간들의 명예를 드높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음이라는 인간 삶의 끝에 있는 한계를 초월할 정도로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는 시도였다.
하지만 왜? 죽어버리면 나의 삶은 끝나는 것을. 나의 가치도 나에겐 의미가 없을진데 왜 그들은 그토록 죽음을 초월하고자 했을까? 인간의 애씀이 더욱 드높아지려면 한계를 돌파하는 수 밖에 없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신들이 그들의 한계를 명확히 해줌으로써, 그들의 애씀 또한 더욱 명확히 해줄 수 있다. 반대로 사람이 죽어버린 다면 바로 시들어버릴 가치는 대체 무엇일까? 올륌푸스의 신들이 인간을 완전히 떠나버린다면, 인간들의 끝은 죽음이요. 죽음을 초월할 수는 없기에 전쟁터에서의 덕과 명예와 힘은 생존에 국한된다. 그리하여 생존에 갇혀버린 인간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상대를 죽이는 것보다 수치를 무릎쓰고 죽음을 피하는 일이 더 중요해지고, 이는 함락됨으로 이어진다. 무력한 존재를 함락시킴에 어떤 명예가 있을까, 적군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신과 같은 영웅이라 칭송해주는 이유는 자신의 명예를 더 드높이기 위해 명예롭고 위대한 존재를 함락시키기 위함이고, 그렇게 위대해진 전투에서 명예롭게 싸우다 죽는것이 나의 아내와 자식 그리고 나라가 무력하게 함락됨보다 나으리라. 그래서 그들은 신을 믿었다. 죽음 이후에는 혼백이 몸과 분리되어 하데스가 지배하는 땅 속으로 인도된다. 그들에게는 지금 우리에게 없는 사후세상이 있었다. 파트로클로스의 혼백이 아퀼레우스에게 다가와 자신의 장례를 부탁했듯이 신의 존재가 그들의 삶을 죽음 이후에도 이어주었다. 비록 죽음을 되돌릴수는 없었지만, 신의 존재 덕분에 그들은 죽음 이후의 가치를 믿고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초월할 수 있었다. 인간들이 한계까지 자신을 표현한 이유는 이러했다.
그렇다면 신들이 그토록 인간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들의 덕과 명예와 힘은 그들이 전쟁에서 세운 공훈으로 얻어지는 것이지만은, 신들의 존재가 도리어 그들의 애씀을 진정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럼 신이 인간적일 이유가 있는 걸까? 귀족들이 자신들의 생활상을 이상화하려 신들을 표현했으니 그들도 인간적일수 밖에 없었다면, 귀족의 존재가 신의 존재를 믿게 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반대로 신들이 인간적이지 않았다면 그들이 존재한다고 믿지도 못했다는 뜻일지 모른다. 영웅들은 자신의 목적과 충돌하는 신의 결정 때문에 되려 목적의 가치를 뚜렷이 알게 된다. 파도가 해안가로 쏟아져 흘러내리는 물과 밀어내는 물이 부딪혀 바스러질때서야 그 하얀 물거품이 보이고 파도소리가 들리듯이, 신이 파도를 허용해준다면 그것을 믿고 의지하며, 신이 파도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것에 분노하고 안타까워할 수 있다. 이유없는 운명에 우리는 분노할 수 없다. 그저 허망할 뿐이다. 그리하여 신들은 인간의 감정을 위해 인간적일 수 밖에 없었다.
아, 귀족이 평민의 애씀을 위해 초월적인 위치에서 그들의 한계를 명확히하며, 스스로 인간적임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했나보다. 그렇다면 계급이 사라지고 계층이 부각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상위 계층에 우리의 삶을 맡겨, 제물을 바치며 그들에게 기도하고 그들에게 약속해야하는 것일까? 그럴 수는 없는 시대이다. 그게 가능하다고 쳐도, 누가 그것을 따르겠는가? 반지의 제왕에서 처럼 왕은 백성을 지키고 본인이 앞장서 전쟁을 치루는 동안, 기사는 왕에게 충실히 복종하며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릴수 있을까? 감지네 샘이 주인 프로도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듯, 우리가 그럴 수 있을까? 계층의 차이가 그것을 위해 존재한다고 우리는 믿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이 지점에서 칼 구스타브 융의 연구가 무척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융은 신화와 고서들을 연구하며 전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초월적 형상을 표현한 작업물들이 인간 심리현상의 결과물임을 보았다. 누군가 말했듯이, 신이 죽은 이 시대, 하늘에서 추락한 신이 인간의 무의식으로 들어간 것이다. 사회 계층 간 협력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느껴지는 오늘 날,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서 나의 자아보다 높은 상위 계급의 무언가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우리는 신들과 전사들, 그들의 나라와 가족과 재물과 제물을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서 발견 할 수 있다. 나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는가 하면, 의심을 싹트게하고, 눈을 가려 나의 형제와 분란을 일으키게 하는 신들이 내 마음 속에 있다면, 그들의 존재 덕분에 내 애씀이 더욱 드높아 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들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그에 따르는 보복이 있을지니, 그들의 노여움을 풀고 나의 목적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신들에게 헤카톰베를 바쳐야한다. 그러면 빛나는 눈의 아테네가 아카이오이족 곁에 내려와 용기를 불어넣고 함께 전열을 가다듬었듯, 신들이 나에게 다가와 함께 싸워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제우스의 뜻대로 흘러가니, 인간으로서는, 내 자아로서는 내 운명을 알지 못하리라.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다면 일리아스에서 무척 많은 것을 얻어 낼 수 있을테다. 신들의 노랫말을 내 입으로 내뱉어보며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짐작해본다면, 내 무의식이 내 자아를 어떻게 휘두르는지, 내 자아는 그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그 운명이 어떤 결말을 맞는지 매우 매우 유용한 원형적 교훈들과 방법론들을 뽑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최고 신 제우스 조차도 각잡고 치장한 헤라의 유혹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달라는 여신의 노랫말에서 우리는 공감하는 법과 공감해줄 수 있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신들 간의 다툼을 통해 우리 마음 속에서도 다툼이 일어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도 마음 속 신들의 지배를 따른 다는 사실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다만 일리아스에서만큼은 신들에게도, 인간들에게도, 분노가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뒷세우스에서는 어떻게 다를지 언젠가 읽어보고 싶다.
전적으로 나를 위해 써본 글이지만, 예술의 측면에서도 몇가지 호기심이 동하기도 했다. 난삽한 사건들의 조합에 질서를 부여해주는 일관된 형식과 그 속에서 느껴지는 표현의 다채로움과 풍요로움, 행동과 감정의 구분이 없는 묘사에서 읽어낼 수 있는 그리스인들의 가치관, 호메로스의 문체가 역사적으로나 작품 내적으로나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오뒷세우스와 비교하여 두 작품의 모티브에 어떤 차이가 있고, 당시 시공간의 가치가 어떤 식으로 변모했는지 등, 내가 어렴풋이 고민해본 의문이 해설에 그대로 담겨있는 걸 보니 내가 이 책을 잘못 읽진 않았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융을 비롯한 현인들이 일리아스를 그렇게 평가한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천병희 센세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글을 마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퀼레우스의 분노를!
노래하소서 호메로스여! 신들과 인간들의 분노를!
오늘까지 달린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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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한 책 - 21권]
1. 융 기본 저작집, 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2. 죄와 벌 (총 2권)
3. 체호프 단편선
4. 목소리를 보았네
6. 괴테와의 대화 1권
7. 에덴의 용
8. 수용소 군도 1권, 2권, 3권, 4권 5권
9. 현명한 투자자
10. 일리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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