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적인 행동은 어떻게 보면 타인이 예측가능한 행동을 뜻한다.
즉, 효율적인 행동은 모든 행동이 이해관계에서 비롯된다는 믿음에서 파생된 것이다.
효율적인 만찬이, 효율적인 사과가, 효율적인 음악이 있을까?
요즘 풍조를 보면 빨리 보고 배웠다고 생각하고 넘어간다. 바로 효율을 위해서다.
예제를 풀면 바로 내가 아는것이고, 효율적인 독서를 했다고 착각한다.
현실에서 응용문제를 만나면 본적이 없는 문제처럼 생각한다.
실제로, 사람사이에서 효율은 보이지 않는다.
음악을 2배속으로 들으면 200%의 효율로 음악을 감상한 것인가??
효율. 이 말을 다시 해석하자면, 효율이란 명분하에 자신을 지배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이다.
자신이 시간 또는 다른 조건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효율은 내가 어떤 질서 또는 유행에 짓눌려 무언갈 아끼려는 행동이다.
귀족과 다른 현대 농노의 특징일지 모른다.
자본주의가 도입될 당시에는 귀족의 정념을 이해관계로 치환 시키려고 엄청나게 애를썼다.
전쟁같은 귀족의 변덕을 잡기위해 이해관계라는 단어로 인간을 예측가능한 상태로 돌려 놓기 위해 애썼다.
그 여파로 효율이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는 것이 아닐까?
효율은 변덕을 누르는 좋은 단어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동시에 자유도 효율에 눌린다.
ref) 앨버트 허시먼 - 정념과 이해관계 (Passion and 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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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은 효율이 별로다 싶으면 판을 엎어버리지. 팔로워들은 어쩔수 없이 강대국이 정한 룰에 맞춰서 효율을 맞추려고 하는거고. 자본이 효율을 만들기도 하지만 강대국이 효율이 무엇이다라고 게임의 룰을 바꾸고, 거기 참여자들이 그 안에서 효율을 챙긴다고 본다. 실제 외교에서는 효율이라기 보다 게임의 판을 내 뜻대로 가져오기 위한 거지. 독서까지 효율을 따진다는건 좀 어폐가 있지. 설사 강대국이 유리한 효율을 가진 룰이라 하더라고 외교를 통해서 말한마디나 태도로 상황이 편해질수가 있음. 경제 정책은 실제로 비용을 투입하지만, 외교는 투입이라기 보단 태도의 문제에 가까워서 효율이라고 하기 어려움. 효율을 지배하는 게임의 규칙을 어떻게 다루고 싶은가에 대해서는 효율이 무용지물이고.
오 읽어봐야겠따
저 책은 자본주의 태동 시기에 논쟁의 이야기고, 독서 얘기는 없음. 그냥 내가 생각난 책임.
'효율'이란 단어만으로 문장을 논리적으로 구성하기는 힘든데 두루뭉수리한 표현으로 사람을 현혹시키기엔 좋은 거 같음. 어떤 방면으로의 효율을 어느 정도로 얻기 위해 어떤 식으로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수치로 딱 나타낼 수 있는 분야는 몇 없음. 그런 거 안 따지고 '효율적인 독서'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거.
규칙이 정해져 있으면 효율이 등장할 수 있음. 그래서 규칙이 변하지 않을수록 효율적인 방법들이 속속들이 등장함. 근데 시간에 따라 변동성이 큰 체계 안에서는 방법의 효율이 생각보다 떨어짐. 물론 독과점같은 방식으로 효율을 극대화 시킬수 있는 방법도 있지. 시불변 시스템에서는 최적을 찾기 쉽지만 그렇지 않으면 쉽지 않음. 시장에서 최적을 찾는다는게 변하는 시장에서 어느 순간에서 어느 순간까지는 이게 최적이다 이런것에 집중하지. 독서도 어떤 시간을 불변한다고 가정하고 보면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 존재할수 있음. 상대적으로 지식은 시불변성이 크지만 지혜는 시변성이 더 크지. 요약 : 규칙이 있는 체계에서는 효율을 추구할수 있다. 규칙의 변동성이 커질수록 효율은 무용해진다.
그냥 간단하게 모든 행동에는 목적이 있고, 그 행동의 결과에 대한 평가는 그 목적에 얼마나 도달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아닐까 효율적인 만찬, 사과, 음악이 있지. 그러니까 맛있는 만찬과 사과는 칭찬을 받고, 바흐는 명작으로 칭송을 받는 거지. 음악을 2배속으로 듣는게 효율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청각적 쾌감을 극대화 시키는 방법은 있지.
화성학과 대위법이 왜 있겠음 ? 청각적 쾌감을 일으키는 음들의 효율적인 배치가 있다는 것이 아님 ? 물론 문제는 사람들마다 그 청각적 쾌감이 미묘하게 달라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일반인들 정도의 보편감각에서는 잔세계적으로 비슷하니까 바흐가 좋은 음악으로 평가되겠지
내가 말안하고 까먹은게 있는데 시불변성과 시변성임. 시변성이 더 큰 곳에서는 효율은 무용해짐. 무작위한 현실은 시변성이 크고, 규칙으로 정해저 있으면 시변성이 적어짐. 그래서 이해관계 사고체계의 규칙내에서는 효율이 잘보이지만, 현실은 규칙이 모호한 부분이 상당하기 때문에 효율은 따지기 어려움. 다시 말하면 너가 언급한 평가라는 단어조차 시불변성이 크냐 시변성이 크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얘기. 인간은 보통 시불변성을 중점으로 두고 규칙을 엄정하게 두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고. 공자의 말로 바꾸면 예(예절)은 시불변적이고 엄격한 느낌이 강하고 악(음악)은 시변성이 큼. 이 둘의 조화를 다루려 했음.
물론 시변성과 시불변성을 염두에 둬야하겠지만, 사람의 행동에 목적에 있는 것과 글을 읽고 이해하는 작업에는 시불변성이 매우 큰 것 같음. 현대 사회에서 어떤 글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시변성이 매우 큰 것이겠지. (음악도 유행가는 시변하지만, 계이름은 시불변하잖음) 하지만 어떤 글이든지 그것을 읽고 이해하는 작업은 보편적인 개선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야. (몇백년 전이나 읽는 문서는 달라도, 읽는다는 행위 자체는 시불변하니까) 그리고 그것을 먼저 경험하고 교정할 만한 참고점들을 정리해놓은 선배들에게 배울 수 있으면 배우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음.
물론 글을 쓴 취지도 이해가 되고, 그 부류의 책들이 맹탕인 책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잘 고르면 보고 배울 만한 책들도 분명히 있음. 효율적인 정보습득이라는 방법론을 경시하는 것이 더 좋은 독해 능력, 뿐만 아니라 감상능력 등등을 길러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