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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운홍, 「한반도에 백제는 없었다(2021)」.
공부의 유익성을 말할 때, 사람의 세계는 지식이 쌓이는 만큼 넓어진다고들 한다. 단순히 자기 흥미 본위에만 얽히지 말고, 다른 것도 좀 보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굳이 그런 말을 수칙으로 삼지 않아도, 이따금 남을 통해 자연스레 넓어지곤 한다.
책을 읽다 보면 항상 그랬다. 최인훈의 「광장(1960)」을 읽고 한국전쟁에 호기심이 생겼고,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1983)」을 읽고 월남전에 호기심을 갖고,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1974)」를 읽고 SF 소설에 흥미를 가지는 등 책을 통해 모르던 영역에 발을 들이밀곤 했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번엔 이문열의 책이다.
학교에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을 읽고 처음 알게 된 작가인데, 당시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다가 요 근래에 와서 그의 단편집을 읽고 푹 빠지고 말았다. 단편집 「필론과 돼지(2016)」에 실린 「필론의 돼지(1980)」가 특히 그러했는데, 이건 대학생들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이었다. 학술적 지식을 듣고 배우는, 나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사회에 기여해야만 한다는 지식인 특유의 '앎의 의무'가 자아에서 천천히 자라나는 사람들을 향한 조소. 주제는 묵직한데 읽기는 편하고 문장의 맛도 깊고 진해서, 이따금 생각날 때마다 재독을 하게 된다.
어쨌든 소설이 좋으니 당연히 작가에게도 호기심이 생겼는데, 경력과 저작이 굉장히 풍부했다. 그의 이력 중 대하소설이 눈에 띄었는데, 그 유명한 삼국지 번역부터 별의 별 게 다 있다. 심지어 재야사학을 소재로 한 적도 있다. 그 중 하나가 드라마 「근초고왕(2010)」의 모티브가 된 소설인 「대륙의 한(1986)」. 요서경략설이 소재인데, 책 소개를 읽고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다.
ㆍㆍㆍ그러나
그 영광스런 백제의 역사는
지워져 버렸다.
백제 근초고왕 당시 우리 민족은 중국의 심장부와 같은 요서지방에
한반도의 두 배가 넘는 큰 땅을 차지했었다.
그러나 그 영광스런 백제의 역사는 지워져 버렸다.
이 소설에는
지워진 역사를 복원시켜야 한다는
작가의 여망이 담겨 있다!
알라딘, 「대륙의 한」 1권 소개.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893654.
책의 내용과 주제도 소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던데, 「필론의 돼지」 읽고 저걸 접하니 같은 작가가 맞나 싶었다. 권력자들의 졸렬함과 그에 휩쓸리는 대중, 말만 뻔지르르한 지식인을 얘기하면서 세상을 비웃는 작품을 쓰던 작가가 국가 이데올로기에 가까운 내용의 책을 썼다고 하니까…. 대충 성악가 조수미 씨가 트로트로 전향한다 거나, 태진아가 성악에 도전한다는 얘기를 듣는 정도의 충격이라고 보면 되겠다. 굉장히 생경하게 느껴졌다.
이문열 작가도 갑자기 계기가 생기거나 해서 확 전향한 건 아니고, 알고 보니 이건 그의 취미였다. 삼국지 번역까지 한 걸 보면 수준이 보통 깊은 건 아닌데, 아무래도 소설을 쓰기 이전부터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아예 뜬금없는 건 또 아닌 것도 같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가만 보면 '지금 세상 다 썩어빠져서 자정도 안 되니까, 그냥 힘과 카리스마를 갖춘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 다 정리해주면 좋지 않을까?'하는 내용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대하소설을 좀 극단적으로 다루면 그런 희망을 이루어주는 영웅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어쨌든 무엇이 이 사람을 사로 잡았는가 호기심이 일어 나도 재야사학을 찾았는데, 요서경략설 찾다 눈에 띈 게 이 책이었다. 이 책은 요서경략설이 아닌 백제대륙설을 다룬다. 읽어보니, 확실히 내 상고사 수준을 알겠다. 반박할 거 없이 인정할 수 밖에 없으니. 원래 다른 책을 읽으면 의문점도 생기고 하는데, 이 책을 읽을 땐 드는 게 없었다. 하긴, 질문도 아는 게 있어야 나오니까.
그나마 좀 의문점을 가졌던 게 능산리 고분군. 백제 무령왕릉과 100년 차이가 나는 이 왕릉은 심각할 정도로 퇴보했다고 한다. 무령왕릉은 굉장히 예술적인데, 천장부터 그러하다. 아치형의 천장이 특징인데, 이러면 벽돌 굽는 것부터 까다로운 기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치형을 이룰 수 있도록 윗변 아랫변 비율을 따로 조정하면서 만들어야 하는데, 이건 6면 모두 직각을 이루는 단순한 벽돌으로는 안 되니까. 그런데 능산리 고분은 평평한 횡혈식이고, 규모도 작다.
왜 여기서 의문을 가졌느냐면 이집트 피라미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그렇다. 피라미드를 보면 시대가 지날 수록 기술이 발전하는 게 당연한데, 이따금 전 시대보다 퇴화된 모습을 보이곤 한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왕조의 자금난. 돈이 없으니까 싸게 짓게 되고, 그에 따라 기술수준도 떨어진다. 백제의 경우는 양식 자체가 다르다 하지만, 벽돌 얘기를 보니 횡혈식이 훨씬 저렴하므로, 대충 그 시기 백제의 사건을 보면 검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능산리 고분군 지을 적에 다른 데 돈 쓸 일이 많다면 양식을 바꿀 정도로 퇴화하는 건 필연적일 테니.
이 외에는 곁가지로 알 수 있는 역사적 지식이 있으니까, 그걸 수확으로 삼았다.
좀 다른 얘기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악용될 가능성이 충분히 보였다. 요 근래 중국의 동북공정 이슈를 들어서 그런가, 만약 중국이 이 책에 나온 내용을 근거로 백제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면 어쩌나 싶었다. 찾아보니 이미 애저녁에 해버렸지만. https://www.yna.co.kr/view/AKR20170912183700005
물론 이 책은 그런 논조가 아니긴 한데, 만약 동북공정을 한다고 했을 때 재료로 쓰기 좋아 보이는 걸 대충 몇 가지 소개하면.
1. 백제금동대향로는 불교 국가 백제의 향로임에도 불구하고 봉래산과 신선세계에 가까운 묘사 등 도교의 냄새가 짙다. 마침 중국의 박산로라는 향로와 비슷한데, 이런 향로의 기술적 진화 계통이 한반도에선 보이지 않고 뜬금없이 튀어나온 모양새다. 그래서 중국 학자들은 중국산 수입품이라는 가설을 주장하고 있다.
2. 부여 능산리 고분의 양식을 보면 기존의 아치형 천장이 아닌 평평한 횡혈식으로 뜬금없이 바뀌었다. 책에선 언급이 없었는데, 검색해 보니 횡혈식은 중국이 원조였다. 이러면 왕릉의 양식이 갑자기 바뀐 이유를 지도층이 중국인이라는 식으로 왜곡하기 좋은 가설이다. http://ko.cbnucop.wikidok.net/wp-d/5b4769321ff7845c20eda99b/View
3. 백제가 한반도를 기반으로 하는 왕국이라면 당연히 왕도 한반도에 살았을 텐데, 백제왕궁의 흔적이라고 특정할 만한 게 없다. 심지어 왕궁의 주춧돌조차 없다.
4. '황산벌'과 연계될 만한 지명이 한반도에 없지만, 반대로 중국 안후이엔 황산이 있다. 마침 현대 중국 광시좡족자치구 백제허와 백제향에도 백제라는 지명이 존재하며, 중국에도 전주가 있다. 한반도에 있는 백제의 흔적은 중국의 백제 유민들이 넘어온 증거라고 주장하기 좋은 소재다.
이 외에도 더 많다. 농담삼아 얘기했지만, 막상 쓰고 보니 은근히 될 것 같기도 하다? 중국에선 김치, 쌈, 한복 등 큰 연결고리가 없음에도 중국원조설을 주장하는데, 백제와 중국의 연결고리는 이 책에서만 나오는 것만 수십 가지라.
어쨌든 상고사는 인연이 없어서 처음엔 머리 아파가며 봤는데, 막상 다 읽으니 역사 갖고 놀 줄도 알게 된 것 같아 어쩐지 뿌듯하다. 예전엔 서가에 꽂힌 역사소설을 볼 때 어떻게 저 재미없는 걸 갖고 놀 생각을 하지 싶어서 작가들에게 경외심을 가졌다. 내겐 그런 게 무슨 과학법칙 갖고 재미 느끼는 하드 SF처럼 느껴져서, 나는 그런 교양을 진짜배기 작가의 필수소양으로 여겼을 정도였다. 그런데 발 들여놓고 보니 그들이 이해된다. 역사는 재미있는 장난감이었다. 문학인들이 언어와 문장을 즐기는 것처럼.
2021.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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