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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수령을 전 지방에 파견했다. 따라서 지방관들이 지방을 통치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따라서 조선 정부는 나름대로 수령칠사 등을 통해 지방관들이 좋은 통치를 하도록 유도했다. 그러한 방법 중 하나가 목민서의 간행이었다. 조선 초의 목민서는 대부분 중국의 것을 그대로 간행한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지방 현실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15~16세기에 이르면 조선 지식인들이 쓴 목민서가 간행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는 유희춘의 치현수지나 정철의 유읍제문이 있었다. 그리고 양란을 거치며 조선 사회가 동요하자 더 많은 종류의 목민서가 간행되기 시작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목민서의 편찬 주체들이 대부분 소론과 남인 계통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 그들의 정치 상황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소론과 남인은 조선후기 정치지형에서 주류를 차지해 본 경험이 적었다. 주류는 노론이었기에 이들은 주자학 중심의 노론 사회관을 비판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지방의 문제점을 바라보았디. 이에 따라 새로운 목민서들이 많이 편찬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목민서라 하면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떠올린다. 그러나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이전의 목민학 전통을 집대성해 정약용의 언어로 풀어낸 것이다. 육전체제의 영향은 모긴대방에서, 문제의식은 소론 계열의 목민고나 안정복의 임관정요에서 다뤘던 것이다. 하지만 목민심서는 이들의 문제의식을 자신의 곡산부사 시절 경험과 버무려 개혁적인 목민서를 만들었고 목민학의 거두로 후대에 인정받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박지원의 칠사고 이외에 노론 계열에서 편찬한 목민서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노론 계열이 소학에서의 목민관과 주자의 목민관만으로 충분히 통치가 가능했다고 믿었기 때문이겠지만 변동하고 있는 조선 후기 사회를 6~700년 전의 이념으로 통치하려 했던 노론의 사상적 경직성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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