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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하 카라마조프)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대강 '소설가로서 궁극적으로 쓰고 싶은 것은 종합 소설이고, <카라마조프>가 종합 소설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라는 말이었는데, 뜬금없이 이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을 읽으며 이 종합 소설이라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세대 갈등을 주제로 보아도 좋고, 로맨스 소설로서도 훌륭하고, 성장물로 읽어도 좋다.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주제가 정교하게 맞물려 결말까지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마치 퍼즐이 맞춰져나가는 듯한 쾌감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종합 소설적인 면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는 명확한 주인공이 존재한다. 바로 '니힐리스트' 바자로프다. 요즘 말로는 '허무주의자'로 번역되는데, 뉘앙스는 조금 다르지만 두 단어의 어감은 꽤나 유사하다. 기존의 교조적인 사회 분위기에 반기를 드는 이들이라고 하면 적당할 것 같다. 이 니힐리스트는 자신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진 아버지 세대와 사사건건 충돌하는데, 사실 그는 비단 기성세대로 직유되는 전통과 관습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포함된 젊은 세대까지도 가차 없이 비웃고 부정한다. 물론, 이 냉소에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자신까지도 냉소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는 재수 없긴 해도 나름의 일관성을 확보한다. 모든 것에 대한 부정과 의심은 결국 자신에 대한 의문으로 귀결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조(自嘲)가 없었다면 그는 그저 덜떨어진 궤변가 혹은 철없는 애어른에 지나지 않는다. 투르게네프는 예리한 통찰을 통해 이런 우스꽝스러움의 표상으로 시트니코프를 제시하고 있다.



다시 바자로프로 돌아오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비웃지만 그의 인간성은 냉소보다 강력하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매력적인 이성을 '실한 몸뚱이', '일등품' 등으로 비유하며 유물론적인 살덩어리로 격하해봐야 열정은 결코 가라앉지 않는다. 오딘초바와의 줄타기 끝에 격정을 토로하는 것은 비극적인 로맨스의 단편이며, 애 딸린 유부녀인 페네치카에게 꽃을 바치며 키스하는 장면은 그가 괄시했던 '낭만주의' 그 자체이다. 바자로프에게 있어 속물적인 기성세대로 대표되는 파벨과의 결투에서 일부러 그의 허벅다리를 쏘고, 치료까지 해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냉소하는 만큼이나 한없이 낭만적인 인간이다.


그의 낭만-냉소의 모순은 극에 걸쳐 심화되다가 그가 냉소의 대가로 완전히 고립되었을 때 절정에 달한다. 바자로프를 존중하는 것 같았던 농민들은 지주(기성세대)를 비웃는 만큼이나 그도 비웃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뛰어난 의사라는 직업에 걸맞지 않은 장티푸스로 인한 죽음은 뜬금없다 못해 다분히 풍자적이다. 오딘초바 앞에서는 죽어가는 자신을 거인에 비유하며 '꼬리를 흔들며 아양을 떨지는 않을' 것이라 말하지만 그가 하고 있는 것은 고해성사도, 고고한 독백도 아니고 생전에 가지지 못했던 이성에게 바치는 마지막 고백에 다름 아니다.


니힐리스트 다운 허무한 죽음은 한편으로는 그가 보여준 모순에 걸맞게 익살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모순 덕분에 나름의 당위성과 낭만적인 고결함(아마 바자로프 본인은 비웃을 법한)을 확보한다. <악령>의 표트르가 니힐리스트적인 부분보다 치졸한 협잡꾼의 면모가 더 두드러지는 것과 정반대로 바자로프는 그가 보여준 인간성을 통해 애수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작가가 에필로그에서 말하듯, 그의 모순된, 그렇기에 한없이 인간적인 삶과 죽음은 '영원한 화해와 무궁한 생명'에 대한 한 줌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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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며 유독 흥미로웠던 부분은 바자로프가 '오직 중요한 것은 2x2는 4라는 사실'이라고 말한다는 점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지하생활자가 대놓고 당대의 합리주의를 비웃을 때 인용하는 바로 그것인데, <아버지와 아들>이 1860년에 세상에 나왔고 <지하생활자의 수기>가 1862년에 나온 것을 생각하면 분명히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악령>에서 대놓고 투르게네프를 풍자하는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도 그렇고.. 이 두 작가의 애증 관계는 알면 알수록 재밌다.


역자 해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바자로프를 라스콜리니코프와 지하생활자와 유사한 인물로 보았다고 하는데, 실로 이들이 보이는 광증의 기전은 거기서 거기다. 물론 이후 도스토예프스키가 보여주는 인간들의 똘끼에 비하면 바자로프의 그것은 한없이 마일드하긴 하지만, 이들의 정체성은 똑같다. 하지만 바자로프는 결코 선을 넘지는 않는다. 이것이 그의 한계라면 한계겠지만, 한편으로는 선을 넘지 않았기에 그의 모순은 모두가 포용할 수 있는 정도에 머무른다. 이후 도스토예프스키가 보여주듯, 한번 월권을 저지른 인간들은 다시는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니까.


작품 외적으로 보면 이 '선 안에 머무르는 니힐리스트' 라는 것 자체가 꽤나 어중간한 탓에 당대 러시아의 진보쪽에서는 자신들을 폄훼한 소설이라고 욕하고, 보수는 급진주의자들을 미화했다고 반발했다던데, 이런 모양새를 보면 중립이 양쪽에서 욕을 먹는 것은 불변의 법칙인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