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남 화순 운주사 의 천불천탑과 와불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하룻밤만에 만들기 위해 도선국가가 석공들을 데리고 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옛날 도선대사가 하룻밤 사이에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세우기로 하고, 하늘에 기도드리자 천여 명의 선동선녀가 내려와서 불상과 불탑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역사는 반드시 하룻밤 사이, 첫닭이 울기 전까지 마쳐야 하는 일이었다. 날이 새면 선동선녀가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도선대사는 해가 뜨는 것을 늦추기 위해서 일봉암이라고 하는 바위에 해를 묶어 두었다. 새벽녘까지 모든 일이 순조로워 천불천탑이 거의 다 조성되고, 이제 와불만 일으켜 세우면 되었다. 그런데 일을 돕던 대사의 상좌가 일에 지쳐 그만 첫닭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와불을 세우려던 하늘의 선동선녀들이 일순간에 모두 하늘로 돌아가 버렸다. 그래서 와불을 세우지 못하고, 지금도 그렇게 누워 있는 상태로 있다.


이 때 와불이 제대로 세워졌으면 화순이 수도가 될 수 있었다 카더라 

현재 매표사가 있는 자리를 지나서 왼쪽으로 금이 간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안에는 석공들이 천 개의 석탑을 만들 때 쓰던 연장들이 묻혀 있다고 전해진다




2 심원사 황금멧돼지와 사냥꾼


는 신라시대인 720년(성덕왕 17) 보개산 아랫마을에 사냥꾼 이순석(李順碩)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형제는 사냥에 나서 보개산 너머 담터라는 곳을 지나고 있었는데 마침 큰 멧돼지 한 마리가 눈에 띄어, 순석은 때를 놓칠새라 재빨리 화살을 쏘았다.


마치 금란가사를 두른 듯한 누런 멧돼지는 왼쪽 앞다리에 화살을 맞고 보개산 정상인 환희봉 쪽으로 달아났다.

형제는 핏자국을 따라 멧돼지가 멈춘 곳에 이르러 보니 금빛 멧돼지는 간데없고, 왼쪽 어깨에 화살이 꽂힌 돌로 된 지장보살상이 맑은 물이 넘쳐나는 샘물 속에 상반신만 내놓은 채 있는 것이었다.

화살을 뽑으려 했으나 석상은 태산 같은 무게로 꿈적도 하지 않아 크게 놀란 형제는 깨달은 바 있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맹세하였다.

“대성(大聖)이시여! 저희들을 죄에서 구해 주시려고 이 같은 신변(神變)을 나타내신 것임을 알겠나이다. 만약 내일 이 샘물 곁에 있는 돌 위에 앉아 계신다면 마땅히 출가하여 수도하겠나이다.”


다음 날 형제가 그곳으로 가보니 과연 석상이 돌 위에 있으므로 두 사람은 바로 300여 명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출가하였다.

그 절이 심원사다 공무워 한국사에 자주 나오는 심원사 보광전의 그거




3 팔만대장경 합천 해인사 창건 설화 목인 전설


해인사는 합천군 가야산에 있으며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한 법보사찰로 신라 애장왕 때 

순응(順應)과 이정(李貞)이라는 이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호랭이 레종 피던 시절..

합천에 유생 한 사람이 있었는데 천성이 어질고 심성이 맑았지만 살림살이는 너무 궁핍했던 사람이 

살고 있었다. 

유생은 전답을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입담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유생은 세월아 가거라 하고 공부만 하였다. 


선친 때부터 데리고 있던 노복들이 궂은 품일을 해 온 덕에 겨우 추위와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느 해 여름 문득 툇마루에 앉아 하늘 멀리 떠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때 송아지만한 누렁이 개 한마리가 어슬렁어슬렁 집안으로 들어왔다. 

살랑살랑 꼬리를 치던 누렁이는 자꾸만 유생에게 업히라고 졸라댔다. 

유생이 등에 업히자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더니 강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누렁이는 한번 깡충 뛰어오르더니 물속 깊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희미한 안개가 피어오른 물 속은 한 치 앞을 분간치 못할 정도로 하얀 기류에 덮여 있었다. 

물 속인데도 숨 쉬는 데에 전연 이상이 없었다. 

이윽고 허연 기류가 사라지고 산호며 해조류가 나타났다. 

온갖 고기들이 유연이 헤엄쳐 가는 것이 보였고 조금 더 가자 용궁이 나타났다. 

유생이 누렁이 개 등에서 내리자 아리따운 궁녀가 용왕 앞으로 안내했다. 


   “왜 이제야 오십니까?” 

   “환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선생을 모셔온 것은 태자의 학문이 부족해섭니다. 마땅히 좋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이렇게 

    모셨습니다.” 


그날부터 태자는 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사서삼경을 마치자 태자는 넌지시 말했다

   “스승님, 내일이면 스승님께서는 집으로 돌아가십니다. 

    부왕께서 기념이 될 만한 물건을 주겠다 하시면 다른 것은 그만두고 목인(木印)을 달라 하십시오.” 

다음날 환송연이 열렸다. 

용왕은 유생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말해 보라고 했다. 


  “주시려거든 목인을 주십시오.” 


용왕은 흔쾌히 목인을 하사하고 진귀한 보석들을 유생에게 싸 주었다. 

태자의 전송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세월은 이미 20년이 지나간 후였다. 

집 떠날 때 보았던 갓난아이는 어느새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유생은 용궁에서 가지고 온 보석을 팔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 한분이 유생을 찾아왔다. 


   “소승의 이름은 순응이라 합니다.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선비님이 어려운 백성을 구제하신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아닙니다. 저 역시 용왕님께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오호, 그래요? 용궁에 가셨다면 불가사의한 목인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까.” 

   “글쎄요. 그게 신비로운 것인지는 모르지만 용왕님에게서 그런 물건을 받았습니다.” 

   “그걸 볼 수 있을까요?” 


유생은 아무렇지 않게 목인을 건네주었다. 

받아 든 스님은 종이에 ‘금 10냥’이라 쓰고 목인을 쿡 찍었다. 

그런 다음 반듯하게 사각으로 접어 불을 붙이더니 공중으로 던졌다. 

종이 조각은 불길을 피우며 너울너울 춤을 추더니 눈 깜짝할 순간 열 덩이의 금으로 변했다. 


스님이 말했다. 

   "선비님께서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돕는 마음을 알겠습니다만, 개중에는 그것을 믿고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소승의 생각으론 만백성을 구제하는데 이 목인을 사용해야 될 것으로 보입니다."

용왕의 선물을 함부로 쓰는 것은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경고였다. 

유생은 선뜻 목인을 내놓았다. 


이후 해인사 창건에 박차를 가하던 순응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버린 바람에 그 뒤를 이정이 이어받았다.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은 의상대사의 법손(法孫)이다. 




4. 분황사 우물에는 세 마리 용이 산다


황룡사터와 인접해 있는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지어진 것으로 전하며, 자장대사와 원효대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유서 깊은 신라시대의 명찰이다.

당시 황룡사 못잖은 크기였고, 황룡사와 함께 국찰로 큰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과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겪으며 대부분의 사찰 건물을 잃었다.

현재는 국보 제30호 분황사 모전석탑을 비롯해 원효대사의 업적을 기리고자 고려시대 세운 비석의 받침돌인 화쟁국사비적, 석조 우물 등이 남아 있다. 분황사는 신라를 대표하는 화가 솔거의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 신라시대부터 사용했다고 전하는 우물 ‘삼룡변어정’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때 당나라 사신이 우물 속에 사는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려는 것을 쫓아가 다시 가져왔고, 이후 이 우물을 삼룡변어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천 년이 지난 우물은 아직도 마르지 않고 물이 차오른다.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 중국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물고기로 변신시켜 잡아가니,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아뢰었다.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