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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다. 


2.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다. 하지만 이 원리는 다양한 인간 군상에 의해 종종 무시되고 은폐된다.

3. 라스콜니코프 같은 인물들이 그 예이다.

4. 라스콜니코프는 ‘비범한 사람’이라면 ‘비범하지 않은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다.

5. 그에 따르면 비범한 사람의 죄는 죄가 아니다. 무언가 숭고하고, 인류 역사에 유의미한 공헌을 할 수 있는 헌신이다.


6. 3~5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세상에는 미친 놈이 많다.

7. ‘미친 놈’을 좋은 뜻과 나쁜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라스콜니코프는 후자에 해당하는 미친 놈이다.

8. 나쁜 미친 놈들은, 좋은 미친 놈들과는 달리, 세상에 기여하지 못한다. 철저하게, 어떤 의미에서도, 나쁜 미친 놈들은 도움이 안 된다.


9. 6~8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자연스럽게 도출한다; 라스콜니코프는 ‘나쁜 미친 놈’이기 때문에 단죄되어야 한다.

10. 그것은 사실 간단한 문제이다. 방세는 물론 식사에 지출할 돈이 없어 굶주리는 젊은 청년은, 그에게 내재된 가능성과 관계없이 위험에 가장 취약한 계층이다.

11. 쉽게 말해서 경찰이 공권력을 행사한다면, 즉 그를 흠씬 두들겨 팬다면 단죄가 성립한다.

12.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는 단죄의 과정에 많은 장애물을 배치한다. 단 하나의 우연에서 비롯되는 수많은 필연이 그것들이다.

13. 그것들이 실로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차치하고 작가의 의도를 군말없이 받아들인다면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


14. 내가 생각하기에 라스콜니코프가 조금만 더 잘 먹어서, 그래서 건강을 유지하고 제정신이라면 작중 그가 느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15. 그런데 그런 상황은 애초에 고려할 수 없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3~5에 해당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를 ‘정신 착란’에 빗대어 암시한다.

16. 돈이 없어서 생계에 위협을 받는, 사회의 도움(지인의 도움이 아닌)을 받지 않는 사람은 이처럼 위험한, 정신 착란에 가까운 생각을 한다.

17. 그러니까 라스콜니코프는 ‘가난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죄를 저지르는 데에 가장 취약한 부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8. 14로 돌아가서, 그는 괴로움을 느낀다. 그것은 1에 의한 것임이 명백하다. 

19. 그래서 그는 자백을 한다. 벌을 달게 받기로 선택한다. 

20. 사실, <죄와 벌>의 플롯은 매우 단순하다. 운 좋은 살인자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백을 하는 이야기이다.

21. 이 단순한 플롯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양심의 가책’이다. 인간의 계급을 구분하고 이를 바탕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뉘우치고 법에게 자신을 넘겨줄까?


22.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마음을 세 인물이 상징하는 세 개념의 구성으로 정의했다; 감성, 지성, 영성.

23. 나는 작가가 이 조합을  <죄와 벌>을 집필한 시점에서 구상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24. 라스콜니코프는 감성, 그를 단죄하기 위해 처벌하고자 하는 이들은 지성, 소냐는 영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5.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은, ‘죄’가 ‘벌’에 다가가는 동안 ‘죄’는 이 세 인간 본성을 경험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26. 우선 라스콜니코프는 감성을 상징한다고 했다. 작가는 그를 통해 감성의 가장 밑바닥, 즉 인간의 짐승과 같은 면모를 그대로 구현한다. 

27, 다음으로 ‘처벌자’들은 지성을 상징하고, 이는 라스콜니코프와 처벌자들의 치열한 지능 싸움에서 찾을 수 있다.

28. 마지막으로 소냐는 영성을 상징한다. 나는 이 지점에 가장 주목하고 싶다. 


29. 영성은 맹목적이다. 그것은 일방적이고 무한정하다. 작중 소냐가 그녀를 둘러싼 모든 역경에도 자신의 성실함과 신실함을 잃지 않는 것처럼.

30. 짐승같은 야만적 폭력과 끊임없는 암시와 기만으로 점철된 지능 싸움을 이겨낸 죄인 라스콜니코프를 마지막에 굴복시킨 것은 영성, 소냐이다.

31. 그것은 ‘사랑’의 양상으로 구현된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를 따라 시베리아의 외딴 도시로 떠난다. 그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때까지 그를 기다리는 것이다.


32. 나는 이 부분이 다소 작위적이라고 느꼈다. 그들이 사랑에 도달하는 과정은 너무도 상이하고 심지어 그 진행 속도도 다르기 때문이다.

33. 하여 나는 이 부분을 작가가 의도적으로 삽입한 비현실성, 즉 주제 의식에 대한 상징으로 생각했다. 

34. 모든 죄인은 감성과 지성과 영성의 세 심판을 거친다.

35. 그리고 이 심판에는 심급이 존재하고, 영성이 가장 높은 심급에 위치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31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랑의 양상으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36. 가장 냉소적이고 뛰어난 논리를 갖춘 라스콜니코프의 마음조차 녹여버린 것은 소냐의 사랑(헌신의 형태로 구현되는)이었다. 그는 결국 그녀의 무릎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37. 20, 21에서 언급한 양심의 가책은 결국 사랑에 호소하는 종류의 논리인 셈이다.

38. 어떨까,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다양한 디테일을 모두 무시하고 뼈대만 골라낸 위의 해석은 또다시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39.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서로의 작품을 흠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장 러시아적인 두 작가는 무엇에 끌려 서로를 존경했을까?

40. 지금에 와서야 추측만 가능할 뿐이지만(심지어 두 작가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하나도 수반되지 않았지만!) 영성의 위대함, 또는 ‘사랑의 위대함’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41.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그 대표적인 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정말 유명한 문장이다.


42. 도스토예프스키 식으로 변형하면 ‘사랑이 사람을 구원한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43. 그래서 38에 대해 생각하자면, 위에서 진행한 논리의 귀결점에 대해 생각하자면, 나는 <죄와 벌>은 사랑의 승리를 또 한 번 선언한 작품이라고 본다.

44. 모든 위대한 작품은 사랑에 대해 논했다. 당장 떠오르는 예만 거론해도 <레 미제라블>, <베니스의 상인>, <위대한 개츠비>가 있겠다.

45. <죄와 벌>이 그중에서도 주목할만한 작품인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이야기의 논리가 하나의 구심점으로 잘 귀결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46. 1로 돌아가서,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

47. 그러나 이 원리는 ‘죄와 벌은 등가교환된다’라는 생각, 그러니까 ‘죗값을 치른 이를 다시 맏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48. 그러니까 <죄와 벌>은 이런 이야기이다; 죄를 지은 인간은 벌을 받고, 벌을 받은 인간은 돌아올 수 있다.

49. 48을 ‘박애’라고 부를 수 있다면, 즉 1이 사랑의 원리에 도달하는 원리임을 받아들인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메세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50. ‘사람은 사랑을 받음으로써, 그리고 사랑을 줌으로써 구원받는다.’


51. 써놓고 보니 너무 오글거린다. 빨리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나 읽으러 가야겠다. 

52. 항상 그렇듯 태클 대환영. 내가 속독이 버릇이 돼서 종종 오독을 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