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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내가 지금까지 다뤄온 주제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에서 다뤄온 기독교상을 이야기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초월적인 기독교 사후세계를 지지하는 기독교의 시선을 다루지 않았다.
내가 이번에 다루게 될 주제는 지금까지 수조 수천억의 인류들이 지금까지 궁금해하며 고뇌를 갖게 했던 주제이다. 니체가 현실 부정이라고 불러온 불멸에 대해서다.
내가 저번에 권력에의 의지를 원죄라고 말한적이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의 사랑이 사실 진정한 자기긍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기독교가 가진 그 본질적이고 초이성적이며 비합리적인 희망을 다루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의 비판은 사실 기독교라는 종교의 행태가 유익하다 라고 했을뿐 기독교의 진실성이나 아니면 그 교리에 대해서는 사실 전혀 다루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기독교의 본질이자 희망은 이런 표면적인 부분이 아닌데 말이다.
사실 이 희망이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이 세상을 구원할 마지막 희망이다. 내 말이 과장됐다고 생각하는 독자분들이 있다고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주장이 사실임을 논리적인 논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증명토록 하겠다. 비록 이런 증명이 논리적인 증명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나는 여러 이유로 처음부터 니체가 비판한 이 희망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 희망의 부재의 결과에 대해서 논증하겠다.
과거부터 인간들은 자기를 보전시키고 증진시키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그 방법들에 대해서 나는 과거에 설명을 했지만 요약해서 말한다면 바로 명성이나 악명을 통한 자신의 영원화 였다. 그리고 기독교의 해결책은 사랑과 동정이었다.
그렇다면 이 명성이나 악명을 통한 자신의 영생이나 사랑과 동정을 통한 영생이나 이런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과연 이런 시도가 실제로 우리를 영원화시킬까? 그러니 우리의 보전본능을 충족시켜줄까?
내가 가정을 하나 하겠다. 과거 어떤 인물이 영원한 명성을 얻었다고 하자 수백억의 인간들이 그를 기억했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는 결국에 끝이나고 만다 우주는 다시한번 무로 돌아갈것이며 지금까지 우리가 이룩한 모든것들이 무로 돌아간다 과거 위대한 대철학자 러셀경이 말하길
" 우리의 믿음을 촉구하며 과학이 제시해주는 세상이란 이렇다...
그 어떤 불도 영웅주의도 강렬한 생각이나 느낌도 무덤 너머까지 개인의 삶을 지켜주진 못한다는것 평생의 모든 수고와 천재들의 모든 헌신과 모든 영감과 찬란함도 태양계의 거대한 죽음 속에서 소멸할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이런 모든 생각에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거의 확실한 사실이며 이를 부정한 철학은 존립할수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희망이라고 믿었던 이 모든것들은 사실 희망이 아닌 일종의 최면에 불과하다 우리 인간들의 운명은 결정됐다. 죽는다 우리 모두 죽는다 이렇게 당연한 사실은 잔혹한 사실이다.
내 어린시절을 고백하자면 내가 아주 어려서 과학에대한 흥미가 아주 강할때 읽었던 책에서는 아주 담담하게 우주의 멸망을 서술했다.
어렷던 나에겐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우주가 끝난다. 인간들도 끝난다.이게 나의 공포였다.
어린 시절 이 진실을 아는것은 최악의 벌이었다. 나는 인생을 살면서 어떤 결핍을 느꼈다. 어떤 슬픔을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은 지옥중에 지옥이었다. 그 어떤 고통과 절망도 그 시절을 능가하지 않는다.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를 괴롭게한 내 마음속의 가시를 생각할때마다 나는 사시나무처럼 떨고는 한다. 나는 생각했다 부모님이 없는 세계 나의 형제자매가 없는 세계 내가 외톨이가 되는 세계 그러나 더 큰 공포는 내가 부재한 세계였다. 즉 나란 존재의 소멸이었다. 그때 느낀 공포는 사자가 나를 쫓아오는 공포 이상이었으며 몽동이로 나를 때리거나 불타는것의 공포 칼로 찔리는 공포의 이상이었다. 영화관에서 코미디 영화를 볼때도 눈물을 흘리게 만들며 영화의 엔딩 스크린을 볼때 공포를 느끼게 한 공포 였다.
영원한 버려짐 무한한 절망 이것이 나의 공포였다.
내가 그때 원했던것은 영원한 영광 영원한 명성 아니면 악명이라도 원했다. 대단한 존재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은 비극적인 위로이니 아무리 명성의 탑을 세워도 결국에는 허물어질 모래성일 뿐이다.
인간의 삶이란 비극이다 탈출구도 없고 희망도 없는 비극이다.
인간은 죽는다 초인도 죽는다 성인도 죽는다 그 누구도 죽지 않을수 없다 이것이 비극이다
독자 여러분 생각해보자 자신의 죽음을 사라짐을 생각해보아라 무의식을 상상해바라 영원한 소멸을 상상해보아라 불가능한다는걸 안다 그러나 상상해보아라 끝없는 공포다
또다른 문제는 우리의 형제자매 가족들도 죽는다는것이다. 내가 죽기전에 친구들의 죽음 가족들의 죽음을 보아야한다 우리가 끝까지 살아남는다해도 결국에는 마지막 잎새가 되어 사리질 운명이다. 생각해보아라 영원한 이별을 끝없는 사별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연인을 친구를 가족을 결국에는 죽을 우리의 아버지들 결국에는 죽을 우리의 어머니들 결국에는 죽을 우리의 친구들을 말이다.
누군가는 말하리 사라져가는 주변인들을 그리워해도 결국에는 인정해야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족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가 영원히 사라졌지만 그들을 보고 싶다는 소망이 죽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우리의 상실감이 채워질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무인도에서 유일한 우리의 친구나 가족이 죽는다면 우리는 미쳐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친한 사람들이 사라짐에 비극을 느낀다 그리고 이 비극은 영원히 지속된다.
그러니 기독교의 해결책도 전혀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나의 일부인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죽는다 사라진다 영원히 없어진다. 사랑조차도 썩어간다 사라져간다. 희망이란 없다
그저 비극만 있을뿐이다.
그리고 만약 죽고 끝이라면 정의의 희망을 가질수 있을까? 생각해보아라 선한 사람들을 등쳐먹고 산 수많은 악인들이 그 어떤 처벌도 없이 죽는다는것을 말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세상의 교훈은 결코 착한 사람들이 이기지 않는다는것이다 지금 우리의 게임판은 영민하고 강력하고 힘있는 자들의 승리로 가득찼다. 누가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말할수 있을까? 죽어서 끝이라면 이 최후의 정의의 희망도 사라진다. 오 비극이로다.
니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니체는 초인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니체가 이 문제에 대해서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죽음은 긍정할수 없는 문제였다 초인들의 행동들이 그저 무로 돌아갈것이며 지금까지의 투쟁이 무로 돌아간다는것을 니체도 참을수 없었던 것일까? 그는 아주 비합리적이며 그 어떤 종교적 교리보다도 이상한 주장을 했다 영원회귀가 이 주인공이다. 여기 영원한 시간이 있다. 그리고 영원히 우주가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그 와중에 언제가 우리의 삶과 똑같은 존재가 나타날것이다 모든 공식이 지금의 세계와 똑같은 세계가 나타날것이다. 그 존재가 영원히 존재하는 우리를 뜻한다 그러니 열심히 지금을 살자는 이야기다.
반박을 해보자면 이 니체의 주장은 우리의 궁금증을 해명하지 않는 괘변이다. 그 존재가 나와 똑같은 존재면 뭐하는가? 내가 아닌다 말이다. 그 어떤 사람이나 사자도 자신이 그 다음에도 새로 똑같은 존재가 태어난다는것에 위로를 느끼지는 못할것이다.
니체의 이 주장은 비극적인 위로다 그리고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위로다. 내가 의문을 품는게 하나 있다면 니체는 이 위로에서 위로를 얻었을까? 그는 행복했을까? 그의 명량한 철학의 근원에는 죽음에 대한 체념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는 자신의 영혼이 가장 깊은 곳에서 외치는 비명을 과연 들었을까? 아니면 알고도 무시한것일까?
지금까지의 이 비참한 상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요약
1. 인간은 죽는다
1.2 문제는 인간들은 보전본능을 가졌다 그리고 이 생존본능은 가장 강한 본능이다
인간들은 자신이 죽는다는것을 안다
1.2.3 그러나 인간들은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죽는다는것과 죽음을 피할수 없다는것을 너무나 잘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할때 절망감을 느낀다.
2. 우리 주변 사람들이 죽는다
2.1 우리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우리의 주변 사람들이 죽어간다.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과 다시 만나길 바란다
2.1.3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이 영원히 사라졌다는것이다 종국에 우리는 잎이 다사라진 썩어가는 나무가 된다.
우리의 상실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져도 새로운 관계에서 상실감을 회복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새로운 관계도 끝나고 만다 비극은 계속된다.
3.현생에서 정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1.2 문제는 우리는 정의의 실현을 바란다는것이다.
1.2.3 그러나 죽으면 끝이라면 최후의 정의는 물건너간다.
결론 우리의 인생은 비참하고 짧고 참혹하며 비극이다.
해결책들
1.에피쿠로스의 해결책
사실 똑똑하고 철학적으로 성숙된 사람이라면 에피쿠로스의 해결책을 제시할것이다
아주 간단한 삼단논법이다.
1.죽고 나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2.존재하지 않는것은 인간한테 해가 될수 없다
3. 해가 될수 없는것을 두려워하는것은 비합리적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아주 논리적인 이 삼단논법은 죽음 문제에 확실한 해결책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 해결책이 의지적 감성적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어떠한 상태라고 생각하기에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는 소멸에대한 공포이다. 그러핟 이것은 비합리적이다 비이성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한다 소멸을 영원히 사라지는것을 말이다. 우리는 인식할 수 없음을 두려워한다. 이것이 죽음의 공포의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에피쿠로스는 틀렸다.
이것이 무의 공포이다 죽음을 안 어린이가 울음을 터트리는 부분은 어떤 상태도 될수 없다것. 나라는 존재가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에대한 공포다.
사라지고 싶지 않아라고 인간은 외치고있다. 우리의 존재가 어떻게든 존속하길 바란다.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이것의 요점을 놓쳤다. 만약 죽음이 사건이라면 우리가 이렇게 절망스러워할까? 사건이 아니기에 인간은 두려워한다.
죽음은 사건이 아니기에 두렵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 불멸의 열망이란 것은 우리에게 문제로 대두된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완전히 해명될 수 는 없지만 우리에게 굶주림 아니면 목마름같은 어떠한 문제로써 우리를 괴롭게 한다. 이것을 이성적으로 이 열망이 무가치하다며 주장하며 이것을 없애게 할려는 시도는 이런 굶주림을 이성적인 수학적인 문제처럼 여길때 나오는 착오다.
마치 아름다움처럼 말이죠.어떤 바보가 있는데 그는 아름다움에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비합리적이며 비이성적인 갈증이 없다 그 바보가 말한다. 왜 여자를 고르때 아름다음을 따지는가?
아름답다고해서 더 가정일을 잘하거나 돈을 잘벌지도 않는데 왜? 아름다음을 원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느낀다. 아름다운 여자에대한 우리의 열망을 . 근데 어떤 과학자가 아름다음의 불필요성을 증명했다고 해보자. 그러나 우리가 아름다움이 필요성 때문에 원했던 것일까?
아니. 우리는 아름다움을 그저 원한다. 만약 그런 이유로 아름다운 여인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감정적 병자 일것이다.
약간 저급합 비유이지만 성기로 비유하자면 마치 자신의 성기의 크기가 작은 사람이 의학적으로는 성기의 크기가 쾌락이나 임신과 별 상관없다는고 말하며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흔히들 성기의 크기가 쾌락이나 임신과 관련이 없다는걸 알고 어느정도 안심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기가 다른 사람보다 작을때 열등감과 불쾌감을 느낀다.마치 자신이 패배자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렇지 않다면 왜? 포르노에서 남성 배우의 성기는 늘 클까?
포르노에서 남자배우의 성기가 늘 큰이유는 우리가 그런 포르노 배우같은 큰 성기를 갖고싶다는 본능에서 비롯됐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 사실을 안다해도 우리가 갖고있는 큰 성기에대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다.
남자들은 모두 성기에대한 정신병적 망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되겠다. 성기가 작으면 우리의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저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주장만으로 이 큰 성기에대한 욕망을 없게 만들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내가 알기로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다.
오직 이성적인 이유만으로 아름다운 여인에대한 욕망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직 이성적인 이유만으로 큰 성기에대한 열망이 사라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신적 병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왜? 죽음에대해서 만큼은 이런 철학적 주장이 이런 열망을 없에게 할 수 있다고 믿을까?
철학적이거나 합리적인 논증으로 할 필요가 없다고 규정한다고 해서 그런 문제가 사라지는 것 일까?
어떤 열망들은 철학적이거나 논리적인 명제로 해결할 수 없다. 마치 아름다움에대한 열망이나 큰 성기에대한 열망처럼 말이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이런 논증이 죽음의 공포를 없에게 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경험적인 증거들을 제시하겠다.
무신론의 거두 barbara ehrenreich가 말하길 에피쿠로스의 주장과 다르게 인간들이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서 근심을 없애게 할수있다는것은 틀렸다고 주장하며 아무리 에피쿠로스의 주장을 생각해도 죽음의 공포가 아주 강하게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에피쿠로스의 아주 강력한 추종자인 D. yalom 박사 또한 자신이 에피쿠로스의 주장을 아주 잘알고 있지만 결코 단절되거나 끝나지 않는 어두운 그림자인 죽음을 다른 사람들처럼 공유한다고 말했다 그는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죽음의 공포를 없애게 할거라고 확신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환자들한테도 이 에피쿠로스의 주장을 인용한다.
그리고 무신론의 거두 샘 해리스가 말하길 자신이 보기에 죽음은 절대로 수용할수 없는 문제이며 자신한테 아주 심각한 실존적 문제라고 고백했다.
더 큰 문제는 에피쿠로스의 수제자인 루크레티우스조차도 명성의 열망을 극복하지 못했다는것이다. 그에 대해서 연구한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의 시나 글에서는 노골적으로 명성에대한 열망 다른 사람들보다 더 기억되고자 하는 열망이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런 열망은 TMT에서 설명하길 죽음의 공포의 표출이다 즉 에피쿠로스의 수제자조차도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성공했다고 볼수 있겠는가? 참고로 그 논문의 이름은 MORTAL IMMORTAL이다.
2. 무시하고 살기
가장 문제가 없는 해결책이다 그냥 무시하고 살던대로 살자 이 해결책의 문제점은 이거다
어느날 창조론을 믿는 광신자가 자신의 이론을 파괴하는 아주 강력한 진화론 논증을 알게됐다 근데 그의 결론은 이런걸 생각하면 괜히 피곤해지니 도넛이나 먹자라면 그가 지적으로 정직하거나 나태하지 않은 사람인가? 이 해결책은 죽으면 끝이라는 무신론적 해결책을 고수하는 이유인 지적인 정직성을 버리는 기독교 광신도같은 해결책이다. 우리는 무시하고 살기가 아니라 이 문제를 숙고하고 대면해야한다.
3. 기독교적 해결책
이 해결책에 관해서는 다음 포스팅에 다루겠다.
종교는 보험이다, 확신은 없지만 만에하나 천국이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은 믿어둔다,젊을때부터 욜심히 믿었는데 신이 없으면 하나밖에 없는 인생 너무 손해보는거니까 죽기 몇년전부터 믿어둔다...그래서 나는 깔끔하게 은퇴 후에 믿자고 스스로 합의봄...
파스칼좌...
존나 찌질한 글이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 초로 날아간 다음, 당시 무신론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을 적으로 설정하는 정도의 수준낮은 기만을 품은 글임. 무슨 결론에 도달하든 그 결론은 아무 의미를 지니지 않을것.
그럼 현대 무신론에 대해서 설명해주실수 있을까요? 궁금하네요
현대의 무신론자라고 달라진건 없음. 단지 이들과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를 동치함으로써 초인의 고귀함을 격하시키고 자신의 약함을 감추지 않기를 바람.
OK 알아들었음
니체의 철학이 죽음의 공포에 떠는 이들을 위로해주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저급한 생각으론 니체를 담을 수 없음. 님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19세기에나 존재하던 쓰레기들이고.
내 주장은 니체의 철학이 죽음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는게 아님 그러니까 우나무노는 그저 실용성에 대해서 묻고 있을뿐이지 실용성에대한 비판이 니체 철학의 비판인가? 아니! 그러나 이 비판은 니체 철학의 실천 불가능성을 이야기하고 하는거지 그러니까 우리한테 실용성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지 나는 개인적으로 니체 철학이 죽음의 공포 때문에 고안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댓글 달아줘서 고맙고 감사하다 너덕분에 지적으로 유익한 시간을 보내게 되서 좋았다 너의 비판은 나중에 참고 하겠다
니체 철학이 엘리트주의적이라고? 그럼 왜 귀족주의적인가? 왜 나는 아직 노예인가? 이렇게 물었어야함. 니체 철학이 우리(집단)를 위할 것이란 착각, 즉 집단에 대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착각, 그리고 바로 그 동정심으로서 강자인 나, 약자인 우민을 구분짓고, 또 그럼으로서 우민들과 나의 저급함이 같아지고, 또 그들과 내가 같아지는 것.
이 모든 나를 노예화하는 것들에서의 해방을 종용하기때문에 니체 철학이 우리를 위할 수 없는 엘리트주의 철학인 것임. 이 인과를 뒤집어놓고 니체를 논할 순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