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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는 실질적인 중요도에 비해 대중적인 인지도나 관심이 크게 떨어지는 지역이라고 생각해. 인도네시아가 약 2억 7천만의 인구를 보유한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라는 사실이나 말루카 해협이 중동에서 한국으로 수입되는 석유가 들어오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라는 사실 정도만 간간이 회자될 뿐,  유럽이나 미국 여행이 여의치 못할 경우 어느 정도 기대를 접고 대체물로 택하는 B급 관광지나 결혼하기 어려운 농어촌 남성들이 신부를 데려오는 못 사는 동네 정도로 인식하고 폄하하는 시각이 아직까지는 상당히 큰 것 같아.



뭐, 여전히 해당 국가의 GDP 크기로 외국인을 어떻게 대할지 판단하는 경향이 남아 있는 우리인 만큼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 난 지금까지도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가난한 건 날씨가 더워서 국민들이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들의 일차원적인 개드립이 생생하게 기억나.



이렇게 동남아시아 지역을 근거 없이 낮추어 보는 경향은 관련 서적 시장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아. 오랫동안 이 지역 국가들의 역사를 제대로 풀어 쓴 국내학자의 저서는 유인선 선생님의 《베트남의 역사》가 거의 유일한 책일 정도였지. 반갑게도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사정이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야.



이 책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크게 대륙부(인도차이나 반도)와 도서부(인도네시아, 필리핀, 동티모르, 브루나이 등 섬 국가)로 나누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기간을 차근차근 되짚어주고 있는 국내 최초의 통사책이야. 물론 많은 나라들을 시기별로 병렬적으로 다루고 있다 보니 필연적으로 맥이 끊긴다는 단점이 있어.



게다가 흡사 러시아 문학을 처음 접했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숱한 현지 인명과 지명의 압박, 근현대사 파트로 넘어오면서 보게 되는 각종 단체명(근현대사 독립운동 파트를 배울 때 외우게 되는 각종 독립운동단체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거야)은 800 페이지에 달하는 볼륨과 함께 본 책을 쉽사리 완독할 수 없게끔 방해하는 난적들이야.



그렇지만 일단 책을 읽게 되면 요즘도 뉴스나 신문 지면에 종종 등장하곤 하는 시사 이슈들의 뿌리가 어디에서 온 건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될 거야. 1988년 민주화 혁명에 성공했다고 하는 미얀마에는 어째서 지금까지도 군부의 영향력이 잔존할 수 있었는지, 영화 《액트 오브 킬링》, 《침묵의 시선》의 배경이 된 1960년대 인도네시아 군의 자국민 학살 사건의 전말은 무엇인지, 한때 말라야 연방(말레이시아)의 일원이었던 싱가포르나 연방 가입을 타진했던 브루나이는 어째서 오늘날에는 연방 가맹국이 아닌 것인지, '식민지의 식민지'였던 동티모르는 어떤 과정을 거쳐 독립할 수 있었는지, 필리핀 사회 분열의 뿌리인 남북 갈등의 기원은 무엇인지 등 다양한 쟁점들의 이력을 알 수 있어.



물론 좀 더 알고 싶다면 각 나라별 통사책을 별도로 읽어야겠지만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역사에 입문하고자 할 때 이 책보다 좋은 선택지를 찾기란 쉽지 않을거야. 영어 능통자라면 경우가 다르겠지만.



다음에 집에서 읽을 벽돌책은 교양인에서 나온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