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순전한 기독교를 읽고서 - 1장과 2장


종교, 특히 기독교는 본래의 모습을 들어내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물론 지식적인 부분이 아니라 삶 가운데서 진정 성경에서 말하는 바 사랑을 실천한다면 이는 훌륭한 것이지만, 단순한 선행과 구원받은 자의 삶의 모습에 넘을 수 없는 선을 긋는 것이 본래 기독교인 만큼 그 구원의 진리를 왜곡 없이 알게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저자 루이스 교수는 때문에 이 되짚음에 대해 필요성과 의무감을 불가피하게 느꼈을 것이다. 자신부터가 폭넓은 식견과 논리로 무장한 난공불락이라고 자처했음에도 형편없이(그의 말에 의하면 ‘맥빠지고 질질끌려가듯‘, 신사답지 못하게) 패배했으며 이성에 비추어보아도 피할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진리에 대해, 자신이 썼던 온갖 수들에 대한 패배의 역사들을 풍부한 참고자료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과거로 인해 약점이라 생각했던 부분들이 무엇인지, 착각한 부분들이 무엇인지 악착같이 파고들던, 내부사정을 잘 아는 고발자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저자는 단호하고 깔끔하게 그런 대립적인 프레임의 문제를 거부했음을 느꼈다. 즉 미개함, 종교재판, 기득권, 반이성주의, 기괴함, 비양심적인 믿음주의, 내로남불 등 종교에 씌워진 부정적인(하지만 분명 일부 종교인들의 노출된 부정적 현실을 담고 있기도 한) 인식들이 이성과 지성, 진취적인 마음과 과학, 발전, 개몽된 현대인들 등에 대립되는 프레임이 씌워지도록 만들고 있지만 이는 피상적인 대립일 뿐이며 사실상 거짓 대립의 구도이다. 진실은 이성을 초월한 문제들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최대한 이성적인 판단은 두 가지이다. 모름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이성으로 닿을 수 없는 존재가 스스로 손을 내밀어 줌으로서 깨닫게 되거나.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이성과 지성, 진취적인 마음과 발전은 진리로의 탐구와 땔 수 없는 것이며 대립적으로 분할될 수 없는 요소들이다.

‘순전한 기독교’는 그러한 루이스의 회고록이자 기독교적 지침서로서 당대에, 그리고 과거와 현대에도 궤를 같이하는 본질적이지 못한 비판들이 순전한 기독교에 대해서는 것핥기식의 비판으로밖에는 작용하지 못함을 증명하고자 함과 동시에 또한 내부적으로 말씀을 잘 알지 못하거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곪아 있는 교회의 정신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는 그러한 문제가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음에서 진단해 냈고 그것이 ‘순전한’ 기독교를 탐구한 바탕이다.

본서는 4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장과 2장은 대립적인 프레임의 붕괴와 그런 프레임들에 쌓인 ‘믿음’들에 대한 비판, 그리고 기독교의 믿음을 소개하는 변증적인 소개의 내용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의 행동과 삼위일체 및 난해한 개념들을 다루는 3장과 4장도 변증의 기조와 역할을 포함하고 있는데 종교와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난은 상당수 개개인의 방종이 확대해석, 일반화 내지는 기독교에서 이들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혹은 본래 어떻게 다루어야 했는지에 대해) 무지함으로 인해 기독교로서 기독교를 꺾을 수 있는 여지를 제하여 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잘못되고 물탄 기독교를 믿고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비판이 돌아가야 함은 지당하지만 그 대상이 결코 순전한 기독교는 아님을 짚어주기 위해서라고 생각된다.


1장. 옭고 그름의 법칙


1장은 반종교적이고 유물론적인 ‘믿음’들에 대한 간접적인 반론과 프레임에 얽히지 않은 정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내가 느낀 바는 루이스 교수는 대단히 효율적이게 문제를 구분하고 있으며 느슨하지만 그렇기에 거부할 수 없는 전제들을 치열하게 파고듬으로서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적인 대전제들로 가지를 쳐나간다.

하지만 일견 그런 논증에는 세련되지 못함을 느꼈음도 사실이다. 현대에는 ‘사실은 당신도 알고 있잖아’식의 말은 냉소와 회의주의에 먹잇감밖에 되지 못하는 꼴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 자체의 논리와는 별개로 상대의 경험과 정직함을 요구하는 모습은 감정에 대한 호소로 오해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결국 겉모습의 문제일 뿐임을 깨닫게 된 것은 불편함의 근간을 긁어주는 반론들과 답변들 덕분이다.


반론들은 우리가 쉬이 떠올릴 수 있는 거의 모든 범주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요즈음 가장 유행하는(사실 언제나 유행하고 있었던) 진화와 본능, 그리고 사회에 대한 담론을 끌어들인다. 즉 도덕적 옳고 그름이란 사실 본능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작용한 이기심이며 때문에 쉬이 구별되지 않지만 윤리적 규범들과의 충돌에서 표면에 들어나게 되며 이는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생물학적인(우리의 생각에는 실질적인) 설명들과 호환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루이스 교수는 과연 본능들이 있지만 이를 선택하는 주체는 본능에 얾매이지 않은 제3의 입장임을 밝힌다. 이는 도덕이나 이기심 그 자체가 아닌 이를 선택하게 해주는 상위의 무언가이다. 만약 도덕과 이기심이 본능이라는, 존재의 연속성을 보전하기 위한 생물로서 최우선의 행동양식이라면 이 둘 그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고 특정한 본능을 우선시하게 해주는 상위의 주체적 본능. 그가 말했듯이 본능들이 ‘피아노의 건반’이라면 이는 ‘악보’에 해당한다. 따라서 본능이라는 선악의 구분이 없는(도망치려는 본능자체와 성욕의 본능 자체는 악할것이 없으므로) ‘건반’들을 연주하여 특정한 ‘곡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옳고 그름이 전 우주의 절대적인 법칙의 윤곽을 드러냄은 이 같은 우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지만 항상 인류와 함께해 왔던 이 특정 선택지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옹호, 즉 도덕률과 자연법의 존재에 따라 논증된다. 하지만 이 우주의 자연법내지는 도덕률이 본능 자체와는 차별된다고 해서 과연 더 상위의 법칙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이성을 지니고 있으니까 사회제도들과 교육들로 인해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루이스 교수는 사막에 사는 아이들이 구구단을 모른다고 하여도 산수의 법칙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문명이 일구어짐에 따라 자연과학과 수학이 발전했다고 해서 우리는 결코 우리가 이런 것들을 만들어 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도화된 과학적 접근법과 인류의 역량적 총합이 증가하고 집중됨에 따라 체계적으로 좀 더 면밀하고 실용적인 지식들을 습득하고 쌓아올려 자연을 기술적이고 과학적으로 ‘발견’해 내는 것이다. 과학은 세상을 보는 하나의 창구이고 인류가 힘을 합쳐 해낸 것은 창구를 넓히고 깨끗이 닦는 것이지 보이는 자연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자연법(도덕률)을 산수와 같이 취급함에 대함은 이와 같은 논증에 따름이다. 역사에 걸쳐 법은 개정되고 발전해 왔지만 사실 그렇게 다르지 않다. 성경의 10계명 중 6에서 10계명은 현대의 모든 법을 합친다해도 부족함이 없다. 왜냐하면 그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며 인류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최대공약수는 영원히 유효하며 이에 반하는 세력은 잘 쳐줘야 미치광이이며 전쟁과 미움의 역사는 자연법을 거스르려는, 혹은 그르게 따르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전 우주적인 옳고 그름의 법칙은 인간의 역사를 따라, 그리고 개개인의 양심을 따라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는 우리 개개인이 그러한 도덕적 범주 안에서 판단을 내리는 한 부정할 수 없는,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형상화다. 이를 느낄 수 있는 건 개개인자신밖에 없으니 우주에 단 하나뿐인 시험대로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인간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며 막연한 유물론적 사고에서 벗어나 열린 마음, 즉 이성의 가장 참되고 진실되며 근본적인 겸손함의 자세에서 우주적 담론을 시작할 수 있다. 이는 거창하고 불가능을 쫓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것이다.




2장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2장은 불가지론적 입장과 기독교를 잇는 부분으로서 본서가 분류상 변증적인 면을 포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순전한 기독교 자체에 대한 것임을 또한 명확히 하고 있다. 이성이나 논리에 취하지 않고 기독교인으로서 신의 부르심에 순응하지 않고는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제목에도 부합하는 바 무엇을 믿는가에 대해 소개하며 오직 이를 철저히 소개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쫓는 과정에서 오해할 수 있는 개념들을 배제하지만 이는 다른 종교의 불합리함을 찌르기 보다는 ‘기독교인이라면 믿을필요가 없는 사실’들을 소개하며 윤곽을 명확히 함에 가깝다. 이와 같은 철저한 소개자의 입장에 서있음으로서 저자는 성경보다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않겠다는 스탠스를 자연스럽게 취함으로서 성도의 본분을 구별하여 다함과 동시에 불필요한 반감이 느껴질 수 있는, 열심을 순종과 혼동하는 태도를 제한다.

이번 장은 1장에서 한 걸음 나아가서 그렇다면 그 ‘옳고 그름의 법칙’이 어떻게 기독교의 교리에 부합하는 우주의 법칙으로 귀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1. 범신론과 무신론.

‘옳고 그름의 법칙’(자연법)에 따르면 범신론은 우주의 법칙에 부합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범신론은 선과 악의 구분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과 구별된 절대자, 그것도 분명히 정해져있는 법칙을 선포한 절대적 창조자이며 주권자의 존재를 범신론은 그려내지 못한다. 만약 모든 것이 신이라면 암세포나 세상의 모든 비참한 것들조차 신으로 여기게 되며 윤리적 선은 있지만 절대적 도덕률, 즉 자연법의 이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범신론이 틀렸다면 어째서 세상은 단 하나의 선한 절대자가 창조한 그 모습을 품고 있지 못한가, 어째서 도덕따위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이다. 하지만 그 물음 자체, 어째서 세상은 고통스럽고 불의로 가득차있는가 라는 물음 자체가 자연법을 따르고 있는 개인이 할 질문이며 이는 기독교가 말하는 타락한 세상이 더욱 이 현상을 포괄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해준다.

무신론은 얕은 수로서, 사실상 가장 극렬한 종교의 비판자도 어느정도 자신을 돌아볼만한 학식(보다는 양심, 정직함)등을 갖춘다면 선뜻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한없이 무신론에 가까운 불가지론자가 양심의 선에서는 적법하다. 만약 무신론을 정말로 신봉한다면, 부분적인 가정들을 절대적으로 받들어서 온 우주적으로 확장시켜야 할 테고(‘세상은 정말 악하다 혹은 무의미하다’) 그 시점에서 이미 자기가 매달려 있는 가지를 스스로 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의미없음을 말하는 이 또한 의미가 없고 자신의 의미있음을 지탱할 그 무엇도 찾을 수 없다. 자신이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기억나는 부분이다.


2. 이원론

루이스 교수는 이원론이 기독교와 상당히 가까움을 인정한다. 하지만 선과 악, 그리고 세상을 유린하는 강력한 악의 존재를 제외하면 결코 동일시 할 수 없는 차이가 있음도 밝히고 있다.


2-1 치환 불가한 선과 악.

만약 선과 악이 치환 가능한 개념이라면, 자연법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며 힘과 숫자가 그 우열을 결정해 줄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전반적인 흐름, 즉 악한 개인의 일탈등을 제외하고 모든 문명과 인간 사회, 그리고 우리 개인의 생각을 비추어 보아도 그 ‘악’이란 것은 보편적인 기호로서 자리잡고 있지 않다. 살아있는 그 무엇도 고통스러운 죽음이나 거짓말, 해를 입히는 모든 것, 패륜등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지금쯤 지구상의 어떤 나라는 ‘불의’를 내세우며 무의미한 ‘살인’과 ‘명예훼손’등을 당당히 헌법에 새겨야 한다. 이는 팔을 절단하는게 팔이 붙어있는 것보다 정상적이라는 궤변을 옹호함과 같다. 또한 어째서 자연법이 부정할 수 없는 자취로 현대까지 내려왔음에 대한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2-2 선과 악의 선후관계.

위 논의에서 발전하여 어째서 선과 악은 동등하지 않은지 알 수 있다. 선과 악이 대립되지만 대등하지 않다면(상호 치환이 불가하므로) 기준점이 있을 터인데 앞서 살폈듯 자연법의 존재는 선이 전 우주의 법칙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살펴볼 것은, 악은 악한 존재로 인해 선한 개념들을 왜곡함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혜는 그 자체로는 선한 것이다. 하지만 악인들은 지혜를 나쁘게 사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하곤 한다. 이처럼 악인이 악을 행하는 데에 사용되는 모든 개념들, 힘, 지식, 권력, 언어, 성욕 등은 사실 본래는 선한 것들로서 우리의 생명과 세계의 근간을 지탱해주는 필수의 개념들이다. 만약 힘이 있음 그자체로 세계가 붕괴된다면, 성욕의 존재 자체로 모두가 성범죄자가 된다면 아무도 살아갈 수 없다. 기준은 대단히 명확하며 이러한 본질을 이루는 본능들, 즉 ‘건반’들은 모두 그 자체로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선한 것들이다. 반드시 쳐야 할 곡이 있다면 이를 위해서 건반과 올바른 연주는 둘다 필요하고 때문에 절대자의 뜻에 부합하는, ‘보기 좋았더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다만 쳐야할 악보를 치지 못하고 각각 따로놀며 제멋대로 소음을 만든다면 이로서 ‘악’이 된다.

따라서 악이란 결코 ‘건반’ 자체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본래는 선한 개념들에서 파생된 부스러기 같은 것이다. 때문에 악이 기반이 된 악은 존재할 수 없으며 악에서 파생된 선은 아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이로서 선과 악은 대립함에도 불구하고 선후관계와 우열이 뚜렷하고 이원론에서 말하는 대등한 선과 악의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절대자는 선하며 악한 피조물이 있을 뿐이다.


3. 어째서 그리스도를 믿는가.

이 부분을 읽을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저자는 복음서에 충실하게 그리스도의 대속의 개념과 기독교의 믿음을 풀이하는 한편 그리스도가 아닌 것에 대해서만 선을 긋고 있다. 논증이 등장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리스도가 단순히 도덕적 스승으로서 옳다 그르다를 떠나 적당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여지를 제함과 교리 내적인 부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작정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철저히 소개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복음의 기본을 말할 뿐 그 자체를 1장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구분법으로 내세우지 않고 있으니 섣부른 비판은 좀 과한 듯 싶다.(ex:dawkins)


3-1. 그리스도가 아닌 것

상식적으로 용서란 당사자들끼리 하는 것이지 뜬금없는 제삼자가 대뜸 죄를 용서해주겠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더군다나 이 사람은 자신이 신의 아들이며 겉으로 보아도 직접 피해를 입은 것도 없으면서, 피해를 입은 당사자의 허락은 구하지도 않고 죄를 용서한다. 이는 기존에 알려진 도덕, 윤리에는 부합할 수 없으며 아무리 숨을 고르고 보아도 보통의 사람 정도의 도덕성도 결여된 말이다. 따라서 그는 위대한 도덕적 스승일 수 없다. 오직 단 하나의 가능성은, 그가 절대자이자 창조자이며 우리 인간이 마땅히 섬기고 따랐어야 하는 선한 존재일때이다.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악은 창조자이자 주권자인 그의 뜻에 반하는 것이고 다른 누구보다 직접적인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택지는 둘 중 하나, 즉 그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로서 절대자와 일체임을 믿는 것이나 말도 안되는 소리로 치부하는 것만 있을 뿐 그저 위대한 도덕적 스승이네 뭐네 하는 말은 꺼낼 수도 없는 문제임이 확실히다.


3-1a 저자의 신앙고백.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결코 악마나 헛소리꾼으로 생각지 못한다고 말하며 그가 구세주임을 인정한다. 이는 믿음의 고백이며 철저한 논증의 끄트머리에서, 그 목소리를 따라 뛰어내리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초이성적인 은혜의 영역이다.



3-2 대속


3-2a 인간은 죄인.

그렇다면 옳고 그름의 법칙,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서 선한 절대자에게서 멀어졌고 죄인이 된 것, 절대자의 참된 아들이요 그분 자신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대속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죄인은 죄값을 치루어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 죄가 ‘악’자체라면 우리는 결코 그 죄값을 모두 치룰 수 없는데 우주적 선의 법칙에 항상 반하는 것이므로 단발성 처벌로는 죄값을 치룰수가 없다. 또한 우리 세계의 법, ‘율법’이 존재하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가 끊임없이 악을 추구함을 말해준다. 온전히 선한 존재들의 세계에서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선한 법에 부합하기 때문에 따로 악을 지적하는 법이 있을 필요가 없다.


3-2b 대속의 그림.

루이스 교수는 대속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 즉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했으며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었고 그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었음을 말한다. 그 죽음이 어떻게 효력을 가지는 지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이는 진리이며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다. 여기서 저자는 대속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효과적일 수 있는 논증적인 그림을 제시하고 있으며 조심스럽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아예 잊어버리라고 하고 있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그의 그림은 이렇다. 일단 우리는 모두 죄인이므로 ‘악’에 대한 죄값, 즉 온전히 선함을 입는 것은 불가능하며 때문에 우리 자신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온전히 선한 존지인데, 그렇다면 어째서 다른 이들의 죄를 뒤집어 쓸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진정 공정한 것일까? 하지만 만약 죄의 문제를 ‘빚’을 갚는 문제로 생각해 본다면 이해가 가능해진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서에 누누이 비유해오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절대자와 일체인 그의 아들이어야 할까? 선은 절대적이고 본질적이며 모든 선한 것들, 지혜나 힘 등은 절대자로부터 주어진 선물일 수 밖에 없다. 천사든 그 무엇이든 선한 본질들은 창조자로부터 온다. 그렇다면 회개의 예표, 즉 죄에 대한 온전한 죽음에 대한 예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절대자로부터 비롯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그가 새로운 진리의 길을 개척한 것이며 그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절대자는 본질적으로 전지전능하며 선하고 죽음이 있을 수 없다. 이를 위해 그의 아들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부활하는 대속과 구원의 역사를 예표함으로서 인간에게 ‘죽음’과 ‘부활의 생명’을 주신 것이다.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를 따라서 세상에서 죽음, 즉 회개를 경험하여야 부활의 생명,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회개는 그리스도가 말씀하신바 ‘내 멍에는 가볍다’ 하신 것처럼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을 예표하셨음으로 우리는 그 말씀에 따라 그의 이름, 그의 죽으심의 의미에 우리의 사망의 죄를 내려놓을 수 있으며 그의 부활의 생명에 동참하여 영생을 얻는 것이다.

물론 다시 강조하지만 이는 논증을 통한, 이해를 돕기 위한 에딩턴의 원자그림 같은 참고적 스케치이므로 이미 믿고 있다면 전혀 상관이 없고 꼭 이렇게 믿을 필요도 없는 이야기다.


3-3 새 생명.

저자는 그리스도가 생명을 주시고 퍼뜨리시는 방식, 즉 세례와 믿음, 성만찬을 비록 우리는 영적 세계에서 어떤식으로 효과를 가지는지 알지는 못하나 그리스도의 권위에 입각하여 받아들인다고 고백한다. 권위는 현대에는 막막한 의미를 품게 되었지만 사실 세계의 모든 알려진 지식과 금융, 법 등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들 또한 권위에 입각하여 우리는 믿고 있으므로 적법하다.

그렇다면 성도로서 구분된 이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인가? 저자는 우리가 받은 새 새명 또한 지금 육신의 생명처럼 보전하고 가꾸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살아있음이란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입더라도 회복성을 지닌다는 것이므로 기독교인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 즉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세례 받고 기독교인이라 한들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면 결국 그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되 선한 사람의 차이란 기독교인은 무엇이든 그 선이 자신으로부터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신 생명으로부터 나옴을 믿는 것이다.

이는 실질적인 진실로 따라서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고 성경에서 말하는 바 교회로서 서게 된다. 마치 우리의 몸이 각각 살아있는 세포 하나하나로 이루어져 있듯이 교회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뜻을 세상에 펼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진정한 영적 진화이며 초생물학적이다.


3-4 의문들과 결론.

여기서 저자는 흐름에 따라 몇 가지 의문점들을 정리하고 있다.

-복음을 접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가 없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기독교인이라면 그리스도가 행하신 것처럼 성도가 모여 이룬 교회의 유기체적 일부로서 항상 생명을 퍼뜨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절대자가 선하며 피조물에 불과한 악한 영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면 어째서 절대자는 가장 직관적인 방법(절대적 무력 같은)으로 이를 바로잡지 않는가?

과연 그럴 것이다. 성경은 최후의 심판을 말하고 있으며 누구도 도망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혹은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절대자는 우리 인간이 아직 자유의지를 가지고 새 생명의 동참하길 바라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이를 이루었다. 우리는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지만 그는 우리를 위해 믿음을 더하여 기회를 주신 것이다.

절대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날은 세상이 끝나는 날이다. ‘극작가가 무대위로 걸어나오면 연극은 끝난것입니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날에, 기존의 세상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새로움을 입게 될 때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은 버틸수가 없으며 죽음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이고 기회의 때는 바로 지금이다.





짧은 감상:


개인적으로 놀라움이 앞섰다. 선과 악, 옳고 그름 같은 문제는 사실 기독교인인 나조차도 믿음으로 뭉뚱그려서 그저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그 진리를 내 영혼이 안다,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지식으로는 신에 닿을 수 없다는 변명하에 현대에 차고 넘치는 무신론에 대항하여 어떻게 유효한 도움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무력함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 교수의 솜씨는 사실 이 부분에서는 세상적인 회의론자들과 다를 바가 없던 나에게 새로운 지경을 열어주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거대한 구조물의 중추가 세워진 것과 같았으며 고지를 점령한 아군을 본 것 같았달까. 부실했던 내부를 여실히 보여주는 거짓된 진보들이 오히려 독으로 다가오는 이런때에 매우 고무되는 일이다.

실로 부족하고 빈약한 문학적 소양인지라 느낌적인 요약의 느낌으로 써 보았지만 마치 네모와 세모만 그릴 줄 아는 그림치가 대성당을 스케치하여 보인 것 같은 느낌이다. 이것만 보아서야 사실상 광고를 본 감상밖에 없을 것 같다. 이음매 없이 매끄럽고 노래하듯 리듬이 있는 루이스 교수의 글들은 함부로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다. 무엇보다 겉만 뚫으면 알맹이는 작은 짜증나는 글이 아니라 속과 내부가 모두 꽉찬듯 일관성이 있으며 하나의 유기체가 된 듯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공격을 할 수는 있겠지만 본질적이지 못한 것들은 미끄러뜨리는, 밀도있는 유선형이 연상되는 예술적 솜씨며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모습은 마치 생명력을 지닌 듯 하다. 과학이 마법이 되는 것, 기능과 기술이 합치하는 경지가 되어 초목의 나무 한 그루처럼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여져서 심기는 씨앗과도 같은 느낌이랄까. 10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듯 바위에 글을 새긴 들 얼마나 갈까,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의 풍조에 거슬러 살아있듯 읽힘을 보면 과연 기독교의 고전이다. 말하는 자는 닮아간다고, 그의 글도 자연법을 닮아가는 것 같다.



*느낌적인 요약인 만큼 제가 부족하여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죄송하고 주의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