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은 이렇게 부딪히는 상황이지만 옛날에는 꽤 사이가 좋은 부녀였답니다"
한참 침묵을 유지하던 그의 입에 맥주가 벌컥벌컥 들이부어지고서야 가까스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형식은 생김생김이 투박하고 말 하나하나가 거칠지만 한때 동네에서 제일 가는 딸바보라고 하면 누구나 알법한 팔볼출이었으니 그의 말이 퍽 틀린 말도 아니다.
"이 아이 어릴때도 주말이면 딴 일 다 제처두고 딸이랑 시간을 보냈지요. 가족 여행도 자주 갔습니다. 하와이, 대만, 필리핀, 중국... 미국이나 영국이 아니면 뭐 어떻습니까! 딸아이 해외 여행 보내주고 싶어서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세계에 데려다줬는데... 좋은 나라 못 보여준게 미련이라면 미련이지만 아까운건 없어요. 왜냐! 지연이는 내 딸이니까!"
형식의 감정이 격해진다. 형식은 속이 타는지 맥주를 다시 한 병 까서 자신의 잔에 콸콸 붓고 한입에 꿀꺽 삼켜넘긴다. 영지는 자신의 아버지뻘인 형식이 스스로 잔을 채우는 것에 안절부절 못하고 애먼 손만 공중에서 들었다 놨다 할 뿐이었다.
"그런 귀하디 귀한 내 딸 어떤 놈팽이가 채갈까 노심초사하며 키워놨더니 이제 그 일도 다 헛일입니다 헛일. 놈팽이를 주의할 일이 아니었는데....힉읏..."
딸꾹질 섞인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래도 난 그거 다 이해해줍니다! 사람 좋아하는거에 뭐 이유가 있답니까? 놈팽이를 좋아하던 불여시를 좋아하던 내 사랑하는 딸내미인데! 대한민국 어느 부모를 데려와도 다 이해할거란 말입니다."
흥분하며 말을 하던 형식은 갑자기 말을 끊더니 맥주를 한 잔 더 따르고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말입니다"
"그래도 아직은 시기상조에요. 그 어떤 아비가 딸 가시밭길 걸어가는걸 응원합니까? 안봐도 뻔히 보이는 힘든 길을 제가 옳다구나 하고 밀어줄 수도 없고... 영지씨도 예? 그냥 서로 좋아하고... 친구처럼 잘 지내고... 그러면 되는걸 동네방네 둘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소문을 내고 다니면 어떡합니까"
형식이 영지를 타이르듯 나무랐다. 다만 그의 힘빠진 목소리에는 딸을 채간 영지에게 원망과 미움의 감정이 아닌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영지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하물며 남녀일도 당장에 어떻게 될지 몰라 이혼하고 그러는데 둘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알고......"
취기가 올랐는지 말끝이 흐리멍덩해진 형식을 보고 영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형식의 진심어린 걱정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의례적으로 고개를 흔드는 것이리라, 지연은 생각했다
'그놈의 시기상조는 언제까지 나랑 언니를 반대할건지... 나는 무려 그 어릴적부터 이 언니를 사랑했다고요. 난 엄마랑 이혼해버린 아빠와는 달라. 사랑에 확신이 있을거면 뭣하러 결혼한담?'
지연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지연은 사실 내심 언니가 이 자리에서 아버지의 말에 또박또박 토를 달며 자신을 옹호하길 바랬다. 물론 실제로 그랬다간 형식의 심기를 거슬리게할 뿐이었겠지만 그런것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 싸워준다는 그 사실 하나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지연은 생각했다
'언니도 고개를 끄덕이긴... 왜 우리의 앞길을 반대하는 사람이랑 술을 같이 마시는거야. 현실적으로 반박은 못해도 긍정은 하지말아야지'
지연은 방금 형식을 만나기 위해 오는 차 안에서 영지와 이야기한 일을 생각해냈다. 언니가 운전을 하고 지연은 옆 조수석에 앉아 우중충한 분위기를 달래줄 노래를 찾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지연아. 나 너네 아버지 뭐라고 불러야해? 아버님? 호호"
운전대를 잡고 신호를 대기하던 그때 영지가 말을 걸었다
"아버님은 그거 아냐? 남자가 여자집에 가서 '아버님 따님을 주십시오!' 막 이럴때 쓰는거"
지연은 억지로 굵은 남자목소리를 내며 드라마의 한 장면을 따라했다. 꽤 만족스러운 목소리 연기였지만 그걸 들은 영지는 웃음보가 펑 터져 한동안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지연도 깔깔 웃기 시작했다
"아니 뭐 상황은 그런 상황이지만... 그래도 아버님은 좀 어색하잖아. 내가 며느리도 아니구~"
"'이 김지연의 배우자면 며느리 맞지'"
또 다시 웃긴 남자 소리로 거들먹하게 대답하는 지연을 보고 영지는 겨우 진정시킨 웃음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거하게 터뜨렸다
"움... 하긴 글쎄... 아버지도 아니고, 아버님도 아니고, 아주버님...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저씨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 아예 형식씨 어때? 우리 아빠 이름 강형식인데 형식 할아범~ 이렇게 불러봐"
지연이 계속 옆에서 장난치기 시작하자 영지는 운전중이니까 그만하라며 손사레를 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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