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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마. 내가 이렇게 아플 수 있으면 남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거. 제대로 연결해서 생각해야 해. 그런데 이렇게 연결하는 것은 의외로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닌지도 몰라. 오히려 그런 것쯤 없는 셈으로 여기며 지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기억해두지 않으면 안돼. 안 그러면 잊어먹게 되는 거야.
잊으면 괴물이 되는 거야.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160p
01. 이 작품의 주인공은 셋이며 각자 한 번씩 화자를 바꿔가며 소설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자매 중 누나인 소라, 동생인 나나, 그리고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그들과 가족처럼 지내온 청년 나기 순으로. 화자를 바꿔가는 소설의 의의는 어떤 인물의 내면을 독자에게 들이밀 수 있는 화자만의 특권─화자 입장에서 서술되지 않을 권리, 화자의 입장이 되어 자신의 시선으로 타인을 향해 서술할 권리, 자신을 서술할 권리─을 보다 능동적으로 작품에서 쓸 수 있다는 것인데, 자칫 뛰어난 인물의 매력이 타인의 시선 속 인물로만 머무르다 끝나지 않도록 작품을 꾸미거나 하나의 시선을 벗어나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에서 작품을 이끄는 이야기를 조명함으로써 이야기의 깊이를 더하는 등 화자를 여러 명 둠으로써 작품은 진부해지지 않고 활력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전개 방식의 단점을 바라본다면 가장 먼저 와닿는 것은 '분량 문제'다. 가령 과거가 깊으나 원톱 주인공까지는 아닌 인물을 화자로 낙점시킨다고 하면 작가는 이 인물의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서술해야 할지 난처해진다. 과거만을 설명하면 그를 화자로 삼는 동안 이야기의 시간이 멈춰버리고, 그렇다고 과거와 현재를 설명하자면 자연스레 그의 분량이 커지니 다른 인물의 분량을 뜯어먹게 되며, 그렇다고 이야기의 흐름을 끊지 않겠답시고 현재만을 서술하면 '과거가 깊은 인물'이 가지는 내면의 진지함 등을 온전하게 독자에게 전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소설이 택한 전개 방식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단점은 최대한 가리는 것이 작가의 고민이 될 텐데, 작가는 이 문제를 잘 해결했을까?
02. 우선 화자의 권리를 가장 많이 부여받는─비중이 가장 많은─인물의 선택은 성공적인 것 같다. 소라를 고르기에 소라는 독자를 잡아끌 만한 특별한 사건이 달리 없고─나나의 임신, 나기의 일본 출국─나기를 고르자니 나기는 아무래도 작품의 나머지 두 주인공과는 살짝 거리가 있는 인물이니만큼 나기에게 비중을 크게 할애했다면 소라-나나 자매가 덜 조명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나는 작품에서 끝없이 강조되는 '생각'을 잘 대변해주는 인물이다. 소라가 모세네 집의 요강을 "원래부터 모르게 생긴 것 아닐까" 할 때 나나는 "그게 뭔지는 몰라도 그게 뭔지, 제대로 생각해야지, 제대로." 라고 말한다. 모세가 자신의 목을 조를 때 모세를 할퀴며 리뷰 첫 문단에 인용된 저 문장을 곱씹는다. 작품의 제목 '계속해보겠습니다'의 뜻은 아마도 '(생각을) 계속해보겠습니다'일 것이다.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연결해 생각하는 일, 의외로 당연하게 일어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런 것을 없는 셈치고 여기며 지내는 게 사람들 사이에선 오히려 자연스러울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그렇기에 계속하여 기억하고 매 순간마다 생각해야 하는 일.
나나는 인물의 매력이나 갖고 있는 서사나 여러모로 주역 중의 주역이 되기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 같았다. 독자가 바라는 인물상은 각자 다르겠지만─참고로 필자는 내심 나기의 이야기가 가장 궁금했다─주제를 대변해주면서도 이야기의 호흡을 잘 이끌어나갈 만큼 재밌는 캐릭터는 나나가 맞았던 것 같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런 서술 방식을 택한 이상 나머지 두 주인공을 전부 파악하기란 조금 어렵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소라나 나기가 나나만큼의 분량을 가졌다면 나나가 소설에서 해낸 역할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03. 그렇지만 나나를 고른 이상 소라와 나기의 분량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내가 뭐라고 했더라? 장점은 최대한 살리고 단점은 가린다. 즉 선택과 집중을 통해 인물의 매력을 압축해서 독자에게 잘 전달해주어야 한다. 물론 "이럴 거면 나나가 아니라 OO가 분량을 많이 받았어야 했다!" 같은 소리는 나오지 않게끔 적절하게. 문장으로만 읽어도 뭔가 어지럽지만 실제로 그것이 작가가 할 일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부분에서 그렇게까지 명쾌하게 문제를 풀어낸 것 같진 않았다. 첫 번째로 화자를 맡는 소라의 이야기는 시놉시스의 느낌이 강하고─주변 인물 설명해주기, 사건의 발단을 외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기, 짤막하게 과거에 있었던 일 풀어주기─세 번째로 화자를 맡는 나기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맛이 강렬했다.
물론 소라와 나나의 시선 속에서 나기는 범상치 않은 인물임이 은연중에 여러 번 강조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나기의 이야기가 지나칠 정도로 소라나 나나의 이야기와 동떨어져 있다. 과거 이야기가 재미없는 건 아니지만 다른 소설의 등장인물 같았다. 작가가 나기를 의도적으로 이방인 같은 캐릭터로 설정해놨다고 하더라도 "나를 망가뜨리는 것은 너여야지." 같은 서사가 오래 쌓여야 맛이 나는 강렬한 문장들이 몇 페이지만에, 소라와 나나의 서사를 읽고 나기의 서사로 넘어온 독자의 가슴에 쏟아지는 것은 확실히 부조화스럽다는 인상을 줬다. 소라와 나나의 파트에서 나기에 대한 단서를, 아니면 나기의 파트에서 드러나는 그의 깊숙한 내면을 확실하게 보여주는─뺨 때리기나 하나뿐인 부족 얘기 말고─사건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님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나기의 분량을 늘렸거나. 나는 나기가 두고두고 아쉬웠다. 작가가 조금 더 나기의 서사를 밀도 있게 쌓아주었다면. 강렬함엔 폭발이 동반되어야 하고 폭발에는 탄탄한 서사가 동반되어야 한다.
04. 그럼에도 소라를 뺀 두 캐릭터의 매력은 서사를 이끌 만큼 확실하다. 특히 나나의 파트에서는 주제 의식의 강조나 이야기의 흐름이나 뚜렷한 약점이 보이지 않을 만큼 훌륭하게 잘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황정은의 글을 접하는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인데, 이 작가는 편하게 읽히는 장문을 정말 잘 쓴다. 나나는 나나니까 하는 어찌 보면 말장난 같아서 호불호가 갈릴 만한 지점에서도 작가의 문장력 덕분에 술술 읽히는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다. 일상적인 느낌이 가장 강한 소라의 파트를 좀 조용해서 아쉽다고 느낄지언정 지루하다고 느껴본 적 없었다. 또한 나나 파트와 나기 파트의 분위기 차이에서 보이듯 작가 스스로가 원하는 분위기를 문장으로 구체화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앞서 서술했듯이 그런 장점은 나기라는 이질적인 인물을 책 속에서 더욱 이질적이고 부조화스런 인물로 보이게 만들었지만서도, 바꾸어 말해 그런 무드의 작품 속에서 이질적인 캐릭터가 온전한 존재를 구축할 만큼 작가의 표현력이 좋았다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기본기가 좋은 작가는, 그리고 마음을 문장으로 꺼내어 표현하는 법을 아는 작가는 뭘 쓰든 빼어남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도 일말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런 작가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좋은 소설이다.
+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여러 주역들의 매력을 잘 조명한다'는 임무를 부여받은 작품이라는 맥락에서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떠올렸다. 비중 배분에 대한 이야기가 작품의 서사에 대한 이야기보다 훨씬 많다는 느낌이 든다면 아마 필자가 글을 쓰며 이 영화와 이 소설을 무의식적으로 비교해댄 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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