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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철학 서적이다보니 문학책처럼 한 번에 술술 넘기기에는 집중력과 독해력이 역부족이라 독갤럼들과 공유도 할 겸 부분부분 정리하며 읽을 것임.


세창출판사의 <프레너미frenemy> 시리즈의 일환으로 변광배 교수가 쓴 <사르트르 vs 카뮈>는 둘 사이의 '프레너미' 관계를 규명하는 책이다.

즉 두 사상가의 사상들이 어떤 면에서 공통점과 접점을 이루며 한 흐름을 공유하고 어떤 면에서 그 흐름이 갈라졌는지를 탐구한다.

'친구-적' 관계로서 그들을 정의하려는 이 책이, 실제로 그들은 '형제-적' 관계에 밀접했다고 밝히는 부분도 흥미롭다.

그만큼 실존주의의 두 대가가 서로를 얼마나 흠모했는지,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서로의 이론을 비판하게 되었는지에 관심이 쏠린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사상적 배경에 앞서 변광배 교수는 둘의 출신 차이부터 거론하고 있다.

사르트르는 도시의 부르주아 가문 출신의 건강한 엘리트로 '도시인답게 언어로써 세계를 관찰하고 사유한' 인물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카뮈는 알제리의 시골 출신에 평생을 폐결핵에 시달린 지식인으로 '빛과 자연 세계의 일부'로서 스스로를 인식한 인물이다.

러프하게 생각하자면 '도시인' 사르트르와 '시골뜨기' 카뮈의 정체성이 그들의 사유의 향방을 이미 일정 부분 결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의 세기는 처절한 전환의 시대였다.

헤겔이 '절대 지성'의 가능성을 창안한 이래로 인간 지성은 의심받지 않는 찬양의 대상이었으며 인간은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에 젖어있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고 양차대전의 비극을 맞고 난 이후로 그런 믿음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요컨대, 육하 원칙을 삶의 원리로 든다고 했을 때 '왜'가 심각하게 흔들리게 되는 셈이다(개인적으로는 '왜'가 육하원칙의 다른 요소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사상, 즉 '실존'에 대한 물음과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한 셈이다.


'실존'이란 무엇일까?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공존한다는 사실은 이 물음이 얼마나 다양한 사유의 스펙트럼에 소속되었는지 알려준다.

내가 '실존'이라는 단어를 접한 건 기껏해야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과목에서 몇 번과 이 책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실존적 문제 제기가 전부이다.

그래서 우선 사전을 살펴보았다. 네이버 두산백과에서는 실존을 '구체적, 실존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으로 정의한다.

현상학 사전에서는 실존에 대해서 '인간에게서 중요한 것은 실존이지 이성이라든가 인간성과 같은 보편성이 아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두 사전적 정의에 근거해서 나는 실존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기로 했다; 각자에게 주어지는 삶의 문제들에 전투적으로 도전하는 자세.


삶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 몰입을 실존이라고 정의할 때 우리는 세계와 나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나는 세계의 일원으로써 존재하는 셈이다. 그런데 나는 세계의 어떤 일원인가? '주인공적' 일원인가? '부속품적' 일원인가?
내가 독해하기에 인간을 사르트르는 전자, 카뮈는 후자로써 이해한다.

사르트르는 인간 사회를 세계 자체를 구성하는 공동체의 주체적 일원으로 규정하는 반면 카뮈는 주어진 세계에 참여하는 인간들의 연대로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두 사상가는 인간은 세계의 구성 요소를 '나', '타자', '사물'로 규정하고 이때 발생하는 '나-타자', '나-사물' 관계에 집중한다고 본다.

이때 사르트르의 관심사는 '나-사물'에, 카뮈의 관심사는 '나-타자' 관계에 있는 듯하다.

물론 사르트르가 '나-타자'에, 카뮈가 '나-사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부조리와 구토로 대변되는 모종의 '단절'의 주안점은 전술한 대상들이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나-타자' 관계는 '구토'의 관계가 아니라 홉스(Thomas Hobbes)적 세계관에서 차용한 '갈등'과 '투쟁'의 관계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뮈가 보기에 '나-사물' 관계는 이미 '나-타자' 문제에 포섭되는 문제로, 즉 주어진 세계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셈이다.

즉, 사르트르는 모종의 '낯섦'에, 카뮈는 '단절'에 주목한다. 공통적으로 '끊어짐'에 관한 문제이다.


이 끊어짐을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우선 1장에서 다룬 초기 사르트르의 대처 방법은 문학이다.

문학으로써 세계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그 안에서 글쓰기의 주체, 주인공으로 현존함으로써 세계의 즉자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다음으로 카뮈는 인간의 대처 양상을 크게 '자살', '종교', '반항'을 제시한다. 이중 카뮈의 주 관심사는 반항이다.

'자유'와 '열정'으로 구성되는 '반항'은 자살과 종교보다 세계와의 합일에 더욱 적합한 방식이다.

사르트르가 제시하는 문학을 경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계와의 통일성에 대한 향수를 통해 그것을 회복하는 데에 문학은 유용한 도구인 셈이다.


<사르트르 vs 카뮈>의 1장은 '구토'와 '부조리' 개념에 대해 다룬다. 둘 다 세계와의 '끊어짐'을 다루는 두 사상가의 해석이다.

나는 두 사상가의 해석이 일견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큰 규칙의 흐름과 순환을 믿는 개인적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두 사상가의 '세계'는 불가역적이고, 일회적이다. 선조적인 시공간인 것이다.

그 전제에 대해 나는 감히 의문을 제기해보고 싶다. 이 의문 제기를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와 카뮈라면 두 팔 벌려 환영했으리라 믿으며.


세계는 그 둘이 생각하는 것 만큼 불친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