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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카뮈. 진정한 독갤럼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무발기사정 쌉가능하리라.


사르트르와 카뮈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는 동일한 지점에 맞닿은 하나의 개념을 이용해 상반된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부조리'가 그것이다. 부조리는 참 어려운 단어인데 감히 정의내리자면 세계와 나의 단절이리라. 

세계의 흐름이 내게 전혀 통보되지 않은 방식으로, 그러니까 내가 알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으로 이행되는 것을 단절이라고 하자.

세계는 크게 타자와 자아로 구성된다. 그러니까 부조리란 나와 나 아닌 것의 상호불이해를 의미한다.


그런데 각자 '부조리'의 연원과 그 향방의 논리가 사뭇 다르다.


사르트르는 우선 타자와 자아의 관계, 그러니까 세계의 본질을 '폭력'으로 규명한다. 

서로가 서로를 직시하려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를 알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겁에 질린 원숭이가 택하는 방법은 폭력이다.

달리 말하자면 세계는 폭력의 주체들,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그리고 그 외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물들)로 구성된다.

이 폭력을 해소하고 '나와 이웃의 구원'을 위해, 달리 말해 '평화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제안이 '앙가주망(Engagement)', 즉 '참여'이다.


반면, 카뮈는 세계와 나의 본질을 '통일'로 규명한다.

원래 나와 나 아닌 것들은 형제애로 돈독하게 묶인 사이이다. 하나의 왕국에서 유래한 둘 이상의 우호적인 주체들이 세계다.

그런데 부조리가 발생함으로써 이 우호는 파괴된다. 또는 이 우호의 파괴 자체를 부조리라고 부를 수 있다.

카뮈의 목적은 따라서 이 우호를 회복하고 세계의 통일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원자 상태의 개인을 상정하는 사르트르와 분자 상태의 개인을 상정하는 카뮈.

얼핏 보아도 상당히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상가가 하나의 공통된 접점에서 만나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사뭇 색달랐다.

그런만큼 그들의 문제의식에 자연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문제의식이란 세계와 나의 단절이다.

사르트르와 카뮈는 단절을 비정상적인 상태로 본 셈이다. 자유, 평등, 형제애의 프랑스 지식인다운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나는 하나의 물음을 제기해보고 싶다. 독서한 사람의 당연한 권리로써. 


세계와 나의 단절은 과연 비정상인가?


세계와 나의 합일을 자연스러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달리 생각하면 타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많은 타성적인 것들에서 우리는 우리의 오류를 발견한 전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쯤 해볼 질문이라고도 생각한다.

사르트르가 떠올린 폭력이, 카뮈가 떠올린 분단이 과연 해결되어야 할 문제일까? 아니면 우리가 안고 살아가야 할 태생적 장애일까?

개인적으로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세계와 나는 단절되어있다.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한 것이 그 증거라고 생각한다.

단절의 극복은 단지 흥미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인류 문명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문학, 음악, 건축, 과학, 철학, 언어에 이르는 모든 것이 단절의 산물이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상이한 두 사상이 하나의 접점에 도달했고 그 후 다시 멀어졌던 그 일련의 흐름을 살펴보면 그게 더 맞는 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