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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국어를 잘한다고 인식하는 순간에,
그 사람은 순간적이지만 반-자유주의자가 된다.
표준화법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힘으로 타인에게 화법을 강제할 순 있다.
자유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국어(또는 무엇)를 잘한다는 말을 꺼리기 마련이다.
당신이 보기엔 명문인 글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자.
결국 남이 알아주면 잘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못하는 것이 된다.
자유는 타인에게 의존할수 밖에 없는 것일까?
국어는 일종의 약속이고,
반대로 자유는 무질서를 더 추구한다.
이를 더 극단적으로 확장하면 잘한다/못한다라고,
분류하는 행위는 무질서를 질서로 만드려는 행위가 된다.
자유와 방향이 다르다.
인간이 정말 자유를 원했다면, 글자를 잘 몰라도 잘 살수 있는 사회를 설계하려 하지 않을까?
이제 아큐는 미개한 사람일 뿐이다.
누군가가 언어를 배우기 극도로 싫어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법을 모른다. 그저 돈을 주고 받고 거래할 줄은 안다.
그는 멀리 타국으로 물건을 팔러간 상인 일 수도 있다.
그는 자유로울까?
독서를 하면
당신은 해외로 아니 더 멀리 저자를 만나러 가는 상인이 된다.
상업에 참된 표준이 있을지 생각해보라.
자유는 언어와 상극이다.
하지만 언어를 상대하기 위해 자유도 언어를 사용한다.
일정부분 자유를 포기하면서 싸운다.
자유의 어느 부분을 포기할 것인지는 저마다 다르다.
사회는 표준어로 인간을 길들인다.
돈에 꼬리표는 없지만, 언어는 청구서가 매우 길다.
문명은 이 두가지 도구를 동시에 쓴다.
예수와 부처가 만나면 어떤 대화를 할까? 그들에겐 언어가 필요할까?
선악과는 기호와 조개껍질 이었나?
과거 학자들은 글을 쓰면서 스스로 자유를 억압하는 말을 만들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까?
명문화된 자유는 자유가 아니게 되는 게 아닌가?
수십 수만자의 기록으로, 각자 저마다 만신전의 신이 되길 바랬던 것일까?
신이 되고 싶은 마음에 고집을 부렸던 것일까?
언어가 말소되어야 할때는 언제일까?
글은 불멸에 대한 애착일까?
뜻을 잘 알아 '듣는사람'이 먼저일까, 뜻을 잘 '전달하는 사람'이 먼저일까?
최초의 활자를 쓴 사제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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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여기까지....
산책좀 했더니 오늘 이상하게 뻘 생각이 폭발하네.
나중에 좀 더 정리하면 흥미로운 썰을 만들 수 있을꺼 같다.
물론 과거 사람들의 생각을 더 뒤져봐야 하겠지만
뻘글의 완성을 위해.
독서, 글, 언어에 관한 썰 좀 알려주면 고맙겠어.
대부분의 윤회 세계관에서 기본적으로 깔고 가는 두 가지 개념이 있음. 하나, 존재는 윤회 과정에 묶여 있기에 고통받는다. 둘, 묶임에서 벗어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 즉 완전한 자유이다. 뜬금없이 윤회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면, 글쓴이가 적은 자유-무질서/분류-질서의 구도가 윤회 세계관에서는 역전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거든. 좀 더 자세히
써 보겠음. 불교 승가 안에서 출가자는 계율을 지킬 것을 요구받음. 실라(계)/위나야(율)라고 하는데 실라는 마음가짐, 도덕에 대한 바른 태도 같은 것이고 위나야는 출가자라면 지켜야 할/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규정해놓은 것임. 그러니 위나야는 아마도 무질서보다는 질서에 더 가깝겠지. 하지만 부처님께선 위나야가 세상에 어떤 빚도 지지 않는 몸가짐이라 하셨음.
율을 지키는 자는 어떤 빚도 지지 않기에 가장 자유로운 자라는 거지. 음.. 내가 불교를 믿고 있어서 그런가 나는 부처님의 설명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받아들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네. 그러나 어쩌면 자유는 언어 너머에 있어서, 언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게 아닌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
사실 윤회 과정 내에서는 자유를 선언하는 게 의미가 없거든(아라한이 아니라면 말이지). 윤회 과정에서 벗어나는 것(열반)이 아니라면, 적어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그런 길(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은 없거든. 자꾸 불교와 고통 이야기로 빠져서 미안한데 쓰다보니 일케대네.. 세간적 자유는 고통에서 해결하지 못하지만 출세간적 자유는 가능하다, 그
리고 출세간적 자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질서잡힌' 마음/몸가짐으로써,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때'가 아니라 '해야 할 것을 하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을 때' 가까워진다. 이걸 말하고 싶었음.
율은 언어보다 뜻에 가깝다고 보이는걸. 질서 무질서로 자르기 힘들어 보임. 내가 말한 질서는 불변에 가깝고 상대적으로 고정된 질서 같은걸 말함. 똑같은 행동이라도 상황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면 질서라고 부르기 어렵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한다라는 율을 존재할 수 없다고 보고. 너무 고통스러워 죽게해달라는 희귀병 환자를 억지로 살린다는 건 율이 아닐거 같거든. 문득 댓글을 본순간 집이라는 개념이 떠오르네. 유목과 농경. 집이 없는 상인이 상징적으로 떠오름.
율은 굉장히 엄격한 질서를 가진 행동의 제한임. 부처님께서는 명백한 악업을 짓는 행위(정확히는 4악처에 떨어지는 행위)가 무엇인지 말씀하셨음. 또, 아난따리야 깜마라고 해서 다음 생에 무조건 지옥에 떨어지는 굉장히 질이 좋지 못한 행위(부모를 죽이는 것)도 언급하셨음.
이게... 불교의 개념이라는 게 어느 하나만 따로 떼어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보니까 계속 네가 잘 알지 못하는 개념을 내가 막 끌어와서 설명하는 것 같네.. 이러면 별로 대화가 될 것 같지 않기도 하고.. 업과 보의 원리는 조건성을 가지니 질서치고는 꽤나 유연한 편이지만, 조건이 갖춰지면 '반드시' 업에 대한 과보를 받게 되는 절대적인 면도 있음.
승가(정확히는 네 단계의 성자들)는 부처님을 향한 '절대적인', 그러나 강요받지 않고 이해에서 출발하는 자연스러운 경의감과 같은 형태인 믿음을 가짐. 왜냐하면 그들이 접한 담마가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것을 직접 스스로 보아 깨닫게 되기 때문임. 그런데 이런 깨달음도 평범한 사람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로 보일 수 있다는 걸 나도 앎. 그래서 이건 믿음의
문제이니까.. 더 길게 이어가지는 않겠음. 먼가 대화 대신 개념설명의 연속이 될 것 같음.. 이건 내 문제인 거 같음. 내가 이미 불교 안으로 들어가버려서 그런지 불교 밖으로 나와서 사고하는 게 잘 안 되는 거 같음.. 암튼 독서 노트 좋게 잘 봤음 개추박앗음
지금 내가 쓴 거 다시 읽어보니까 ㅈㄴ 이상하긴 하네.. 생각하면서 계속 댓글을 쓰다가 지웠다 하다가보니까 머릿속에서 생각한 거랑 써놓은 거 사이에 의미 간격이 너무 커진듯함
그런 율은 굳이 안들어도 배우지 않나? 부모를 죽이는 문화를 가진 개체가 있나? 그런 율은 생득적인 영역이지. 무엇이 최선인지 판단이 안되는 경우, 이 경우에 사회의 질서를 들이밀 때를 바라보는거지. 자유와 질서가 어떻게 충돌하는건지. 글을 배우기 싫다고 하는 아큐가 율에 어긋나는 행위일까? 이건 명백히라고 하기 어려운 문제지. 그렇다면 아큐에게 자유와 질서는 어떤식으로 다가오는가? 율은 매우 한정적임.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말을 논할 이유는 없지. 과거에 글을 못배웠던 사람들은 부처의 가르침이나 뜻을 오해했거나, 몰랐을까? 그런 뜻(율에 가까운 것들)은 문자 없이도, 사회에 속한 인간이라면 자연스레 배웠을거임 내가 말하고자 하는건 자유와 질서의 경계 부분임.
정당성이나 명백함을 알리려는데 쏟는 노력이, 자유와 질서가 갈등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가 될거 같다. 아큐처럼 말이 안통하는 실제적인 사례는 집시가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봄. 이게 율을 어긴걸까? 이를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하려면 머리 터질거 같긴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