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스포 有-----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c81fa11d028314d3faebecfec25ed6aa779bc7a5cf30825f7cf57ab4c66f60dc62af24b2e694ced712b099be4d37c7cedea49f508bf53f77d11



<마담 보바리>를 읽고 나서도 얼핏 느꼈지만 두 소설은 참 공통점이 많다. 작품 내적으로는 아름다운 여주인공이 소설의 중심이라는 점과 돈과 불륜 혹은 사랑(내로남불) 등의 지극히 통속적인 소재를 다룬다는 점, 작품 외적으로는 각 작가의 모국이 문화적으로 융성한 시기에 출판되었다는 점 등이 있겠다.


이런 특징들보다도 두드러지는 공통점은 두 작품 모두 낭만과 현실이 교차하며 내는 불협화음에 주목하면서, 몰락의 주체가 아닌 제3자를 극중 화자로 내세운다는 점이다. 이 주제 의식의 동질성과 서술 방식의 유사함으로 인해 두 작품 사이에는 비로소 묘한 유대감이 형성된다. 일종의 문학적 남매라고 할까, 뭐 하나 닮지 않은 듯하면서도 비슷한 것 같은 오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둘은 비슷한 만큼이나 다르다. 일란성 쌍둥이조차 성격이 다른데 이 두 걸작들 역시 남매가 됐든 생판 남이 됐든 결코 같지 않다. <마담 보바리>와 <위대한 개츠비>가 그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지점은 이 둘이 주제 의식에 대해 취하는 태도이다. 대체로 <마담 보바리>가 때로는 현실보다도 냉혹하게 낭만주의를 배격하고 있다면, <위대한 개츠비>는 낭만의 추한 민낯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도 우수 어린 시선으로 이야기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우선 시점에서 이런 특징이 드러난다. <마담 보바리>의 시점은 그때그때 중점을 달리하고, 분위기도 시시각각 바뀌긴 하지만 철저하게 전지적 작가 시점에 머무른다. 특이하게도 이런 시점에서 볼 수 있는 작가의 소소한 개입이나 감상조차도 아예 없는 수준이다. 이런 특징 덕분에 소설의 묘사는 무척이나 풍부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건조하다고 느껴진다. 개입 없는 풍부한 묘사는 다르게 말하면 냉랭할 때는 한없이 냉랭하다는 뜻이고, 플로베르는 이에 충실하여 그 묘사의 대상이 여주인공 엠마가 되든 레옹, 오메를 비롯한 속물들이 됐든 아무런 차별 없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써 내려갈 뿐이다. 엠마의 몰락이 가속되는 중반부부터 이런 냉정함이 확연히 눈에 띄기 시작하고, 빚더미로 인해 파멸하는 후반부에 이르러서도 한 점 변함없는 작가의 태도는 제아무리 엠마를 비웃던 독자라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차갑다.


반면, <위대한 개츠비>는 작품 내에 개별적인 화자가 존재한다. 흔히 말하는 액자식 구성인데, 이런 구성 하에서 작품 내 화자는 으레 작가의 대변인으로 나서기 마련이고 이 작품 또한 그러하다. 잠깐 생각해 보자. 만약 소설의 화자가 개츠비 본인이었다면 어땠을까? 과거를 되찾는다는 미명 하에 온갖 거짓말로 무장하고 남의 여자에 손대는 그 모든 과정을 서술하며 합리화를 곁들일 본인을 생각하면 가히 <롤리타>의 험버트 험버트가 생각날 지경이다. 만약 <마담 보바리>처럼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면? 1인칭 주인공 시점보다 조금 나을지는 몰라도 작가 본인이 의도한, 우리가 아는 <위대한 개츠비>의 신화적 분위기(비록 기만적일지라도)는 취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작품 내에 관찰자를 내세움으로써 이런 걱정은 말끔히 사라진다. 개츠비는 캐러웨이라는 호의적 화자의 시선 아래 신화화되며 데이지와 톰으로 대표되는 현실의 속물스러움을 뛰어넘는 무엇으로 표상된다.


더욱이 이 캐러웨이라는 인물은 들여다볼수록 작가 본인의 분신에 가깝다. 그가 개츠비를 옹호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정작 행적은 철저하게 중립적이다. 항상 폭풍의 한가운데 있지만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는데, 호텔 씬에서 갈등이 절정에 달할 때조차 캐러웨이는 철저하게 입을 다문 채 관찰한다. 일이 걷잡을 수없이 틀어져 극이 개츠비의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야말로 모든 게 끝난 뒤에야 조촐하게 뒤처리를 하며 끝맺음을 할 따름이다.




결말에서 이 두 작품의 차이는 보다 확연하다. <마담 보바리>의 엠마의 비극적이라면 비극적이고 희극적이라면 희극적인 죽음을 묘사할 때조차 작품 특유의 냉정함은 여전한데, 엠마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오메가 의사들에게 굽실거리는 모습은 헛웃음을 유발할 지경이다.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에필로그는 엠마의 죽음보다도 참담하다. 죽을 놈은 죽고, 살 놈은 산다. 그걸로 그만인 것이다. 읽는 이로 하여금 허탈함을 금치 못하게 하는, 악명 높은 마지막 문장은 화룡점정이라 할 만하다. '오메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는다.' 한때 반짝였던 낭만은 저물고, 인간들은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살아간다. 작가는 그 모습을 그저 무정한 필치로 써 내려간다.


이에 반해 <위대한 개츠비>는 꽤나 감정적이다. 사건이 종결된 후, 캐러웨이는 톰과 데이지를 향해 내놓고 환멸을 표하며 속물스러움 그 자체로 상징되는 뉴욕을 떠날 채비를 한다. 그러면서 황량하지만 한편으로는 몽환적인 폐저택과 바다 앞에서 무너져버린, 이뤄지지 못한 꿈들을 애도한다. 헛되고, 때로는 뒤틀리기까지 한 개츠비의-우리들의- 낭만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씁쓸하되 차갑지는 않다. 그 유명한 마지막 문장 '그래서 우리는 과거로 끊임없이 흘러들어가면서도 해류에 맞서 배를 띄우고 파도를 가른다.'라는 그의 이런 고뇌가 묻어나는 낭만주의를 한껏 드러내고 있다.




문학의 만신전에 오른 작품들 정도 되고 보면 작품 우열을 가리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결국 책을 갖고 논문을 쓰든 후기를 쓰든 그냥 덮든 간에 평가를 가르는 것은 취향이 될 것인데, 나는 아무래도 <위대한 개츠비>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놈의 마지막 문장이 포함된 캐러웨이의 애수가 기가 막히게 여운을 남기는 것도 있고, 배경이 되는 시대도 참 좋아하는 시대고... 사실 한편으로는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 기질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위대한 개츠비>의 호구스럽기까지 한 순정은, 으레 코웃음치기 마련이지만 한편으로는 묘한 동경을 자아내는데 이런 역설을 참 잘 녹여냈다. '위대한', 참으로 원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허망하기 그지없는 이 수식어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