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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내가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일은 쉽죠
자,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한 취미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 취미가 뭐냐고요?
그야 생매장이죠
한줄요약
고딕, 고풍, 만연, 광기, 죽음, 그렇게 포.
시공사의 에드거 앨런 포 전집 중 공포, 미스터리편을 읽었다. 사실 찍먹 겸 해서 읽은 건데 찍먹이라 하기 애매할 정도로 많이 읽은 것 같다ㅋㅋ 이래도 풍자편이랑 공상편이랑 장편에 시에 에세이까지 남아있는 거 생각하면 포가 다작을 했긴 했구나 싶다.
단편집인데 하나하나 리뷰하는 건 미친 짓 같아서(단편집을 하나하나 리뷰하는 건 젊작상으로 족한 것 같다) 이렇게 묶어서 리뷰하지만, 몇몇 개의 인상적인 단편은 언급을 할 것이다. 스포일러는 거진 안 하겠지만 뭐, 어차피 단편인데 별 상관없지 않나 싶다.
포의 특징이라 하면 3가지를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고딕, 고풍, 그리고 만연체. 사실 세 개가 하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잘 어우러졌지만(고딕과 고풍은 어쩌면 동일어 수준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이 세 가지가 포의 문체의 특징인 건 확실하다. 유럽을 배경 삼는 고딕풍의 배경과 묘사, 그리고 그걸 한층 예스럽고 멋스럽게 꾸며주는 고풍스럽고 다채로운 어휘, 이런 문장을 최대치로 활용하는 만연체까지. 간결체에 익숙한 독자나 어휘부가 빈약한(...) 독자에겐 다소 어렵게 읽힐 순 있어도, 결코 어려운 작가는 아니다.
3가지 특징 다음으로는 2가지 특징을 더 꼽을 수 있는데, 바로 관념과 내용이다. 이것이야말로 포의 정체성이 아니겠는지. 두 특징은 하나로 묶어서 설명해야 하는데, 떼어놓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공포, 미스터리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포는 그야말로 "죽음과 광기는 오랜 친구"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화자는 기이한 일을 겪기 마련이고, 그 기이한 일은 화자가 미쳤기 때문에 겪거나, 그 기이한 일로 미치게 되거나, 혹은 기이한 일과 미쳐가는 것이 병행하는 경우도 있다. 광기 어린 화자가 1인칭으로 나올 때엔 포의 내면 묘사가 얼마나 실감나면서 섬뜩한지 알 수 있는데,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주장하면서 그 행위로서 광기가 당연하게 표출되는 괴리감을 느낄 수 있다면 포의 매력을 한껏 느낀 것이리라.
또 죽음에 대한 묘사도 상당히 많다. 아니, 거진 대부분이 죽음과 연관돼 있다. 죽었는데 살아났다거나(라이지아, 모렐라 등), 혹은 죽음을 겪거나(M 발데미르 사건의 진실, 구덩이와 추 등), 죽이거나(검은 고양이, 고자쟁이 심장 등),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거나......(에이러스와 차미언의 대화 등) 포가 얼마나 죽음에 대해 고찰하고 생각해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런 광기와 죽음에 대해 포의 관념 묘사는 늘 사건에 기반을 두고 있다. 바꿔말하면 포의 단편 중 철저하게 관념 묘사로만 끌고가는 것이 없다. 어떤 관념이든 그것은 어느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포는 그 관념의 배경이 되는 사건을 반드시 서술한다. 이런 특징은 포가 단순히 관념에만 충실한 게 아닌, 그 관념이 발생하는 상황은 물론이고 현실과 관념이 맞물리는 개연성까지 알뜰하게 챙긴 것이다.
물론 단순히 이런 내용으로만 가득 차 있는 건 아니다. 길쭉한 상자처럼 미스터리 하지만 알고보면 별 게 없는(다른 단편에 비하면 그렇긴 하다) 슬픈 사연이 있다든지, 탐정소설의 원형이라는 뒤팽 시리즈, 혹은 잔혹한 복수극인 절름발이 개구리, 흔치 않은 모험소설인 황금벌레 등이 있다. 공포, 미스터리라는 장르 아래에서도 포가 다양한 창작을 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사실 거꾸로 생각해야 한다. 포의 다양한 창작을 공포, 미스터리로 묶은 것이니.)
비록 포의 나머지 전집을 읽고 얘기하는 게 아닌지라 포의 여러 일면을 말할 수 없는 점이 아쉽지만, 공포, 미스터리편만 해도 포의 수작이 상당히 많이 있으며(개인적으로 적사병의 가면극, M 발데미르 사건의 진실, 절름발이 개구리 등이 끝내준다!), 이러한 단편에서 보여준 포의 스타일이 장편으로 확장됐을 때의 기대감은 내 장바구니에 낸터킷의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이 들어감으로 이어졌다.
포를 읽어보시라ㅎㅎ 광기와 죽음, 그 음울한 무채색의 다채로움을 한껏 맡으면 색다른 기분이 될 테니.
에드거 앨런 포 전집(공포, 미스터리 편) 등급표
필력: A++
독서 과정에서 느끼는 총체적인 평가, 곧 작품 자체에 대한 인상. 나머지 6개의 기준을 모두 합친 또 하나의 전체적인 기준.
가독성: B
문장을 읽을 때 글이 얼마나 잘 읽히고 술술 넘어가느냐를 기준으로 삼음. 본인 어휘력도 적지 않은 영향이 있으니 주의.
인물: A
주인공을 비롯한 각 등장인물들이 가지는 개성, 매력, 혹은 대사 센스, 유머까지, 곧 작중 인물을 얼마나 잘 살려내고 잘 써내고 잘 활용하느냐에 대한 기준.
설정: A
장르별로 기준의 정의가 다르게 작용하겠지만, 공통적으로는 배경되는 시공간과 전후상황 등의 설정들이 가지는 매력과 활용도가 기준.
분위기: S
말 그대로 작품에 깔리는 분위기. 전체적인 분위기, 각 파트별 분위기, 분위기 전환 등의 '장면 인상' 위주의 기준.
구성: A
책 자체의 구성(목차), 문단 구성, 사건 구성, 사건의 흐름, 배치, 플롯으로 퉁칠 수 있는 부분까지. 소설의 골격에 대한 기준.
문장: A+
필력이 소설이라는 군집적이고 총체적인 문장의 인상이라면, 문장은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부분을 가리키며, 흔히 부르는 묘사도 여기에 포함.
평점 요약 깔끔하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