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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몽상가다......

그러나 나는 구원 받지 못한 자의 구원이다!

한줄요약
한 인간이 상상해낼 수 있는 극한의 낮은 자존감은 누구의 위로가 되는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독갤 3대 찐따문학으로 불리고 있기도 하고, 독갤에서 워낙에 유사 갤주로서 추앙을 받던지라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작 장바구니에 있던 민음사 죄와 벌보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먼저 사서 읽게 된 건 아이러니하지만......

어쨌든 다 읽는 데엔 시간이 그리 걸리지 않았다. 요 근래 일이 있어서 집중력 박살 난 것치고는 흡입력 있게 읽은 편이다. 사실 지하생활자의 궤변을 하나하나 다 되짚고 이해해가며 읽은 게 아니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 문장 하나하나를 뜯어볼 가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고로 이 리뷰에서 구체적인 주장이나 근거 따위를 언급할 일은 없을 거다. 아마도.

시작부터 자신은 악한 인간이라고 소개하는 '나'는 지하생활자로, 계속 타이핑하기 귀찮으니 "찐따"라고 압축하겠다. 정말 게으르게 말하자면 이 소설은 찐따소설이고, 찐따의 수기고, 찐따의 망상이며, 찐특)이 수도없이 나오는 소설이다. 그렇게 일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끝내버리면 이 리뷰의 존재 가치는 0에 가까워진다.

1부는 이 찐따의 온갖 철학적인 주장과 그 근거가 이어진다. 여기에 도끼의 만연체와 장광설이 합하고, 어지럽고 산발적인 지하생활자의 독백과 특유의 산만함을 합치면 정말 한 문장 한 문장 이해하면서 넘어가려고 하면 1페이지가 10분이 걸리는 기적이 일어난다. 타임킬링을 하고 싶다고? 이 찐따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온전히 이해하고 넘어가려하면 된다. 정신과 시간의 방이 따로 없다. 이 책 한 권이면 최소 3시간은 날려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결국 목적성이 분명한 '궤변'이다. 찐따의 모든 주장과 근거는 자신을 설명하고 수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이 몇 가지 있다.

찐따는 극히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 대개 극히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보호본능에 의해 자존감을 보상하기 위한 '쉬운 방법'을 찾는다. 자기보호본능이 없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거고, 쉬운 방법은 자신을 선, 타자(타인, 사회, 세계, 자신을 제외한 그 전부)는 악으로 몰아가는 일이다. 실제로 인터넷에 떠도는 망령들 중에 세계나 특정 집단을 향해 증오를 쏟아내는 부류들은 낮은 자존감을 어떻게든 보상받으려고 그러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런 '쉬운 방법'이 통하려면 자기객관능력이 결여돼있어야 한다.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최대한 무시하고 합리화를 해야만 단순한 세계가 완성이 되는데, 자기객관능력이 온전하다면 무시도 안 되고 합리화도 안 된다. 찐따가 바로 이 경우에 속한다. 극히 낮은 자존감을 가졌는데 단순한 방법으로는 이 자존감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가 없다. 1부의 궤변은 찐따가 찾아낸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다. 비록 그것조차도 온전하진 않아도, 찐따는 40년의 세월을 그럭저럭 잘 견뎌냈다.

'그럭저럭 잘'의 기준은 철저히 내 기준임을 밝힌다.

찐따의 구체적인 주장에 대해선 그리 살펴볼 것 없다. 물론 뜯어보자면 분석할 거리야 많다. 스스로를 반(反)영웅으로 만들고 모욕과 수치를 목적으로 하며, 자신이 비참하고 비루한 존재라는 걸 끊임없이 각인시키는 것은(그리고 그것은 나름대로 의도된 것이라는 것은) 자기객관의 창날을 교묘하게 비끼게 하는 놀라운 처세술에 가깝다.

그러니 1부는 "찐따는 어떤 논리로 세상과 자신을 구분 짓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행실을 교묘하게 비판/정당화하고 자신의 자아를 보호하는가"를 다룬다. 물론 그와중에 찐따는 인간의 악성, 심술로부터 과학과 이성만으로 재단할 수 없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한다. 나중에 결말부를 다루면서도 다시 다루겠지만, 일단 여기선 이런 '대의'나 '보편성' 주장함으로써 극한의 정당화를 이뤄내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자신의 논리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완전히가 아니다) 구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1부를 다 읽고나면 이 찐따에 대해 충분히 알 법한데, 이것의 실제 적용이 바로 2부이다. 정확히 말하자면(시간 순서상) 2부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1부의 궤변이 완성된 것에 가깝지만,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1부의 궤변이 2부의 현실에서 맞닥뜨릴 때 어떻게 기능하는지 보면 참으로 우습다. 정말 단언하건대, 그 많고 많은 장광설 독백을 전부 걷어내고 대화문만 읽으면 이 찐따가 얼마나 불쌍하고 비참한 영혼을 가진 인간인지 알 수 있다.

1부의 궤변은 찐따에게 알량한 자존심(자존감이 아니다!)을 부여했고, 그런 자존심이 찐따의 심술과 결합했을 때 일어나는 참사(열등감 폭발, 이하 열폭)가 바로 2부의 사건들이다. 이 참사는 두 사고에 걸쳐 일어난다. 첫 번째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인싸 친구의 송별회에 참여했다가 열폭했던 일이고, 두 번째는 그 열폭에 대한 후회를 창녀에게 쏟아냈다가 동정과 연민(곧 사랑)을 받게 되자 또 열폭한 것이다.

이 두 사건에서 찐따가 얼마나 비참하고 비루한 존재인지 스스로의 독백과 변심, 후회, 절망, 분노, 망상...... 그 모든 서술을 통해 드러난다. 그래도 인싸 친구와의 사건에선 인싸들의 조롱과 기피에서 찐따의 열폭이 다소 미약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반면에, 창녀 리자와의 사건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는 처절한 사고다.

평생에 걸쳐 사랑 받아온 적 없고 그로 인해 비뚤어지고 뒤틀린 인간이 사랑을 받을 때 나오는 반응이 어떤 것인지...... 그쯤되면 이 찐따에 대한 경멸감, 혐오감 등은 모두 안쓰러움과 애처로움으로 바뀌고 만다.

2부의 사고(事故)는 1부의 사고(思考)로 이어진다. 1부의 궤변은 2부의 찐따가 품어오던 모든 뒤틀린 감정과 낮은 자존감, 높은 자기객관능력의 합작품에서 처절한 괴리와 실패를 겪고 발전한 형태이다. 그리고 그것은 놀랍게도 환경적으로 완전히 차단되면서 더 이상 시행착오를 겪을 필요도 없어졌다. 찐따는 평생 2부의 사고만을 곱씹고 되새기며 회상하고 추억하며(?) 1부의 사고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필요하다면 발전시킬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닿을 완성 형태는 이미 결말부에 나왔다. 자신의 불행과 뒤틀림, 악성, 심술을 바탕으로 인류 보편의 가치를, 인간의 진정한 삶과 자유의지에 대한 성찰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는 자기증명에 가깝다. 아니, 자기증명이다. 그는 스스로 비참해지고, 비루해지고, 비극을 겪어가며 완성되었다.

1부 작가의 원주가 밝혔듯, 이 찐따는 결코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런즉 이 소설(곧 수기)에서 승화시킨 이 거룩한 주제의식은 그 자체로 수많은 사람들의 위로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그렇다. 도스또예프스끼는 가장 낮고자 하는 자들을 위한 극한의 위로를 선사해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꿔말하면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을지 몰라도(저마다의 이해란 게 있는 법이니), 이 소설에 공감할 수 있는 자는 극히 한정돼 있다. 이 찐따의 감정과 생각, 그리고 궤변을 따라가고 같이 바라보기 위해선 그와 같은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괜히 독갤 3대 찐따문학이라 부르는 게 아니다.

이것은 한줄요약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생생하게 묘사한 한 사람의 생각과 삶은, 그와 같은 더 많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었다. 도끼의 열성적인 만연체와 장광설이 가진 뜨거운 열기는 곧 생기의 현장이다. 그 생기가 비록 겉보기에 뒤틀리고 보잘 것 없으며 한심해보일지라도, 그 생기의 존재로 말미암아 삶의 위로를 얻는 자들을 생각하라. 문학의 또 다른 가치라 하면 바로 그것일지니.


지하로부터의 수기 등급표
필력: A+
독서 과정에서 느끼는 총체적인 평가, 곧 작품 자체에 대한 인상. 나머지 6개의 기준을 모두 합친 또 하나의 전체적인 기준.
가독성: B-
문장을 읽을 때 글이 얼마나 잘 읽히고 술술 넘어가느냐를 기준으로 삼음. 본인 어휘력도 적지 않은 영향이 있으니 주의.
인물: S
주인공을 비롯한 각 등장인물들이 가지는 개성, 매력, 혹은 대사 센스, 유머까지, 곧 작중 인물을 얼마나 잘 살려내고 잘 써내고 잘 활용하느냐에 대한 기준.
설정: A+
장르별로 기준의 정의가 다르게 작용하겠지만, 공통적으로는 배경되는 시공간과 전후상황 등의 설정들이 가지는 매력과 활용도가 기준.
분위기: A++
말 그대로 작품에 깔리는 분위기. 전체적인 분위기, 각 파트별 분위기, 분위기 전환 등의 '장면 인상' 위주의 기준.
구성: B
책 자체의 구성(목차), 문단 구성, 사건 구성, 사건의 흐름, 배치, 플롯으로 퉁칠 수 있는 부분까지. 소설의 골격에 대한 기준.
문장: B+
필력이 소설이라는 군집적이고 총체적인 문장의 인상이라면, 문장은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부분을 가리키며, 흔히 부르는 묘사도 여기에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