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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 책을 읽었을 때 최근 나온 이영도의 글 중 제일 낫다고 생각했었다. 도서관을 오가다 신착도서란에 꽂혀 있는 게 보이길래 한 번 다시 읽어볼까, 해서 들고 와보니 역시 감상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시하>는 이영도스러움과 현대 한국 판타지스러움이 한 데 모여 잘 섞여 있는 수작이다. 굳이 흠을 잡자면, 아무래도 조금 짧다는 정도.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이 핀 시리즈 중에서 <시하>는 긴 편에 속하지만, 반대로 이영도의 책 중에서는 가장 짧다.)



<시하>는 몇십 페이지만 읽어봐도 곧바로 작가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글인데, 인물들의 대사가 하나 같이 묘하게 뜬구름 잡는 말들과 일상어가 혼잡하게 섞여 있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예를 들어, 칸타의 "구애"는 처음 글을 읽는 사람은 그 뜻은 커녕 맥락조차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나온다. "페르시아의 황제도 신축성 있는 팬티는 가지고 있지 않았어. (...) 하지만 샤 중의 샤는 그런 팬티 한 장 없이도 자기가 가장 위대한 인간이라고 믿으며 살았지." (p.25)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전체적으로 글을 돌아봐야만 한다.



한국 현대 판타지스럽다고 한 점은, 지구의 미래를 배경으로 삼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간다르바니, 캇파니, 요정이니 하는 환상종들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일전 감상을 쓴 적이 있는 <망겜의 성기사>를 비롯한 판타지나, 아니면 하다못해 이세계에 빙의되는 소설들이라 하더라도, <사이케델리아> 같은 좀 더 옛날의 한국 판타지보다는 지구와의 직접적 연관성을 좀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가상의 공간 그 자체보다는, 지구와 이어지는 가상의 공간, 또는, 지구 위에 덮어씌워지는 가상의 공간. 여기에, 개인적으로는 한국 현대 판타지들이 공유하는 특징이라 생각하는 "게임적"인 구조(단순히 상태창이 나온다는 이야기와는 다르다)가 더해지곤 한다만, <시하>는 거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시하>의 특이함과 특별함은 이 점에 있다. 이러한 가공의, 판타지적 요소를 위한 공간에서 다시 한 번 교양소설로 돌아오는 것이다. <망겜의 성기사>와 비교해보자면, <망겜>은 게임적 논리를 보조 삼아 "선량함"과 선량함을 보여주었다. "고결함"이라는 메타적인 이익을 보여주며 독자들이 "선량함"을 쫓도록 만들고, 그 그늘 속에서 성장하는 소시민의 선량함을 제시하며 끝나는 방식으로 말이다. 반면, <시하>는 반대로 접근한다. 온 세상과 인물들이 인류의 죽음을 말하도록 해 독자가 반출생주의를 이해하도록 만들었다가, 정작 반대로 그것이 새로운 축복을 위한 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하>의 주인공 시하는 드래곤 헨리에게서 인류의 모든 시를 전수받은 인간 도서관이다. 그 감상주의 속의 기만을 파악한 시하는 참담한 현실을 보고 인간이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며 자신을 낳은 부모와 또 누군가를 낳으려는 인간들을 혐오한다. 시하가 쥐틀에서 발견한 요정 데르긴은 점차 이 세계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파악하며(방사능으로 오염된 지구와, 먹을 것이라고는 무한히 복제되는 반쯤 부패된 마녀샌드위치 뿐인 헨리동물원) 시하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 시하와 함께 있던 소년 칸타는 시하의 말에 따르면 동성애자, 즉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번식에 기여하지 못할 사람이다. 드래곤 헨리는 데르긴이 만들어주려는 사랑의 묘약이 멸망한 인류를 부흥시키려는 마트 사람들에게 확실한 죽음을 부여해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이 이야기는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멸망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헨리는 시하를 계속해서 몰아가지만, 그 결과 시하는 사랑의 묘약을 먹고 칸타를 보게 된다. 드래곤의 끝없는 지성에 대한 묘사를 보면 아마도 그는 이 모든 결과를 예상했을 것이다. 또한, 시하의 예상과는 반대로, 칸타는 헨리에게 자신이 만든 시를 그가 가르칠 시의 기다란 목록에 끼워주기를 바라는, 후손과 미래에 연연하는 사람이다. 아마 그는 시하를 좋아하지만, 시하의 너무나 철저한 반출생주의를 염두하여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시하와 이야기할 때마다 서두에 꺼내는 온갖 과거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을 드러낸다. 이 과거 사람들은 모두 우리가 보기에 끔찍한 삶을 살았고, 그러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나? 그는 시종일관 시하에게, 그리고 시하의 번식욕에게 구애하고 있다.



<시하>가 일종의 교양소설인 점은,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이어져야 하는 "인류"에는 인류의 생물학적 자식 뿐 아니라, 그 소프트웨어 역할을 하는 시까지 포함된다는 점이다. 헨리는 완전히 몰락한 인류를 대신해 일종의 시 데이터베이스 역할을 자처한다. (굳이 드래곤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판타지 장르적 설정의 외삽법도 이 글이 탁월한 부분이다. 드래곤이 보물을 모으길 좋아한다는 설정에서, 어째서 드래곤이 시를 모으는 형태가 이런 식으로 되어야만 했던가, 라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말이다.) 비록 판타지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톨킨이 자주 시를 사용했다지만, 현대 한국 판타지에는 더 이상 시가 나오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망나니 1왕자가 되었다>에서 무훈시가 나오긴 하지만, 이 활용은 <망겜>의 고결함에 더 가깝다.) 시 전통은 판타지에서 번번히 무시되고, 그것이 직접적으로 어떤 효용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구태여 그것을 지적하는 <시하>는 참 여러 가지 의미로 별난 글 아니겠는가.



요약하자면, <시하>는 이영도가 요즘 판타지 트렌드와 자기 색을 함께 녹여낸 듯한 글이다. <오버 더 초이스>를 읽었을 때는 그다지 신작이 기대되지 않았지만, <시하>는 달랐다. 다시 읽어도 재밌는 글이었다.



P.S. 최근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밀어주고 있는 <피어클리벤의 금화> 생각이 좀 나기도 했다. 안 좋은 의미로. <시하>는 훨씬 자연스럽게 읽혔고, 훨씬 더 판타지적 재미에 충실했다. 괴상한 대사 센스조차 비교할 것이 못 된다. 포스트 빵도는 함부로 붙여선 안 될 타이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