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였는지 어떤 목적론적 자세를 너무 중요시 하는 경향이 있는데

물론 목적의식도 중요한데. 

거기에 매몰되어서도 안됨. 


목적론에 집착하면 문화가 사라져 버림. 

나의 목적에 방해되는 것은 이교도의 무의미한 행위가 됨. 

사물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짓게 했다는 문장에선 어떠한 목적론을 발견할 수 없음. 

상대를 위해? 나를 위해? 시를 짓는다? 이와 정반대되는 시각이지.


시나 예술은 말로도 표현이 안되는 무언가가 있다는걸 말해준다고 가정한다면. 

이 전제하에, 달성될 수 없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예절을 추구할땐 목적이 꽤나 분명하지만. 

예술을 추구할때 목적이 분명하지 않음. 

예악중에 하나라도 모자라면 사회가 불안정하다고 공자가 그랬었나? 


모든게 효율적이라면 법적 분쟁 및 논쟁도 없고 로봇이 판단할 수 있을것임. 

하지만 현실은 서로 다른 목적끼리 충돌하고 효율이란건 매우 특정된 부분에서 한정되어 나타남. 

규칙이 바뀌면 효율적인 방법도 바뀌는게 다반사다.

목적의 다양성은 효율은 매우 협소하게 나타난다는 반증이라 할수 있다.


목적이 뚜렷한 효율적인 인생, 합리적인 결혼이 가능할까?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쓴 맛을 봐야 단맛을 더 잘 알게 된다. 

결국 효율은 비효율은 겪어보고 고치는 과정에 가깝다.


아주 긍정적인 상황으로 가정해서, 

삻에서 어떤 단맛만 계속 느끼고 남들이 그게 효율적이라고 평가한다고 

내가 효율적인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확신하는데 단맛만 느낀 사람은 결국 또 다른 맛을 찾아 갈것임. 

그 과정에 인생이 있는거지. 


인간은 로봇이 아니기에 목적만으로 살 수도 없다. 

그래서 시와 문학 예술이 있는거라 본다.


근원적 행복이 소유라고 믿는다면 목적론적 경향이 강해질테고, 

존재라고 믿는다면 목적론적 경향이 덜해 질꺼다. 

이 둘 사이를 오가는게 인간다움아닐까?


무목적성의 중요성을 너무 도외시 하는 것도 좋지 않다.

인간은 예측가능성을 너무 숭배한 나머지 목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믿고 싶어하더라. 
이거 꼬집은게 최근에 까뮈 이방인 아닐까 싶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