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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감상평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는데, 누멘에서 출판한 <변신>의 판본에 대한 것이다. 다만 번역을 지적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변신>을 누멘 출판본으로 처음 접한 터라 타 역본과의 비교는 불가하나, 독문학 전공자이신 역자 윤순식의 번역에는 비문과 오탈자가 전무했으며 각주로 번역 상의 디테일을 설명하는 세심함마저 존재했다. 충분히 매끄럽게 읽혔다. 내가 비판하고 싶은 점은 바로 삽화다. 책의 표지를 포함하여 본문의 중간중간 벌레 삽화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데, 삽화에서 묘사된 벌레의 모습이 너무나 징그러운 탓에 표정을 찡그리고 읽게 만든다. 책을 반 접어 글자가 있는 쪽을 읽고 얼른 책장을 넘기는 수밖에는 없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 징그러운 삽화들이 (심지어 역자 서문에 명시된!) 카프카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는 점이다. 카프카는 <변신>의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며 "그것 외에는 무엇이든 괜찮지만 그것만은 안 됩니다. 그 벌레는 그림으로 묘사되어서는 안 됩니다. 멀리서나마 보여서는 안 됩니다."라 말했다고 한다. 누멘 출판본의 삽화는 이러한 그의 소망을 깡그리 무시하는 셈이다. 아마 서점에서 <변신>을 구매하는 독자들의 경우 문학동네, 민음사 등 메이저 출판사에서 출판한 <변신>이 있으니 누멘의 판본을 구매하는 것이 오히려 쉽지 않겠으나, 나와 같이 도서관에서 <변신>을 빌려볼 의향이 있는 독자들의 경우 혹여 이 글을 본다면 주의하시길. 장서들 중 최신의 판본으로 손때가 덜 묻어있기에 골랐거늘... 역자와 편집부의 의사소통 부재가 빚어낸 참사다.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와 가족들의 모습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농담이다).

여하튼 카프카의 간곡한 부탁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볼 수 있겠다. 과연 그는 어떤 연유에서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의 모습을 꽁꽁 숨기려 했던 것일까? 아마도 온전히 텍스트만으로 <변신>이라는 작품을 평가받길 원했으리라 쉽게 추측해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가 오직 벌레의 이미지만을 배제하기 원했다는 점을 전부 설명하기란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모든 삽화를 배격한 것이 아니다. 가령 부모님과 여동생이 화창한 미래를 꿈꾸는 마지막 장면의 그림은 실어도 된다는 말 아니겠는가?
  
즉 카프카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벌레의 이미지가 감상에 끼칠 옳지 못한 영향을 근심한 것이다. 말하자면 독자의 머릿속에서 독자만의 벌레를, 독자만의 변신한 그레고르 잠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전혀 문제가 없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카프카는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벌레의 이미지와 독자의 상상 속에서 창조할 수 있는 벌레의 이미지에 어떤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길래 이와 같은 조치를 취했던 것일까? 단순히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함이었을까?
그보다 극히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벌레의 이미지가 일반적으로 유발하는 공포 내지는 흉측함의 감정을 억제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감히 추측해본다.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를 보고 역겹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징그러운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의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창조하여 눈살을 찌푸리는 것 역시 카프카가 의도한 감상의 자세는 아니었을 확률이 높겠다.
  
그렇다면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의 비극을 보고 독자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끼는 (혹은 느껴야 하는) 보편적 감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것이 동정에 가까우며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레고르의 변신에는 두 가지 요소가 거세된 것처럼 느껴진다. 우선 당위성이 없다. <변신>의 그 어디에도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해야 하는 당위 혹은 변신하게 된 핍진한 이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전래동화에서나 볼 법한 '이러한 잘못을 저질러 결국 벌레가 됐다'는 식의 비화가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 정녕 잘못이 있다면 자본주의의 부속물이자 가족의 돈줄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단꿈을 마음 속으로나마 잠시 상상했던 것뿐이다.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텍스트의 외부로 나가야 한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하기를 카프카가 원했기 때문에 그는 벌레가 된 것이다.
  
그레고르의 변신에 또한 부재하는 것은 바로 회귀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본래의 인간 형태로 회귀하지 못하고 벌레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어떤 임무 내지는 사명을 완수하고 다시 사람의 모습을 되찾는 디즈니 왕자 식의 편의적인 결말은 <변신>에 없다는 말이다. 이로 인해 결말부에서 그레고르의 죽음은 비현실적인 회귀를 택할 수 없는 한 예정된 것과도 같은 인상을 준다.

때문에 합당한 까닭 없이 한 집안의 아들이자 성실한 직장인이 벌레로 변신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가족들에게서 핍박을 받고 이내 죽음에 이르며 끝나는 이 요상한 벌레 이야기는 대단히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도 잔인한 현실성을 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보고 느끼는 동정과 연민의 근원이 아닐까? 나는 <변신>이 내가 아는 한 가장 가슴 아프고도 슬픈 이야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방 안의 가구를 밖으로 옮길 때 어머니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써 소파 밑에 숨는 그레고르의 모습, 혹은 다양한 먹이를 제공하는 등 최선의 배려를 보여줬던 여동생의 입에서 '저 괴물은 오빠가 아니니 죽여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듣고 쓸쓸히 죽음을 맞는 그레고르의 최후를 보고 있자면 눈물을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상기한 두 대목에서는 정말로 울었다.

<변신>의 비극성을 심화하는 것은 그레고르의 짧은 벌레로서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주변 환경이다. 우리는 극의 초반부에 일어나는 사건 혹은 가족들의 대화를 통해 그레고르가 변신하기 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그것은 단언컨대 어깨에 가족들을 짊어지고 반복되는 쳇바퀴와도 같은 삶이었을 것이다. 몸이 불어나 거동조차 힘든 아버지, 천식을 앓으며 순종적인 어머니, (가족 구성원 중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음악 대학 진학을 꿈꾸며 그레고르가 그 꿈을 이뤄주고자 했던 여동생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레고르의 노동 없이는 삶을 영위하기 힘든 인간들이다. 구태여 가족 구성원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회사의 사원들 중 가장 부지런했던 인물로 묘사되는 그레고르는, 그러나 이와 같은 성실성에 도리어 발목을 잡혀 압박을 받는 아이러니에 직면한다.
  
따라서 벌레로 변신한 후 그레고르를 압박하는 가족과 주변 인물들(회사의 상사, 세입자들, 하녀 등)의 비인간성과 잔혹성은 그레고르의 외양이 변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뿌리깊은 것이다. 그러니 이 참혹한 비극은 그레고르의 변신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조금은 거칠게) 말하더라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벌레로 변한 뒤 죽지 못해 살아간 그레고르의 몇 달과도 같은 허무한 삶은 정말로 세상의 섭리에 속하는 자연적인 종류의 것이라는 말인가? 하지만 카프카가 "인간은 부조리하지만 자연만은 완벽하고 아름답다"는 유언을 남겼음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삶의 허무가 본디 자연에 귀속되는 종류의 것은 아닌 듯 보인다. <변신>의 집필과 카프카의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수 년의 간극에서 해답을 찾아 우격다짐으로 끼워맞추느니 부조리의 원류를 자연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 것이 보다 합당하다.

삶의 부당함이라는 것이 자연에서 기인하지 않는다면 남겨진 비판의 대상은 인간, 특히 인간의 삶 그 자체뿐이 아니던가? 그러나 인생(人生)이 충생(蟲生)과 다를 바 없이 허무하고 덧없다는 결론으로 성급히 마무리짓고 싶지는 않다. 설령 카프카가 의도한 <변신>의 귀착지가 그곳이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인생이 지극히 허무하다는 결론에는 동감하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삶을 벌레의 삶으로 유비하는 것은 모욕처럼 느껴진다. <이방인> 속 뫼르소는 최소한 인간 실존의 허무함을 인간의 형상을 갖춘 채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생각하는 갑충으로서 허무함 속에서 끊임없이 헤엄치는 것이 정녕 인간의 삶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인가?

이쯤에서 <변신>에 드러난 삶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간 형태의 그레고르 잠자와 벌레 형태의 그레고르 잠자 사이에서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작품 전체에 감도는 부조리가 잠자의 변신 전후에 걸쳐 영속한다는 가정이 맞는다면 역시 변신 전후로 불변하는 속성을 <변신> 속 삶의 본질이라고 상정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겠다.

그레고르의 변신 이후 달라진 점 중 하나는 당연히 외면이다. 인간 남성이 수많은 다리를 가진 벌레의 형상으로 변모했다. 카프카는 벌레의 모습과 이후의 행동거지를 설명하는 데에만 수 페이지를 투자한다. 이는 벌레의 몸뚱아리가 그레고르의 행동과 감각의 외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묘사하는 것이다. 비단 세입자 3인방뿐만 아니라 가족마저도 기피할 만큼이나 끔찍한 외면은 변신 이후 그레고르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여기서 그레고르가 하필 강아지도 고양이도 아닌 벌레의 모습으로 변신한 것은 중요하다. 그의 외양은 가족에게까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레고르가 귀여운 강아지로 변신했다면 가족과 함께 백년해로를 누렸겠지. 이처럼 그레고르의 외양은 독자의 감흥 유발과 이야기 전개를 위해 카프카가 대단히 자의적으로 설정한 것이었으므로 최소한 그가 생각하는 삶의 본질은 아니라 할 수 있겠다.
  
또한 그레고르의 변신 이후 발생한 중차대한 차이점은 바로 그와 가족 간의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레고르는 가족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레고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레고르가 자신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레고르의 의식 또한 벌레의 그것으로 변모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이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추측이라 할 수 있겠다. 벌레가 인간의 사고를 가지고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그 누가 상상했겠는가.

때문에 그레고르의 실존에 있어 변신 전후 동일하게 존속하는 것은 (이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 지에 대한 논의는 넘어가자) 오직 그레고르의 사고 체계뿐이다. 그의 외양과 감각, 소통 가능성에의 변화가 그의 내면에 영향을 미쳤음은 자명하나, 사고와 인식의 능력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는 <변신>의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불변하는 그의 내면은 그로 하여금 실존의 변화를 인식하게 만들며, 이는 곧 <변신>에서 그레고르의 본질에 해당하는 인간 고유의 사고력이 모든 비극의 시발점에 해당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예정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실존의 진실을 인간 본연의 사고력을 매개로 인식하는 순간 삶의 필연적인 비극성이 만개한다는 것이다. 그레고르의 눈물겨운 비극은 일견 변화한 외양과 단절된 소통으로부터 출발한 것처럼 보이나, 실상 (굉장히 역설적인 표현처럼 들리지만) 삶의 비인간성은 결국 변신하기 이전까지의 그레고르의 삶, 나아가 변신하지 않은 가능세계 속 그레고르의 삶에도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레고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갈등이 해결되(는 것처럼 보여지)고 그레고르를 두 번 살해한 가족들이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잔인한 결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단순히 비현실적이고 특수한 변신 이야기의 종착역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형태의 종말을 맞이하는 방법만으로 인생 고유의 부조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대단히 보편적인 역설을 드러내는 하나의 처연한 단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