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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이야기식입니다 과거에 올렸던 글을 다시한번 재업합니다)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에는 과거의 지성인들과 맞날수 있는 터널이 있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터널을 알았다.


과거부터 스페인의 신비주의자들만이 이 통로를 통해서 과거의 인물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했다. 그 과거의 존재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았으며 터널안에서 자기네들끼리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A라는 사내가 이 통로를 알아냈다. 그는 부유한 사내였으며 지적인 사내였다. 그러나 그는 세계의 수많은 지성인들과 학자들을 찾아갔지만 찾아낼수 없는 어떤것을 찾기 위해서 이 터널을 찾아왔다.


그가 만난 사람은 우나무노라는 철학자였다. 그는 어떤 고민을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초조함과 불안이 감돌았다. 그의 영혼의 불안을 나타내듯 그의 얼굴에는 사색이 보였다.


두 사람은 차가운 은색 탁자에서 앉아 있었다. 우나무노는 포근한 황색 가죽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청색 의자에 앉아서 있었다. 그둘의 방은 아주 밝은 햇빛이 들어서고 있었다. 만약 어떤이가 그 방에 있었다면 그는 이 방이 어떤 동굴임을 모를 것이었다. 방 곳곳에는 과거 바로크 귀족들이 사용했을 것 같은 여러 가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방은 아주 따뜻했으며 벽난로가 있어서 방은 더욱더 아늑한 분위기를 품기고 있었다.


우나무노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탁자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우나무노가 그가 온것을 알자 그에게 인사를 하고 그에게 온 이유를 물었다.



"친애하는 교수님 저는 어떤 고민이 있답니다. 지금 말하는 도중에도 이것을 생각하면 공포가 느껴지고 불안이 느껴집니다.


저는 과거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왔습니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저명한 인사들 사이에서 기독교의 허구에 대해서 아주 놀라운 주장을 하더군요.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기독교의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중 가장 저명한 러셀 경이 말하길 신의 존재는 우주를 떠다니는 주전자에 불과하며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말하길 신의 존재란 차고속의 용에 불과하다고 하더군요. 그들의 말이 맞다면 기독교의 신이란 실증적 과학 논리성의 부분에서 성립할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답니다. .


기독교의 진리란 무엇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사실일까요? 아니면 사실이 아닐까요?



그 사내의 질문을 듣고 우나무노는 자신의 과거를 떠울렸다.


젊은 시절 그는 황야에서 신을 찾았지만 그의 존재의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지속될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일이었을 뿐이다.


우나무노는 과거의 회상은 그만두고 그 사내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가 날 찾아왔으니 어떤 답변을 원하겠지 아마 자네는 어떤 긍정을 원해서 왔을수도 있고 어떤 부정을 원해서 찾아왔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자네한테는 아주 미안한 이야기지만 말이지만 나 또한 이 문제에 대해서 답변을 해줄수 없네


그러나 내가 알기로 지금의 기독교란 종교를 변호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나는 그들을 소개해줄수 있네 지금 내가 대화를 나눈 상대들만 나열해도 말이지 아주 많다네


인도인 기독교인 라비 재커라이어즈 분석적인 영국인 친구 C.S 루이스 그리고 더 있지만 생략하겠네 아무튼 그들한테 가보면 될것이네"



그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 분들의 글들을 이미 다 읽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의문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 분들의 논증이 틀려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의 논증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어떤 의문이 기독교에 대한 의문 신성에대한 의문이 계속 들고 있으며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우나무노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그 사내에게 답했다.



"이해하내 솔직히 나 또한 그들의 논증에서 어떤 위로를 얻지는 못했지 내 생각에 그 친구들은 말이지 틀리지 않았어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주장에서 어떤 위로를 얻지는 못했지 그 이유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말하는 신이란 말이지 철학자들의 신 박제된 신이지


신이라 우리에게 신은 누구일까? 모든 원인의 시초자일까? 도덕의 창조자일까? 우리를 먼곳에서 보는 비인간적이고 비감정적인 존재일까?


철학자들의 신은 이런 식이지 소위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논리적인 신학자들의 신은 이렇지.


그 어떤 감정도 가지지 않았으며 그저 무정하게 세계를 창조했으며 그 어떤 논리적인 모순도 없는 신 생명이 없는 신 박제된 신 이것이 아리스토렐레스 학파나 자유주의 개신교 학파들의 신이지.


생명이 없는 신 그저 박제된 신 이것이 바로 소위 변증 신학이라 불리는 자들의 신이지. 이런 신 어떤 감정도 없으며 인격도 없으며 고통이나 사랑을 하지 않는 신 이것이 바로 박제된 생명이 아닌 신이지"



그 사내가 항의하듯이 우나무노의 견해를 비판했다



"C.S 루이스나 크레이그 교수의 저서를 읽어본다면 그런 생각이 틀렸음을 알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초월의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런 논증들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믿는 신이란 지금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신 생명을 가진 신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C.S 루이스의 저서에서 말하는 신이란 감정을 가지고 인격을 가진 인격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런 논증들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신을 옹호하기 위해서 그런 논증을 한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변증을 통해서 그들을 옹호하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신 논증을 통해서 초월의 길을 열고 나서 부활논증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신을 구하지 않았습니까?



우나무노는 사내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는 회의적인 어투로 사내의 주장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자네의 말이 맞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인간들이 가장 원하고 추구하는 무언가는 말이지


그러니까 자네가 이렇게 고뇌하고 고통을 겪는 이유는 말이지 형이상학적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 문제이지 바로 자네와 나 그리고 모든 인류의 최후의 문제에 관해서지


자네 말대로 그들은 지금 그리스도교의 신을 부활 변증으로 정당화 시키네 그러나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느끼는 회의론적 목소리 말이지


내가 늘 소위 이성이라고 불렀던 그 목소리 결국에는 톨스토이와 카뮈라는 희생자를 낳은 그 목소리는 우리의 이런 형이상학적 논증들 부활 논증들을 비웃고 있지


놀리고 있지 그러니까 우리의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이 이성이라고 불리는 실증적 이성이란 말이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활의 증거를 비웃고 있는 이 의지는 우리한테 회의를 품게 만들지 우리한테 불신을 갖게 만들지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기독교 변증가들의 이야기를 경청해도 우리는 선택을 해야되네 예수라는 사내가 부활했다는 믿음의 도약을 하거나 아니면 그러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하거나 말이지 우리한테는 늘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하지


그러니까 자네가 나한테 왔겠지 우리가 느끼는 이 직관과 우리가 느끼는 세상의 부조리는 결정적인 증거의 부재는 우리에게 이 세상의 부조리를 느끼게 만드지"



우나무노의 말을 듣고 그 사내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는 자신의 끝에대한 공포와 위로를 찾지 못했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저명한 우나무노 선생이란 사람은 결론적으로 그어떤 위로를 주지 못하는군 내가 아는 수많은 무신론자들 수많은 유신론자들과 똑같이 말이야 그는 과거를 회상했다 과거 자신의 조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에서 명망 있는 교수와의 대화를 말이다. 그 교수는 자신한테 어떤 위로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교수한테 여러가지를 물어보다가 그에게 죽음의 허무함과 부조리에 대해서 묻자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과거 나 또한 그 문제를 생각했지만 나는 논문을 쓰고 책을 읽느라 그 문제를 잊고 산다"


그의 대답은 철학자가 된 사람의 잔인할정도로 정직한 대답이었다. 그 후 그는 철학 교수들에 대한 신뢰를 버렸다. 인간들은 누구나 현실도피자다 그 누구도 예외일수 없다 그러나 진정 정직한 지성인 이라면 투쟁을 하러 가야한다. 비록 그것의 결과가 절망일지라도 말이다.


그가 우나무노에게 항의하듯이 말했다.



"친애하는 선생님 그럼 당신의 결론은 비극이군요. 당신의 이야기는 결과적으로 인간들은 이 절망에서 벗어날수 없으며 그저 끝을 기다리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군요. 당신은 늘 절망만을 이야기하죠. 그리고 대안은 존재하지 않죠. 당신의 주장에는 그저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한탄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 조차도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 기독교를 사실인것처럼 살며 기독교의 진리를 옹호하는 것은 처세술의 일종인 것인가요? 그저 스페인의 못배운 사람들을 속이고 이익을 얻고자 하는 속물적 마음에서 지금까지 이 허위를 옹호해온 것입니까?


아니면 그저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 남들한테 자신조차도 믿지 못한 진실들을 옹호해 온것입니까? 당신이 니체를 비판한 이유는 불신을 감추기 위해서 입니까?


결국에는 다 사라지고 말겠죠. 결국에는 우리가 무를 알게 되겠죠. 우리는 세상 자체가 악몽이며 부조리의 세계임을 체감하게 되겠죠."



우나무노가 마시던 커피를 마시다 말고 슬픈 표정으로 그 청년을 보았다. 청년의 이 절규에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인간들의 지금의 상황에서 슬픔을 느꼈다. 카뮈의 말대로 인간들은 그저 시지포스처럼 그저 돌을 나를 뿐이다. 그것은 영원한 형벌이다. 세상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 처럼 "아버지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쳐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나무노는 이성적으로 어떤 위로를 가지지 못했다.


그의 내면에는 아주 차갑고 얼음장 같은 어떤 회의가 있었다. 그의 내면에 있는 직관이 아무리 외쳐도 그 불신 초월에 대한 불신은 그의 안에서 그에게 계속 냉소를 짓게 만들며 그를 비웃게 만들고 있었다. 우나무노 한테는 그러나 그런 이성을 잠재울 방법이 없었다. 그에게 신앙이란 끝없는 투쟁일 뿐이었다. 고통과 고뇌는 계속된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 앞에서 할 유일한 방법은 그저 투쟁을 할수 밖에 없없다. 마치 미친 기사처럼 거대한 부조리라는 벽에다 돌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떤 감정적인 외침 그 어떤 감정적인 희망을 알았다. 그가 청년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버려짐 우리는 부조리를 느끼지 이 세상이 우리한테 적합하지 않다는 그 느낌 무언가 중요한게 빠졌다고 느껴지는 그 느낌 말이지 나는 이 감정을 삶의 비극적 감정이라고 부르네


나는 의문을 품고는 하지 왜? 인간들은 부조리를 느낄까? 그러니까 그것이 끔찍해서? 하지만 우리가 말이지 사자가 양을 잡아먹는다는 뉴스를 들을때 부조리를 느끼는가?


우리가 몸에 상처를 입을때 부조리를 느끼는가?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에 부조리를 느끼는 어른들은 없지


세상에 끔직한일이 일어난나고 부조리를 느끼지는 않지 우리는 무엇이 정당하지 않을때 이치에 맞지 않을 때 부조리를 느끼지


왜 우리는 무언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느끼는가?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이 부조리란 감정은 참으로 비합리적인 감정이지 우리의 죽음은 사실 아주 정당하고 당연한 사실이야 근데 우리는 부조리를 느끼지 카뮈가 말한 부조리 예를 들어서 정의의 궁극적인 패배나 시지포스가 돌을 나를때 느끼는 부조리란 합리적이지 않지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이 부조리를 느끼지 나는 이 부조리를 느끼는 이 느낌의 근원을 의지라고 믿네 우리의 아주 깊은 곳에는 아주 원초적인 그 곳에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또한 정의의 궁극적 승리를 믿고 죽은 소중한 사람들과 다시 만나길 기대하네 과거 영국의 유명한 시인이 이런 글을 남긴적이 있지


"우리가 그저 고통을 받고 사라지기 위해서 이곳에 태어났을까? 아니! 분명 아니다 우리의 사후에 무언가 있어야한다. 그런 느낌이 든다"


우리는 어떤 느낌을 가지지 그러니까 아주 비합리적인 느낌인데 말이지 사후에 소중한 사람들과 대면하는게 당연하고 일어날수 있는 일이라고 믿지 그러니 우리가 어렸을때 신비를 잘 믿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리고 비극적인 것은 우리안의 어린아이는 아직도 우리한테 외치고 있다는 것이지 현생이 끝이 아니고 이 세상의 무언가 초월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말이지 이것은 어떤 합리성에 기댄게 아니야 그러나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느끼는 이 부조리의 부당함과 우리의 운명에 합당한 것이 기다릴 것이라는 이 희망은 그 이성적 회의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있지"



그 사내는 생각했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것인가? 결국에는 우리가 느끼는 이 직관이란 것이 어떤 증거도 될수 없다. 우리의 직관이 아닌 이 세계에 대한 과학적인 합리적인 설명들을 믿어야한다. 문제는 그것들은 위로가 되지 않는 다는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위로를 얻지 못한다해도 우리는 비참함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것이 힘들지라도 말이다. 인간들은 어떤 위로를 얻기 보다는 비참함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사내의 내면에는 어떤 망설임 공포가 있었다. 사내는 자신이 그렇게 살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 누가 이런 무신론적 철학을 늘 진실되게 받아들일수 있을까? 누가? 죽음의 공포에서 몸을 떨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누가 자신의 운명이 2개의 어둠 사이에 있는 촛불이라는 것에 부조리를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부조리를 느끼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우리의 운명은 정당하다 그러나 사내의 내면에는 어떤 외침이 있었다. 인정할수 없다는 외침이 있었다. 사내는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안다. 그러나 사내의 의지는 계속 희망을 원하며 위로를 원하며 이 세상의 무언가 희망이 있으며 초월이 있음을 진실되게 믿는다. 이것이 사내의 부조리였다.



사내가 생각을 그만두고 우나무노에게 비꼬듯이 답했다



"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쩌피 우리의 망상일 뿐인데 말입니다. 믿는다고 실제가 된다면 이 세상 사람들이 힘든 일이 어딨습니까? 당신의 철학은 맹목적인 믿음이자 행복을 위한 신앙입니까? 그리고 당신의 철학은 환상속에서 위로를 찾는 망상이군요.


그러니 아주 이기적이고 비겁한 신앙이군요.


이러면 그 예수쟁이들과 무엇이 다른거죠?



우나무노는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사내는 지금 우나무노의 지적인 정직성을 비판하고 있었다. 우나무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하고는 한다. 그러나 우나무노는 늘 광신성을 만든 가톨릭 교회를 혐오해왔다. 그러나 사내의 주장도 틀리것은 아니었다. 우나무노는 커피를 마시며 사내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될까 고민을 했다. 그렇게 몇분이 지나고 우나무노는 드디어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표현하기로 결정했다.



우나무노가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믿음 확고한 믿음 그리고 깨지지 않는 영원한 믿음 내 눈에는 이렇게 보이지 믿음인체 하는 낙담 신뢰인체 하는 불신 굳건한체 하는 기만 이라고 말이지 우리 인간들은 이런 믿음을 가질수 없어 그러니까 말이지 그런 믿음이란 말이지 허상이라고 할수 있지 내가 느끼기에 진정한 믿음이란 말이지 예수를 부정하면서 그에게 기도할때 드러나지 참된 믿음이란 진정한 불신 속에서 발견되지 인간이란 말이지 솔직해야 된단 말이지 비록 그게 인간들의 천성은 아니지만 말이야 내 말이 모순된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진실이야 만약 제대로된 신앙인이 예수를 불신하지 않는다면 사후생을 불신하지 않는다면 그 것은 신앙이 아니야 그저 죽어있는 신앙이지 그가 불신속에서 괴로워 하지 않는 다면 그에게 신앙은 아무것도 아니지 신앙이란 어떤 희망이야 어떤 소망이야 그것은 인간들을 구원한겠다는 어떤 목수의 죽음으로 인해서 생긴 하나의 모순적 희망이지


과거에 예수가 귀신들린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의 집에 갔지 그때 그의 아버지가 빌길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저의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주십시오"


다른 말로 이런 말이지 "오 주여 믿습니다, 저의 불신에 구원을 내려 주십시오"


언뜻 보기에 이것은 모순이지 만약 굳센 믿음 누구부다 굳센 믿음을 갖는다면 어찌해서 자기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하나님에게 도움을 구한단 말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은 귀신에게 들씌운 자의 아버지 되는 자의 오장육부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외침소리에 가장 심오한 인간적 가치를 부여하지 그의 신앙은 불안을 기초로한 하나의 신앙이기 때문이지 왜냐하면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믿기를 원하기 때문이지.


그의 아들의 병이 치료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지.자기의 불신, 즉 치료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근절시켜달라고 하나님에게 청하기 때문이지.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지


너가 말한 자들의 신앙은 일종의 불신앙이야 그러니까 생각하지 않는것이지 무조건 신을 믿고 그의 팔에 몸을 맡기라는 말은 좋아보이지만 생각하지 않는 불신앙을 뜻하지 그런 신앙 그런 예수쟁이의 신앙은 사실상 무신앙이지 자네 말대로 어떤이는 이렇게 말하지 신이 필요하니 신을 발명하자 내가 보기에 이것은 사회 고위층들의 세련되지 못한 불신을 뜻하지 아무튼 이 말은 말이지 내 주장의 정반대이야 만약 자네의 말대로 내가 환상을 원한다면 왜? 내가 책의 제목을 삶의 비극적 감정이가고 적었겠는가? 그리고 내가 왜? 그리 많은 미신적인 강령술이나 그런 것들을 믿지 않았을까? 나는 늘 나의 이성에 솔직하게 살고 싶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우리한테는 어떤 인정하거나 받아들일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그러나 이성은 절대로 이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아 내 신앙은 이 둘의 전쟁 상태 그 자체를 의미하지


지금의 철학 지금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 실증주의 증거를 요구하는 과학은 우리의 이런 형이상학적 가정인 영혼불멸의 불가능성을 증명한다네.


그들의 논리는 간단하지. 내가 없었던적이 있다.그 때는 내 육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이다. 내육체는 사라진다. 결론 우리는 죽는다.


이 잔인하면서도 논리적인 선언은 우리를 절망으로 밀어넣지.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이 과학은 영혼의 비존재를 확실히 증명한 것 일까? 이 과학은 우리의 신이나 영혼불멸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일까?


이때 우리는 앞서 말한 불확실한 희망을 갖게되지 그리고 그 희망의 근원은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부조리의 반응이지 그러니까 우리의 최후가 무가 아닐것이라는 그 희망 말이지. 혹시 모르지 혹시 신이 있을지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은 이런 몽상을 비웃지.


없다는 증거가 없다고해서 그것이 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지 마치 차고의 용처럼 말이야.


나는 여기서 이런 가정을 하지



1.나는 죽고 사라진다 그러니 나는 무한한 절망에 빠진다


2.나는 죽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걱정이 없다.


3.나는 내가 죽어서 사라지는지 아닌지 모른다 그러니 절망이기도 하면서 희망이기도한다 마지막으로 남는것은 투쟁뿐이다.



만약 과학이 내가 죽고 사라진다는 것을 완전히 증명한다면 이런 비극적 감정은 존재하지 않겠지. 마찬가지로 신이 증명되거나 확실히 존재한다면 비극적 감정은 존재하지 않지.


그리고 만약 신이 증명된다면 신앙 또한 존재하지 않을꺼야


비극적 감정은 이 불확실성에 의거한 불합리한 희망에 기댄 일종의 불안이지.


그러나 과학적인 관점 우리의 이성적인 관점에서 이런 신에대한 주장을 수용할 수 없지 이 주장들은 논리적인 타당성이 없다네.


아무리 우리가 신앙이 이성보다 위라고 해도 우리의 이런 의혹은 사라지지 않지.


반대로 아무리 이성이 뭐라고 외쳐도 이 의지 죽지 않을려는 의지는 사라지지 않는거야. 이것은 비극이지 우리가 이성에 복종해서 이 열망을 포기했다면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이야. 그리고 우리의 이성이 의지에 복종한다면 우리의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이지. 그러나 둘다 서로에게 복종하지 않지. 아니 그럴 수 없어.


이 비극적 감정은 끝이 없는 고뇌의 연속인것이야.


이 고뇌에서 인간은 희미한 희망을 갖지. 그리고 이성은 그 희망이 거의 부질없다고 말하지.


여기서 우리는 둘다 만족시킬 수 없어. 그러기에 투쟁이지. 그래 투쟁이지


그래 나의 신앙이란 나의 믿음이란 나의 종교란 이런거지 찾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끝없이 지속적으로 진리를 찾는것 그리고 끝없이 싸우는것이지 미지의 것과 함께 말이지


자네는 기독교를 행복을 위해서 믿는다고 생각하다면 착각이야 어떤 기독교인이 진정 고통을 겪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는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야 위대한 우리의 스승인 그리스도가 죽기전에 외쳤지 "아버지 아버지 저를 왜 버리시나이까?"


기독교란 내면의 부름에 답하는거야 기독교란 끝없는 고뇌를 계속 하는거야 기독교란 고뇌의 연속이야 우리 인간들은 이것을 통해서 살아있음을 느끼지



우나무노가 말을 끝냈다.



그 청년은 주의깊게 우나무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어떤 해답도 대안도 아닌 그저 비극의 연장을 뜻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부터 해온 주장의 연장선이 었을 뿐이었다. 그는 우나무노가 답답하며 구닥다리임을 느꼈다.


사실 사내는 자신의 기대가 절대로 해결될수 없음을 잘 알았다. 그러나 그는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과거 칸트가 말하길 철학자는 형이상학의 문제에 대해서 불가지론을 선택해야한다고 말했지만 사내한테는 그런 주장이 일종의 도피라고 느꼈다. 인간들이란 늘 질문을 해야한다. 비록 그것이 해결이 안될지는 몰라도 인간들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 인간들이란 즉 이 땅에 살아가는 이 별종인 인간들은 절대로 이성이 허락하지 않은 포근함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이 절망을 발견한다해도 포용해야한다 그것이 바로 근대의 인간들이라면 누구나 해야하는 과업인것이다.



그 청년이 답답한듯 우나무노에게 물었다.



"그럼 당신의 결론은 끝없는 투쟁이군요. 이길수 있을지는 몰라도 끝없이 싸우러 가는게 당신의 신앙이군요. 그러나 문제는 신앙이란 증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지 않은 신앙은 그저 망상일 뿐이지 그렇죠 그저 망상일 뿐이죠. 당신은 어떻게 신앙의 근거를 찾습니까? 그러니까 신앙의 정당화를 어떻게 합니까? 당신이 과거에 말한대로 우리의 신앙은 이성이 필요합니다. 비록 그것들이 서로 전쟁 상태에 놓여있다고 말이죠.


당신의 주장은 오락 가락 하는군요. 어떨때는 근거없는 신앙주의를 주장하며 광신을 보이다가도 어떨때는 그런 광신을 비판하죠. 당신의 철학은 당신의 열망을 충족시키고 당신의 희망을 합리적인것처럼 보이는 자위행위에 불과합니다. 냉혹한 진실에 맞서는 초인이나 시지포스같은 정신을 갖지 못했기에 당신은 이렇게 모순적인 행동을 보이는게 아닐까요? 당신의 약함을 숨기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주장은 소위 말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 그러니 신앙의 도약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런류의 해결책에는 소위 말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더 알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의 주장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군요.



우나무노가 그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떤 해답을 그 사내한테 줄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고민하는 사내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그 청년의 말속에 있는 불신은 차갑고 얼음 같았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어떤 희망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불가능에 도전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소망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되었다. 그것이 불가능한 꿈일지라도 이길수 없는 악마라 해도 우리는 가야만 한다. 왜냐? 우리의 소망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할 운명을 위해서 말이다.



우나무노가 말을 걸었다



이 이야기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고 알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내가 아는 어떤 파이라는 청년이 있었지 그는 배를 타다 조난 당했고 바닷가 한가운데 있었지 그런데 말이지 그의 배에는 호랑이와 바나나를 타고온 오랑우탄,다리를 다친 얼록말이 같이 타있었지 그러던 하이에나는 다리를 다친 얼록말을 죽여버렸고 그걸 본 오랑우탄은 겁을 먹지 그걸 본 호랑이가 으르렁 거리자 겁을 먹은 하이에나는 잠잠해졌지만 이 하이에나가 그 새를 못참고 또 오랑우탄을 죽여버리지 파이는 하이에나가 아주 미웠는데 이 호랑이가 그 하이에나를 죽여버리지 공포에 떨었던 파이는 어떻게든 그 호랑이가 자기를 잡아먹지 않게 하기 위해서 호랑이에 먹이를 주며 그 동물을 길들이지 그러나 오랜 조난으로 인해서 파이가 희망을 잃고 죽기 직전까지 가자 그의 앞에 해초섬이 나타자지 파이는 그곳에서 물과 과일을 먹으면서 생존하지 그러나 그 섬이 밤에는 산성이 되어 미어캣들을 죽이는것을 보고는 그 섬에서 도망가지 그리고 파이는 구조선을 만나고 어떤 일본인들한테 구원받지


이 이야기는 믿기지 않지 우리한테는 말이지 사람을 끝까지 죽이지 않는 호랑이의 존재가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 그러나 우리가 그런 호랑이가 없다는 증거를 갖고 있지는 않지 혹시 모르지 그런 호랑이가 존재할지? 그리고 그의 모험은 아주 환상적이지 그리고 파이는 이 모험에서 어떤 교훈을 얻지 이 이야기는 아주 종교적이야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세속적인 일본인들이 파이에게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라고 요구했지 상부에 보고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보고할수는 없기 때문이지 그러자 파이는 또다른 이야기를 하지


폭풍우가 쳤고 생존자는 주방장과 다리를 다친 선원 바나나를 타고 온 어머니와 파이였지


주방장은 다리를 다친 선원은 어쩌피 오래 못 살태니 그를 죽이자고 하지 파이와 어머니는 그에게 구역질을 느꼈지 그렇지만 방법이 없어서 그 선원을 진짜로 죽이지 그리고 그의 시체로 낚시를 하면서 사는데 너무하다고 생각한 어머니가 그 주방장과 싸우지 주방장은 결국에는 그 어머니를 죽이고 그걸 본 파이는 그 주방장을 죽이지 이것이 이 이야기의 두번째 버전이야


먼저 우리는 이 두가지 주장들을 반박할 증거가 없어 파이의 이야기 중 하나는 분명 사실이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몰라 그러니까 이것은 신에 대한 이야기지 우리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어떤 것도 합리화할 증거가 없지 그러나 파이는 첫번째 사자가 나오는 이야기를 선택했고 일본인들도 사자가 나오는 이야기를 상관들한테 보내지 사자가 나오는 이야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종교적 관점이야 그러니까 우리의 삶의 어떤 의미가 있다는 믿음이지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워 인간들은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는 하지 사실 찾아낸다고 해야겠지


그리고 사자가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무신론적 이야기야 어떤 의미도 없지 그저 부조리한 실존적 실체 만이 있을뿐 파이의 주장 그러니까 나의 주장은 말이지 어떤 환상을 도입하자는게 아니야 우리는 사실 결정적인 증거가 없지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정당화할 증거도 없어 그러나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는 파이의 두번째 이야기를 부조리하게 느끼지 그러니까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느끼지 그리고 우리는 파이의 첫번째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이 느끼는 진실에 더 가깝다고 느끼지


사실 신을 믿는다는것은 어떤 초월적인 실체를 경험하는 종교적 체험이나 과학적 증거를 요구하지 않아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관점을 가지는거야 아니 발견하는거야 이 세상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지만 세상에 대한 이해는 달라지지 예를 들어서 우리는 역사를 해석할때 라든지 우리의 삶을 해석할때 그저 무신론적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보지 않아 우리는 우리 삶의 특별한 의미나 해석을 하지 그러나


우리의 해석은 주관적이지 그러니까 근거가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근거가 없는 그 사실을 믿지 사실이라고 만약 그러지 않다면 우리는 그 의미나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을꺼야 만약 너가 너의 의미가 주관적이고 근거가 없지만 믿겠다고 한다면 저네와 완전히 다르게 이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 (예를 들어서 근거 없이 이 세상을 종교적으로 바라보는 예수쟁이들이나 너와 다르게 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 히틀러나 스탈린) 이 옳다고 말해야되네


자네는 그런거에 동의할수 있는가?


우리가 믿는 의미들은 모두 만들어진게 아니라 발견해 내야되네 자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무서운 사자가 착한 무해한 동물이라고 자네를 의지만으로 설득할수는 없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세상의 의미를 발견하는 능력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지 종교란 이 세상에 느껴지는 그 느낌 마치 초월이 존재한다는 그 느낌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이야


이것이 종교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지만 모든것이 바뀌지


자네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의 해결책을 이야기할수도 있겠지 그러나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의 해결책은 말이지 멋지긴 하지만 문제가 많지 샤르르트가 말하길 인간은 스스로의 행동방식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만든다고 말하지 이는 그들이 무신론을 선택하는 객관적 일관성이나 정직성을 버리는 짓이지 삶이 허무하고 의미가 없다고 믿으면서 말이지 의미를 만든다는것은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그저 취향에 맞아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과 완전히 동일한 논리적 일관성과 정직함을 가질뿐이지 예를 들어서 히틀러가 세상에 부여한 의미가 있고 간디가 세상에 부여한 의미가 있다고 치자 누가 옳을까? 정답은 둘다 틀리다지 그러나 문제는 샤르르트가 이런 히틀러의 의미 부여를 비판했다는 거야 이것이 그의 주장의 문제지 나의 주장은 말이지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이 희망을 가진다는것이지 그러니까 나의 주장은 투쟁이지 우리는 그리고 이 투쟁에서 어떤 희망을 가지게 되지 그러나 그 희망의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 그러나 이 주장은 말이지 논리적 일관성이 있어 우리는 그저 모를뿐 틀린길을 선택하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지 그리고 우리는 희망을 가지지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비합리적인 부분까지 포용할수 있지 샤르트르의 주장은 스스로를 속이는거네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네 나는 아직도 의심의 바다에 있고 유신론이 맞는지 몰라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의심의 바다에서 희망을 믿고 있지 그리고 나는 이 세계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 허위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진실이라고 믿지도 않지


이것은 모순이야


그러나 희망 이지 그리고 그런것처럼 살지 왜냐면 진실일수 있으니까 말이지


그래서 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인 것이지



사내는 터무니없는 그의 말을 듣고 나서 기가 찼다. 그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스파게티 신을 믿거나 날아다니는 주전자를 믿는 것이었다. 사내는 이런것들의 반론을 듣고 싶었다. 어떤 확실성을 얻고 싶었다. 사내의 고뇌는 계속 그저 지속될 뿐이었다.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이 믿고 싶은것을 믿는것 뿐인 것이다. 그는 합리적인 결론을 가져오고 있지 않고 있다.


스페인의 지성인이란 늘 이런식이다. 종교재판이 횡횡하던 스페인의 지성인들은 늘 괘변을 말할 뿐이다. 인간이 그것을 부당하게 느낀다는 것이 어떤 증거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우리가 느끼는 부당성은 그저 학습이나 진화의 결과가 아닌가? 그러니 이런 해설이 가능한데 그는 초자연적인 해설을 할뿐이다.



사내가 그의 주장을 비판했다.



그러면 왜 기독교의 신을 믿는 거죠? 그리고 당신은 그렇다면 왜? 우주의 찻주전자가 있다고 믿지 않는 것이죠? 그리고 당신의 차고 속에서 용이 산다고 믿지 않죠? 이런 황당한 믿음을 믿는 이유가 뭐죠? 그리고 당신은 왜? 기독교의 신을 믿는 것입니까? 왜? 불교와 힌두교 같은 종교들을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저 취향 탓이라면 당신이 그저 종교를 만들어서 당신만의 신을 믿어도 되는 것 아닐까요?


당신의 주장은 헛점으로 가득찼군요. 당신이 왜 철학자인지 조차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주장과 다르게 이 부조리를 느끼는 감각도 그리고 초자연적인 느낌도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할 텐데 왜 그것이 증거가 됨니까?


그리고 당신은 그저 근거 없이 믿을 뿐이군요.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그어떤 합리적인 증거도 필요 없을테니 당신이 그렇게 비판하던 기독교인들과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우나무노가 그 사내의 말을 경청했다. 그 청년의 주장은 분노가 느껴졌다. 자신이 그에게 어떤 위로를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우나무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위로란 그러니까 우나무노가 갖고 있는 위로란 인생을 살아가는 투쟁 과정에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로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내가 말하는 것에 자기 나름대로 반론을 펼쳐야 한다고 우나무노는 느꼈다. 우나무노 나름대로 최대한의 지혜를 짜내어 사내의 주장에 대해서 대안을 주장해야 했다.



우나무노가 사내의 주장을 비판했다.



우주의 찻 주전자와 차고속의 용은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를 바꾸지 않지 그것들은 순전히 가정의 산물이지 그리고 우리의 천성은 그들의 존재의 부재에 부조리함을 느끼지 않지 그리고 그것들의 존재는 신의 존재와 달라 그것들의 존재는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을 바꾸지도 않지 이 세상의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지 그리고 우리는 신의 존재를 느끼지 아주 아름다운 에베레스트의 풍경이나 우주의 광대함에서 어떤 신비를 초월을 느끼지 그래 우리는 신의 존재를 느끼지 어떤 신비를 느껴 우리는 주전자나 차고속의 용을 느끼는 직관을 가지고 있지 않아 우리 인간들은 경기중에 어떤 징크스를 가지며 무의식적으로 기도를 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동물이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미신적인 것을 믿지 않는 자는 없어 그래 우리는 신을 초월을 신비를 느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말이지 그리고 아주 어렸을때부터 우리는 존재의 영원한 지속을 믿어왔고 상실을 부조리하게 느꼈지 위대한 철학자 샤르트르가 말하길 "한번 영원을 잃었다는 사실은 몇시간 몇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어린아이의 시각은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가 우리의 영원의 상실이나 우리의 위대한 문명이나 우주의 소멸에 부조리함을 느낀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직도 신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한것이지 이런 부조리함은 사실 정당한 사실이란 말이지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나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의 영원한 지속이 정당한 정의라고 믿고 있고 아직도 믿고 있지 아무리 우리의 소멸이나 부조리가 정당하다고 말한다해도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는 이것들이 부조리하다고 아주 깊게 믿고 있어


우리가 이렇게 믿는것은 사실 초월 신비 즉 신의 존재가 정당하며 그렇게 존재해야한다고 믿는것이며 사실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것이야 그러니 신의 존재는 차고속의 용이나 주전자와 완전히 다른것이지



우나무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네는 내가 기독교의 신을 나의 기호 때문에 선택했다고 믿는데 말이지 맞는 말이야 나의 기호 탓이지 그러나 모든이들의 기호 때문에 나는 기독교의 신을 선택했네


무슨 말이냐고? 한번 듣기나 하세



기독교의 희망이란 그리스도의 부활이지 다시 말하자면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로마군의 사생아인 그 소위 말하는 유대인의 왕 예수의 부활이지.


그리고 기독교의 희망이란 그리스의 지성인들 한테는 웃음거리였으며 하나의 광기였다고 할수 있겠지.


그러나 슬픈 사실은 우리를 미치게하고 울게 만드는 이 슬픈 사실은 우리의 절망의 유일한 해독제란 적어도 우리의 끝모르는 욕망의 유일한 해결책이란 이 비이성 비합리 아니면 초이성 초합리적인 이 종교란 말이다.



자네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 이 세상의 종교란 수없이 많은데 왜? 기독교 만이 유일한 해결책인가? 세상에는 불교,이슬람,도교,힌두교 같이 종교들이 참 많은데 말이지.


그 이유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사후세계가 아니고 우리가 원하는것은 이 세계의 갱신 영원한 승천을 원하지. 우리는 우리의 이 불쌍한 자아 이 초라하고 불품없는 자아가 생존하며 사랑을 하던 이 세계의 모든 것 가족 동물 숲 나무 물건 같은 것들이 영원히 갱신되길 바라지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사랑했던 것들을 다시 얻고 이 세계가 다시 한번 영원히 갱신되길 바라지. 우리는 바랬지만 얻지 못했던 것들을 얻기를 바라고 있지.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었다고 말하지 그러니까 이 세상 숲과 자연 그리고 우리가 사랑했던 수많은 물건들 우리가 사랑했던 수많은 생명들을 단절이 아닌 갱신시키기 위해서 그가 온것이지. 그러니 기독교란 진정 인간적 종교라고 할수있지.



불교에서는 말하지. 집착을 버려라 그리고 자아를 버려라


기독교는 외치고 있지 더 많이 사랑해라 더 집착해라 그리고 자아를 확대시켜라 영원히 확대시켜라



그리고 니체가 비판했던 플라톤주의가 이렇게 말하지. 이 세상은 불완전한다 이데아의 세계를 동경해라


기독교가 말하지 이 세상을 갱신시켜라 끝없이 속세의 삶을 사랑하라



기독교란 욕심쟁이의 종교야 현세주의자의 종교내


영혼의 불멸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것을 영원화 시키고 있지. 우리가 가졌던 모든것들을 우리가 동경하던 모든것들을 이루겠다고 약속했지.


니체는 기독교를 플라톤주의처럼 천국의 삶을 쫓는다고 비판했지 그러나 기독교란 이 세계의 갱신을 원하는 종교지 그러니까 그 어떤 종교도 이 세계를 전체를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어 그러나 기독교란 니체의 영원회귀를 멋지게 재탄생 시켰지. 그러니까 영원한 상승말이지 끝없는 상승 이 세계전체가 상승할것이야 소위 하나님의 나라에 다가갈것이야.



인간들이란 참 어리석어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공복과 아무리 얻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갖고 있으니 말이야.아무리 채울려고 해도 곧 사라지고 마는 굴레에 있지. 그러나 기독교는 약속하고 있지 외치고 있지 우리가 아무리 배고파도 채워질 무언가를 아무리 써도 사라지지 않는 어떤것을 인간들이 갈망했던 영원의 굶주림을 해결시켜주겠다는 것이야.


예수가 목마른 여인에게 말하길 자신이 곧 생명수이며 먹어도 먹어도 절대로 목마르지 않을 생명수라고 말하지. 그러니 만약 기독교가 참이라면 우리는 어떤 희망을 가질것이야.



그럼 자네는 이렇게 생각하겠지. 그래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저 기독교를 믿으라는 것인가? 그저 아무 생각없이 기독교를 믿으라는 것인가? 내 대답은 절대로 아니야 나는 단 한번도 눈먼 신앙을 옹호하지 않았다.


내가 옹호하고자 하는것은 그저 불확실의 신앙 가능성 없어 보이는 희망의 신앙이지


우리의 깊은 데 있는 이 갈망은 기독교의 부활만이 충족시켜 줄 수 있어 그러나 우리는 그 어떤 합리적인 발판도 가지고 있지 않아. 인간의 삶은 늘 그렇듯 비극이지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가 부활 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문서가 있지 이것은 확증이 아니야 그러나 어떤 희망이지 우리가 구원 받을거라는 어떤 희망을 우리한테 주지 만약 그게 맞다면 우리는 구원 받겠지 그러나 만약 그게 사실이 아니면 우리는 파멸하고 말겠지


그러면 자네는 나한테 그저 믿으면 되지 않냐고 묻겠지 그러나 나는 증거를 원하고 있네 아무리 종교인이 증거가 필요 없다고 외쳐도 우리의 내면에는 늘 증거를 요구하지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합리화를 원하고 있지 이것은 불가능 하지 그러나 우리는 끝없이 이것을 원해야되 그러므로 내가 나만의 종교를 만들지 않는거야 사실이 아닌 허위를 믿는것을 원하는게 아니야 진실된 위로를 원하지 그래서 나는 이 투쟁을 하러 가는거지 오직 투쟁만이 이 두가지를 만족 시킬수 있지


그리고 자네가 만약 우리의 이 부조리나 초자연적인 느낌이 과학적으로 설명할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네 동의한다고 말이지 그러나 이 세상에는 여러 해석 방법이 있네 신이 우리와 교류하기 위해서 이런 것을 심었다는 가설과 그저 진화의 결과라는 가설 말이지 다르게 말한다면 주전자가 열을 받아서 끓어오른다는 설명과 내 삼촌이 차를 마시기 위해서 주전자를 끓었다는 가설이 동시에 존재할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 이것은 해석하기 나름이지 그러나 이것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지는 않지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끝없이 신을 추구하는 이유는 되겠지


자네가 아직도 증거의 부재를 비난하며 신앙을 거부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수 있네 신앙이란 것 자체가 불확실성의 근원에 둔것이지 아무도 완벽한 사실을 신앙이라고 표현하지 않아 신앙이란 끝없는 고동이야 희망을 믿는것이지 비록 진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야 우리는 끝없이 투쟁해야되



우나무노가 말을 마쳤다.



사내는 곰곰히 우나무노의 말을 경청했다.



사내는 생각했다.


우나무노 선생의 주장은 확실히 어떤 철학자나 지성인들도 갖지 못한 열정이 있어 그는 확실히 스페인 이야 그러나 문제는 내가 늘 사랑하고 원했던 것이 빠져있어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느끼지 그는 이성적 설명을 거부하고 있어 어떤 철학자들은 너무나 추구하는 설명인데 말이지 그는 결론적으로 그저 투쟁을 원할뿐이야 근데 그 투쟁은 무슨 의미가 있지? 만약 그가 갖고 있는 신앙이 거짓이라면 그는 어떤 생각이 들까? 거짓일지도 모르는것을 덥석 믿는것은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아 근데 그는 왜? 무신론적 해결에 이토록 분노를 표할까?



사내가 우나무노에게 물었다.



"그럼 당신의 이런 행동의 결과는 무엇이죠? 신을 믿는 이유가 다른것은 없습니까? 그저 정서적인 만족을 위해서 신을 믿는것입니까? 만약 당신이 죽고나서 있는것이 그저 무라면 어떻겠습니까?"



우나무노가 머리를 숙인채 숙고하다가 사내에게 대답했다.



내 행동의 결과는 없지 그래 나의 투쟁에 결과는 없어 그저 무일뿐이지 그러나 내가 이렇게 열정을 가지고 신을 믿는 이유중 하나는 바로 저항이야 그러니까 우리의 운명이 무가 아닌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지 과거 카뮈의 영웅 시지포스가 돌을 계속 날으고 있는 이유와 같아 그것은 저항이야 운명에 대한 저항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야 그러니까 자네의 말대로 우리의 결말이 그저 무일 뿐이라면 말이지 저항하면서 죽자는것이지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죽자는 거라네 우리의 합당한 결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지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저항하러 가야되 적어도 투쟁을 해야되 그러야만 진정한 인간이지


그래 어떻게 보면 정의를 위해서지 인간들의 운명에 대항하는것은 올바르지 않은 것과에 전쟁이야


우리는 이성과 의지 만족시킬 수 없어. 그러기에 투쟁이야.그래 투쟁이야.


과거 솔론의 아들이 죽자 솔론은 울었지 그는 부질없기에 울었지. 우리가 갖는 이 희망은 부질없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우리는 울어야해 이럴때가 아니면 언제 울겠는가?


부질없기에 우리는 울지. 그런것처럼 우리는 반응해야해 이 비극적 삶의 감정에 말이야.


나의 사명이란 지금 내가 이곳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는 사명이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싸우는 거야. 우리 삶을 짖누르는 이 모든것에 선전포고를 하는것이지. 성직자,과학자,심지어 이발사에까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긍정에 들어간 신앙,부정에 들어간 신앙,기권에 들어간 신앙 이 모든것들과 선전포고를 하는것이야. 무신론자 이든 유신론자이든 불가지론자이든 이 깨어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이 열망 속에서 싸우게 하는것이야.


우리는 울어야되 그래 슬픔을 삼키는 것이 진정 겁쟁이지 남의 시선을 신경쓰니 말이야 우리가 신을 믿어야 되는 이유는 울기 위해서야 그러니까 우리의 감정을 표출하고 솔직해지기 위해서는 울어야되네 그러니까 이 상황에 대해서 가장 인간적인 대처는 우는 것이야 그러니 우리는 투쟁해야되네 부조리에 그러기 위해서 비웃음 거리가 될 필요가 있어 남이 보기에도 내가 보기에도 말이지 그러나 진정한 영웅이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아 그리고 불가능을 거부하지 않지 그런 처세술을 거부한 자야만해 그래 내가 이렇게 신을 믿는 이유는 우리의 죽음에 저항하는 이유는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이것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지 그래 이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지 우리는 패배가 확정된 싸움터에 가는 자들을 경외하지 않던가? 우리는 싸워야되 그럼으로서 이것이 정당하지 않음을 증명해야되 우리는 다른 삶을 믿어야되 저 세상의 그 영원한 삶을 믿어야되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삶을 우리들 각자가 의식을 느끼는 그 어떤 삶을 믿어야되 이 삶의 적절한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다른 삶을 믿어야되 다른 삶을 획득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죽음 후에 이 지상의 삶이 끝없이 지속되기나 하는 것처럼 우리는 느껴야 하고 그것을 느낀다는것을 행동을 통해서 보여야되네 만약 우리의 끝에 마련되게 그저 무라면 끝까지 이게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야되네


우리는 신을 믿어야되네 그래 우리는 적어도 그가 있는 것처럼 살아야되네 부조리에 저항하기 위해서 운명에 저항하기 위해서



사내는 우나무노의 주장을 열심히 경청했다. 확실히 우나무노는 겁쟁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내가 보기에 우나무노는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우나무노는 여러가지 면에서 너무 이성을 경멸했다 그리고 우나무노의 모순적 행태들도 문제였다.


그럼에도 우나무노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수 없이 많은 철학 교수들이 그저 철학하는 기계로서 인간들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반면 우나무노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인간으로 살과 뼈를 가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우나무노의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고 있었다. 우나무노의 지적인 정직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늘 이성과 합리가 결여되 있다. 우나무노 본인은 그것을 알면서도 고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으로서는 정직할지 몰라도 철학자로서는 빵점이었다. 그의 사상은 논리적인 체계나 칸트 철학이 갖고 있던 엄밀성은 조금도 가지지 못했다. 그의 철학은 일종의 철학인체 하는 외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사내가 찾던 철학자들 중 가장 사내의 마음에 드는 자중 한명임은 분명했다. 사내는 늘 정직성을 원했다. 우나무노는 그런 정직성 에서는 비참할 정도로 솔직한 자였다.


사내가 사색을 하던중 우나무노가 사내에게 묻기를 "자네는 나와의 대화에서 어떤 도움을 얻었는가? 미안하게도 나는 그 어떤 위로를 갖고 있지 못하네 하지만 자네도 그걸 알고 내 이야기를 들었겠지 아무튼 이 늙은이의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네 이번 시간이 자네에게도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길 바라네"


사내는 우나무노에게 인사를 하고 터널을 나왔다.


그 사내는 어떤 위로를 얻었을까? 아니면 어떤 희망을 얻었을까? 적어도 중요한건 그 사내가


생각을 한다는것 고뇌를 한다는것 그 자체일 것이다. 인간들은 생각해야한다 고뇌해야한다 비록 우리 앞에 있는 것이 불가능 한다해도 우리는 투쟁하러 가야한다 비록 그 끝이 무라고 한다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