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소설가 옌롄커(1958~)
나는 줄곧 오늘날의 문학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가져 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위대한 문학이 이미 오래 전에 왕성한 발전을 이루면서 써야 할 작품들은 전부 다른 사람들이 다 썼기 때문이다. 둘째, 위대한 문학은 반드시 그것이 생산되기에 적합한 시대에 생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시대는 인터넷과 과학기술의 시대로서 또 다른 무언가에 속해 있다. 문학은 그저 이 시대의 주변화한 조연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은 더 이상 18세기 말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시기처럼 세계의 무대에서 문화의 기둥이자 주연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다.
위대한 문학을 생산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천재들만이 하늘의 보살핌을 받아 세태에 거역하면서도 왕성하게 자라고 하늘과 땅을 울리는 위대한 작품을 써낼 수 있다. 적어도 중국에서는 위대한 작품을 배출하는 시대는 이미 소리 없이 끝나버렸다. 지금의 현실과 정세는 내가 말하는 위대한 작품을 생산해낼 수 없는 시대다. 세계문학 전체에는 이미 19세기와 20세기의 200년이라는 세월의 영광과 광채가 있었고 인류 역사에는 한 동안 문학을 매우 중시했던 시기가 있었다. 나머지 작가들이 할 일은 최대한 조연으로서 빛나는 연기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 연극에서 조연이 주연보다 더 빛나기도 한다. 우리가 끊임없이 탐구하고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예상치 않은 위대함을 위해 글을 쓰되, 주연은 어디까지나 주연이고 조연은 아무리 잘 해도 조연이라는 연기와 역사의 분업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학의 주변화를 묵인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시대의 작가들이 그저 작가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작가들이 이 시대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고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어떤 것들인지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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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 진정으로 생명을 내놓는 종군기자가 없다면, 그건 정말로 어리석고 무서운 일일 것이다.
인류의 재난 앞에서 다른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재난이다.
전쟁이나 역병의 재난이 닥쳐왔을 때가 작가들이 기꺼이 ‘전사’나 ‘기자’가 되어야 할 때이고 그들의 목소리는 총성보다 더 멀리 울려 퍼질 것이다. 이런 다른 목소리들은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기를 거둬들이게 했고 상대방의 포성을 멈추게 했다. 아이작 바벨과 헤밍웨이, 노먼 메일러, 아이작 싱어, 조지 오웰 등이 그랬다. 반드시 전쟁 중에 기자가 되어야 훌륭한 작가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전쟁 중에 죽음을 보지 못하고 총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잔혹하고 부조리한 일일 것이다. 심지어 분명히 죽음을 보고 총소리를 듣고도 그 총성을 개선장군을 환영하는 폭죽소리라고 말한다면 이는 전쟁이나 역병의 재난보다 더 부조리하고 무서운 일일 것이다. 카프카가 자신의 일기에서 “오전에 전쟁이 발발했고, 오후에 목욕을 했다”라고 쓰긴 했지만 우리는 그가 부조리에 가장 민감했고 진정으로 부조리를 글로 써낼 수 있었던 작가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총소리를 폭죽소리로 변질시키곤 한다. 심지어 자신의 펜을 들어 총소리를 폭죽이라고 적음으로써 이런 부조리를 증명하기도 한다.
천지가 온통 울음소리인 가운데 누군가 팔을 휘저으며 큰 소리로 외친다고 해서 이를 나무랄 권한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수한 진상들이 분명치 않을 때 시인이나 작가, 교수, 지식인 들이 정확한 정치적 선택에 있어서 일찌감치 자신의 선택과 입장, 판단을 밝힌다고 해서 이를 질책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세계에는 추위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남극의 나약한 펭귄들 같은 중국 작가들의 유약함과 무력함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중국인과 중국 작가들의 상황은 남극 펭귄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종종 이런 상황들이 작가와 작가, 문학과 문학의 우열과 차이를 확연하게 갈라놓기도 한다. 중국에는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남들이 그렇게 말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심지어 어쩌면 위대한 작품 자체도 다른 목소리일 것이다. 다른 목소리가 없다면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위대한 문학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른 목소리의 존재를 허용하는 것이 어쩌다 뜻하지 않게 한두 권의 위대한 작품을 생산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긴박하고 중요한 일이다. 중국 작가들의 무능과 무력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중국 작가들이 이런저런 포용과 자유를 몹시 아쉬워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들도 없다. 인간에게는 날이 추우면 누구나 추위를 느끼고 날이 따스하면 누구다 그 따스함을 즐기는 공동의 심리가 있다. 하지만 정말로 모두가 똑같을 수 있을까? 작가와 문단이라는 이 한가한 집단을 놓고 얘기하자면, 사실 정말로 추운 겨울이 찾아왔을 때, 정말로 날이 추워졌을 때, 나는 남들이 나눠주거나 상으로 준 솜옷을 한 겹 더 껴입는 사람일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중국 작가들과 문학의 미묘함이자 난처함이요 서글픔이다. 진정한 추위와 한기 속에서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추위를 달랠 솜옷을 하나씩 더 껴입는 것이다.
문학을 문학이 아니게 하는 일이다.
두려운 것은 역사 속에서의 문학의 배역이 대체되거나 주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문학이 무능하고 무력하고 주변화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이러한 무능과 무력에 박수를 보내고 무력과 무능을 향해 큰 소리로 “좋아! 아주 훌륭해!”라고 외치는 것이다. 문학의 마지막 존엄과 체면을 깎아내리면서 문학이 쓰러져 죽는 것을 목도한 뒤에는 스스로 자신이 문학을 구한 작가이자 모범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중국문학의 유형이다. 작가들 스스로 문학의 회자수(劊子手)가 되고 있다. 중국문학의 비애는 수많은 작가들이 추위와 한기 속에서 남들보다 솜옷을 한 겹씩 더 껴입고 있다는 데에 있다. 중국문학의 출구 역시 모든 사람들이 추위와 한기에 떨고 있을 때 합 겹씩 더 껴입고 있는 그들이 스스로 솜옷을 벗어버릴 수 있느냐의 여부에 있다. 그러지 않고는 문학에 기대할 것이 없다. 심지어 문학이 악행이 되고 만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33420.html
그럼 지금 서사예술의 주연은 누구지? 영화? 웹툰?
개추
글 되게 잘 쓴다고 생각했는데 기사였구만
문학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던 위대한 문학의 시대는 갔고, 그저 용감하게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에 오늘날 문학의 의의가 있는데, 요즘 작가들이 그걸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 이 얘기인가.
저사람도 결국 중국 민주화운동 주장하다 죽기싫어서 회피하고 중국에 머무리면서 저런 말하는 것일뿐인 노예의 생각이다. 중국 지식인들이 하는 말은 사실 들을 이유가 없다. 그들 모두 노예이기 때문이다. 노예를 자처하며 돈과 평온함을 받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