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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면 판타지 자체가 목적이 되는 소설들과 환상이 다른 것들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글들의 산이 만들어질 것 같다. 물론 후자의 높이는 전자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을 것이고, 이 단편집은 물론 후자에 속한다.

이 단편집을 읽기 전 이미 카사레스의 장편 <모렐의 발명>을 읽었지만 역시 장편과 단편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장편에서는 내가 기대했던 이미지와는 다르게 낭만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느껴졌다면 단편들은 오히려 독자의 혼란을 유발하는 종류의 글들이였다.

<빅 슬립>에서 독자가 필립 말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어 당황하게 되는 것처럼 각 단편의 도입과 전개부에서 독자는 작중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 혼란에 빠지고, 그 사이 작가는 '우주 뒤집기'같은 반전을 설치한다. 특히 <파리와 거미>같은 단편의 결말에서는 남부고딕과 비슷한 종류의 섬뜩함이 느껴지도 한다.

단편집에 수록된 소설 중에서는 <위대한 세라핌>이 가장 좋았다. 해안가로는 떼죽음을 당한 물고기들이 밀려오고 종말의 징조가 나타나지만 종말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라디오로는 군부 쿠데타 뉴스가 전해지고, 불량배들은 해변을 점령하고, 여주인은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하녀를 학대한다. 주인공은 이내 염증을 느끼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어진다. 어디를 향하여서? 죽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