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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15세기 지방 지식인층의 활용과 평민 교화」, 『역사와현실』, 118, 2020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은 왕조였다. 따라서 관인이나 사대부 이외에도 평민층에게도 성리학 이념을 교육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적 제약으로 관인들이 모든 평민들에게 성리학 교육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조선 정부는 지방의 향촌 지식인들을 이용해 평민층을 교화시키고자 했다. 당시 지방 교육은 원칙적으로는 국가가 담당해야 했지만, 여러 이유로 교육의 주도권은 향촌 지식인에게 넘어갔다.
필자는 이 논문을 읽고 조선 시기의 지방 교육이 점점 비대화되고 권력을 쥐게 되는 과정이 떠올랐다. 조선에는 성균관이라는 중앙 교육 기관이 존재했고, 조선 말기까지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성균관 못지않게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조직이 향약과 서원이었다. 향약은 평민들을 성리학 질서 하에 묶어두고 향촌 자치를 하기 위한 기구였고, 서원은 지방 사족들이 공론을 모으는 장소였다.
16세기 중엽 이후에 사림들이 권력 중심에 설 수 있던 이유도 향촌 사회에서 힘을 키웠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도 향촌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경재소 등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향촌 사족의 성장을 통제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평민들을 교화시키는 데에 지방의 유식자들을 이용한다는 정책은 향촌 사회 내 지식인들의 권위를 더욱 높여주었을 것이다.
결국 조선 초기부터 성장하기 시작한 지방의 지식인들은 점점 그 힘을 키워 갔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지방의 산림들이 조정 내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조선 정부 역시 성리학 국가였기에 이들을 존중해주었으나 지방 사족은 향촌에서의 지대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중앙 집권을 추구하고 있던 국왕과 대치했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정부도 향촌의 성장을 알면서도 묵인했거나 성장을 방조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고려 시대에 비해서 행정력이 강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방 전체를 통제하고 중앙의 힘만으로 정책을 시행하기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평민의 교화 문제는 중앙이 전부 책임지기에는 그 물적 인적 소비가 너무 컸다.
다만 조선 정부는 지방 사족의 성장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통제는 쉽지 않았고, 평민 교화뿐만 아니라 사족의 교육까지 지방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 진행 과정을 보면서 필자는 지식권력의 독점 문제 역시 생각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근현대의 학교 교육은 대부분 중앙에서 담당하지만, 전근대의 경우 지방과 중앙이 비중을 분담하였다. 따라서 지식을 어느 쪽이 더 비중 있게 가져가느냐가 통치의 방향과 권력 문제까지도 결정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지방 사족들은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으면서도 지식을 통한 담론권력은 놓지 않으려 했다. 따라서 논리적 비약이 있긴 하지만, 조선 초기 중앙에서 지방 지식인들을 이용해 평민 교화를 시도한 것은 이후, 중앙과 지방 사이의 갈등의 씨앗이 되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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