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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 사회, 생태계 같은 복잡계에 변화를 주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Unintended Consequence)가 발생한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복잡계의 특성에 의한 필연이며, 이는 카오스 이론으로 설명된다.
선마이크로시스템즈
창업자 빌 조이는 이렇게 말했다. "기술을 설계하고 사용할 때,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가 발생한다는 점은 대단히 잘 알려진
문제이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발생하는 이유는 명확해 보인다: 체계의 부품들은 복잡하게 상호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체계에
어떤 변화를 주게되면,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버린다. 특히 인간 행동이 관련되어 있을 때 더욱 그렇다."
복잡계에
대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설명은 이렇다. "모든 카오스계는, 시작점의 데이터의 정확도를 늘릴 수록 예측가능성의 지평선은 조금씩
멀어져간다는 특징을 갖고있다. 쉽게 말하자면, 예측가능성의 지평선은 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카오스계로 간주해도 될 만큼 충분히
비선형적인 체계들이 대단히 많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예측은 언제나 예측가능성의 지평선에 의해 좁은 한계에 머물게 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완전한 이해는… 언제나 잠정적 과정에만 머무를 수 밖에 없으며, 예측과 실제가 크게 빗나갈 때마다 새로운 관측과 실험을
하게될 수 밖에 없다."
2. 누군가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인간 사회를 합리적으로 통제하는게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는 근본적인 어려움을 갖고있다. "우리가 장기적으로 추구해야할 이상 사회는 무엇인가?" 인류는 단
한번도 이에 대한 합의를 얻은 적이 없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의 최종 결과는 언제나 수많은
의지들의 투쟁의 결과로서 결정된다. 각각의 의지는 삶을 결정하는 수많은 조건들을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힘들이 교차하고, 평행하며, 이로부터 결과, 즉 역사적 사건이 태어난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전체로서는 무의식적이고, 누구의
의지도 따르지 않는 하나의 힘으로 볼 수 있다. 각각의 개인은 다른 모든 이들의 의지에 반해 움직이며, 그 결과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것이 등장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노버트 엘리어스(Norbert Elias)는 이렇게 말했다. "서로
협력하거나 반목하는 무수히 많은 개인들의 이익과 의도가 엮어진 결과, 어느 누구도 계획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은 무언가가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두의 의도와 행동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다."
3. 설령 특정 사안에 대해 합의를 얻었다 하더라도, "공유지의 비극"으로 인해 합의를 효과적으로 집행할 수 없다.
4. "공유지의 비극"을 막기 위해 소수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권력을 집중시켜도, 지도자들의 선택지는 여러 요인들(지도자들 사이의 내부 갈등, 부하들의 저항, 전적으로 기술적인 요인들)로 인해 극도로 제한된다.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대통령의 권력이 얼마나 강한지, 최고 통수권자가 얼마나 강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떠든다. 경험자로서 말해주겠다. 미국 헌법과 미국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대통령은 강력한 권력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핵심 권력은 사람들을 모아두고 원래 설득하지 않았어도 했어야할 일을 하게끔 설득하는 것이다. 난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보낸다. 그게 바로 대통령의 권력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아담 데이빗슨(Adam Davidson)의
2012년 기사 Making it in America는 미국의 실업 문제의 원인을 논하고 있다. 그가 개인적으로 조사한 회사를
예로 들며, 데이빗슨은 이렇게 적었다: “Standard Motor Products사의 소유주들에게 가격을 덜 인하하고, 살짝
적은 이익을 감수하고, 비숙련 노동자들을 돕고, 미국의 실업 문제 해결을 조금이라도 도와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데이빗슨은 Standard Motor Products 같은 회사들이 가격을 인하하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인간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하지 않으면 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지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기업가는… 그저 그가
통제할 수 없는 경제적 힘과 발전의 대리인일 뿐이다.”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5. 자연선택은 장기적 결과에 신경쓰지 않고 지금 당장의 권력을 추구하는 체제들(국가, 기업, 범죄조직, 이념집단 등)을 선호한다. 이 체제들은 합의를 무시하고 권력을 향해 경쟁할 것이다.
바다생물들이
육지에 올라오기 시작했을 때, 언젠가 다시 바다로 돌아갈 것에 "대비"해 아가미를 유지하고 있던 개체들은, 미래에 신경쓰지 않고
지금 당장 육지에서의 경쟁에 우위에 서기 위해 아가미를 내다버린 개체들과의 경쟁에 패배했다. 그래서 지금 지구의 육상동물들에게
아가미가 달려있지 않은 것이다.
고고학자 스티븐 르블랑(Steven LeBlanc)은 원시시대에 환경파괴적인
수렵채집인 집단에게 선택압이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식량을 짧은 시간에 많이 얻기 위해 환경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한 수렵채집인들은
부족의 인구를 빠르게 늘릴 수 있었다. 이들은 주변의 환경친화적 수렵채집인 부족들을 수적으로 압도할 수 있었다.
1920년대
소련은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기술적으로, 경제적으로 뒤쳐져 있었다. 소련은 이 격차를 따라잡기 위해 서방 자본가들로부터
기술을 수입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당연히 서방 자본가들은 소련과 거래해서는 안된다. 태생부터 자본가들을 타도하고자 결심한
공산주의자들에게 기술을 건네주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서방으로부터 기술을 구입해올 수 있었다.
자본가들에게 있어서, 공산주의의 위협은 미래의 일이지만, 시장경쟁에서의 생존은 지금 당장의 문제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돈이
필요했다. 이를 두고 레닌은 “그들은 그들을 목매달아 죽일 사람에게 밧줄을 팔았다.”며 자본가들을 조롱했다.
6. 기술이 발전할 수록 기술 체제가 지구에 끼치는 영향력은 강해진다.
현재의
상황은 이 전제를 강하게 확인해준다. 우리는 세계적 “초강대국들”, 다국적 기업들, 세계적 정치 운동, 세계적 종교들, 세계적
범죄조직 등을 보고 있다. 우리는 이것이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 아닌, 자가증식 체제의 일반적인 성질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류가 다른 존재에 의해 대체되더라도 이 전제는 참일 것이다. 자연선택은 전지구적 활동을 하는 자가증식 체제들을 만들고
유지할 것이다.
7. 전지구에 걸친 대규모 체제들의 격렬한 경쟁으로 인해 지구의 기후, 대기구성, 해양성분 등은 빠르게 극단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8. 따라서, 기술 체제는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9. 체제 붕괴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체제가 더 발전하기 전에 붕괴시켜야 한다.
오 재밌겠다
루소 후계자노
아 머리아프네요 - dc App
나라들의 치킨게임을 막기 위한 세계정부만이 답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핵심 권력은 사람들을 모아두고 원래 설득하지 않았어도 했어야할 일을 하게끔 설득하는 것이다. 난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보낸다. 그게 바로 대통령의 권력이다 - dc App
이게 뭔말? - dc App
이게 왜 권력이라는 거임? 그냥 대통령 권력 별볼일 없다는 뜻으로 말한건가 - dc App
제대로 이해 하셨네요.
어디서 많이 본 주의주장에 이름이다 싶더만 유나바머였냐 ㅋㅋㅋ
반기술혁명 번역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3장 빨리 보고 싶어요
리뷰추 - dc App
서술에 있어 기술의 이점은 의도적으로 배제했고,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을 택하자는 전개에서, 최악을 막는다는 방식이 '붕괴'라면 이 '붕괴'가 과연 단순히 '차악'으로 치부할 정도인지도 잘 모르겠다. 즉 인류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붕괴'인지 모르겠음. 붕괴가 분명 최악은 아니더라도, 차악이 "지구의 기후, 대기구성, 해양성분 등은 빠르게 극단적으로 변하"는 것을 단순히 '늦추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가정도 가능한데, 이 가정을 전제로 한다면 사실상 실익은 없는 셈이고
기술의 이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술 덕분에 (평균수명 상승, 풍족한 물과 음식 등)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대답할텐데, 카진스키는 여기에 대해 기술 발전으로 인해 인간이 자율성을 박탈당하고 우울증을 비롯한 심리적 문제들이 발생했고, 삶의 질이 오히려 떨어졌다고 주장함. 그게 '산업사회와 그 미래'의 내용이었고. 그 외의 기술의 이점이라면, 기후변화나 생태계 파괴 문제조차도 지구공학이나 친환경 기술로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일텐데, 지구 해양, 대기, 생태계는 하나의 거대한 복잡계이기 때문에 지구공학적 시도는 무의미하거나,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거라고 반박함. 친환경 기술의 경우, 자세히 살펴보면 전혀 친환경이 아닌데다가 체제 경쟁으로 인해 친환경 기술은 결코 인간이 의도한대로 쓰이지 않음.
예를들어, 오염물질 배출을 절반으로 줄이는 친환경 신기술이 발명되었다면, 의도대로라면 모두가 지금의 삶의 질을 누리면서 오염물질 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체제 경쟁으로 인해 에너지 사용량이 두배 이상 늘어나고 오염물질은 오히려 증가하게됨.
기술 뿐만이 아니라 어떤 것이든 양면성을 띄고 있지 않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텐데. 기술의 발전이 삶의 질의 향상을 불러왔음. 허나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면만을 비추는 건 "그러니까 붕괴시켜야 한다"처럼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이 양가적인 기술의 발전에서 카진스키는 아마도(분명히)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주장의 전제로써 '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살기 좋았다'는 식의, 마치 노가다꾼들이 함바집에서 과거를 추억하며, 옛날에는 모든 것이 좋았다는 황당한 가정을 마치 사실인 양 서술한다는 점에 있음.
답글을 보니 '옛날이 좋았다'의 예시 중 하나로써 '심리적 문제'를 제시한 걸로 보이는데, 그렇게 과거(도대체 '과거'가 어느 지점을 말하는 건지조차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한차례 더 지적이 가능함)에는 '심리적 문제들'에서 얼마나 자유로웠을지는 알 수 없음.
'현대적 신경증, 정신증'이라 함은 재밌게도 '현대에 와서' 그 기준이 정립됐고, 그 기준이랄 것도 DSM이 개정을 거듭할 수록 크든 작든 달라지기 마련. 그러면 과거에는 이러한 '현대적 신경증, 정신증'이 없었을까? 아니면 적었을까? 만약 적었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해서' '과거가 지금보다 낫다, 우리는 점차적으로 삶의 질이 떨어졌다'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까? 흔히들 '현대'와 쉽게 결부 짓는 '자율성의 박탈'이라는 조건을 더한대도 마찬가지. 나는 답글을 작성하며 '심리적 문제들'을 겨냥하고서 작성했으나, 비단 심리적 문제뿐만이 아니라 '과거보다 지금이 낫다'라고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자료랄 게 있는지도 의문이고.
다른 분야 모두를 확인할 필요 없이, 딱 하나, '심리적 관점'에서라도 분명하게 확인될 수 있는지? 글쎄.
환경의 문제로 넘어가서, 지구 온난화가 조작이다 아니다 하는 논란은 집어치우고, 난 과거보다 현재의 환경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보는 입장인데, '앞으로' '친환경 기술'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그것이 '친환경적인 성질을 갖고 있음과 동시에 또한 환경을 파괴하고, 이권 다툼의 대상이 된다 한들' 이에 대한 대항이 하필이면 '붕괴'일 당위는 없거니와, 상술했듯 이 붕괴가 "인류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붕괴'"인지 역시 미지수지. 카진스키가 요구하는 붕괴가 '친환경 기술로 인해 야기되는 시대'와 어떤 점에서 다름? 아니, 어떤 점에서건 현재와는 다르겠지. 질문을 바꾸면, '카진스키의 붕괴와 그것이 불러올 이상향'과, '카진스키가 극렬히 반대하는 미래'는 '얼마나' 다름?
얼마나 다르다는 걸,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음?
댓글을 작성하고 보니 '과거보다 지금이 낫다'라는 관점의 적용이 '환경'에선 가능하거나 아니면 '허용'될지도 모르겠다. '허용'된다고 치자. 근데 환경에 이러한 관점을 적용했을 때, 과연 '붕괴'로 귀결되는가? 아니. 답글은 이 마지막 답글에 일렬로 달아줬으면 함.
카진스키가 말하는 과거는 가깝게는 산업혁명 이전의 전근대 시대, 멀게는 문명 이전의 원시시대를 말하는 것. 정신질환이라는 것이 현대에 와서야 정의된 것이니 과연 고대인들이 현대인들에 비해 정신적으로 더 건강했는가 하는 의문은 근현대에 들어와서 수렵채집인들을 연구한 기록들과 고대 문헌들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는데, 이를 참고해보면 수렵채집사회나 고대사회가 현대인들 만큼 극심한 심리적 문제를 겪고 자살률이 높았다고 보기는 힘듬. 즉, 현대의 극심한 심리적 문제들과 높은 자살률은 인류사에 없었던 현대의 독특한 특징이고, 카진스키는 그 원인이 발전된 기술에 있다고 주장함.
"과거에는 평균 수명이 짧지 않았나"식의 반론에 카진스키는 공허한 삶을 오래 사는것보다는 생존을 위해서든 대의를 위해서든 투쟁하다 죽는게 낫다고 대답함. 심리적 문제는 여기까지하고, 환경문제로 들어가보자.
흔히들 친환경 기술이라고 부르는데 그 용어 자체가 형용모순임. 기술이라는 것은 그것을 생산, 설치, 운용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오염물질을 배출하고 환경을 파괴할 수 밖에 없음. 결국 친환경 기술이 친환경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기존의 에너지 생산 기술에 비해 오염물질을 적게 배출하고 환경을 적게 파괴하기 때문일텐데, 문제는 체제 경쟁으로 인해 에너지 수요는 계속해서 증가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친환경 기술로도 오염물질량이나 환경파괴를 줄일 수가 없음. 앞서 말했듯 오염물질을 절반으로 줄이는 친환경 신기술이 있다 한들 체제의 에너지 수요는 두배로 늘어나고 오염물질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
"그게 어째서 '붕괴'로 이어지느냐? 사회적, 국제적 합의를 통해 체제 경쟁을 자제하는 것과 같은 대안이 있지 않느냐?"식의 반론에 대해서는, 그런 합의는 지금까지 한번도 없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하리라는게 카진스키의 주장임.
"그 말이 맞다해도 기술 체제의 붕괴는 인류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크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인간의 의지와는 별개로 결국 기술 체제는 붕괴할 수 밖에 없다는게 카진스키의 주장임. 카진스키 역시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체제의 붕괴를 받아들이지 못하리라고 보고있고, 결국 체제 붕괴가 모두에게 명확해지는 순간이 오면 그 때 반기술 혁명가들이 사람들을 선동해서 산업 기반 시설들을 사보타주 해야한다고 주장함.
나무위키 문서도 참고해보셈.
https://namu.wiki/w/Anti-Tech%20Revolution:%20Why%20and%20How
위에 써놨다시피 '현대의 심리적 질병'이란 것들은 말 그대로 '현대에 와서' 그것의 명명이 이루어졌고 또한 본격적인 탐구가 시작되지 않았음? 우울증이든 공황장애든. 이러한 '현대의 심리적 질병'은 비교적 최근에야 공개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했음. 당장 한국의 경우 10~20년 전에는 "나 우울증 있다, 공황 장애를 앓고 있다"라고 말을 하기도 버거운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었고, 혹은 그것이 질병인지조차 모르고 단순한 '기분의 문제'로 치부되는 경우도 잦았음. 심지어는 요즘도 그렇지. 그래서 '현대의 심리적 질병'을 일컬을 땐 '과거에 그것이 존재했으나 지금과 같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조건을 인지했다면 '과거에는 기록이 미흡했다는 이유'로 '그것이 과거에는 없다고 보여지거나 적다고 할 수 있다' 라고 쉽게 결론 내릴 문제는 아니지. 너도 '기록과 문헌들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음을 한계로 인정했다만.
자살률의 경우엔 단순히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비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봄. 사람들이 스스로 죽기를 자처하는데도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가정은 억지스럽다. 우악스럽게 '기분의 문제'로 치부될 수 있는 단계를 벗어났음. '자살과 발전된 기술'이 상관관계를 지난다고 칠 때, 카진스키는 발전된 기술의 어느 부분이 자살과의 관계에서 혐의가 있다고 보고 있음? 그리고, 그 발전된 기술이 가진 긍정적 부분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부분(자살 등) 때문에 이것을 갈아 엎어야 한다는 결론은 비약이지.
붕괴라는 전제 하에서, 어떤 기술의 '부정'을 타파한다는 것은 곧 '긍정' 역시도 배제하겠다는 것을 말함. 이쪽은 붕괴하고 저쪽은 내버려둔다? 편의적인 발상. 이 답글 다음에도 꾸준히 언급되어있는데, '붕괴 이후'가 '현재 그리고 현재의 미래'보다 낫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음?
"공허한 삶을 오래 사는것보다는 생존을 위해서든 대의를 위해서든 투쟁하다 죽는게 낫다고 대답"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반박을 할 필요조차 없음. 너무나도 개인적인 주장일 뿐이니까. 내 눈엔 "공허한 삶"이란 표현을 "카진스키는 본인의 공허한 삶"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보여짐.
국가, 정확히 말하면 강대국들의 이권 다툼은 바야흐로 군사력 경쟁에서 '환경'이란 이슈로 옮겨왔음. '친환경 기술'이라고 할지언정 여전히 강대국의 이권 다툼 영역 내에서 다뤄질 수밖에 없다는 점은 맞겠지. 환경이란 주제가 '국제적' 단위로 다루어질 때, 그것이 '국력'이란 범위 밖에서 다루어질 이유가 없으니까. 친환경 기술, 나아가 '환경'이란 주제가 모순을 갖고 있대도, 이를 마찬가지로 문제점-그것이 '현재의 환경 문제'로 인해 야기되는 결과보다 이득은 크고 손해는 더 작을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이 너무나도 선명한 카진스키의 방법으로는 대체할 수 없음.
나는 단순히 '기술 체제의 붕괴가 인류가 감당하기엔 너무 크다'라는 걸 강조하는 게 아님. 물론 기술 체제의 붕괴는 인류가 감당하기엔 너무 크지. 내가 지적하는 부분은 '카진스키가 의도하는 붕괴'가 부담이 분명하다는 점임. '카진스키의 붕괴가' 장점이 큰지도 모르고, 단점이 작은지 우리는 알 수 없음. '얼마나' 비교우위를 지니고 있느냐를 떠나서, 아예 '비교우위를 지니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점은 아주 치명적임.
체제 붕괴가 모두에게 명확해지는 순간에 카진스키를 전승한 누군가의 사보타주가 일어났다 치자. 이게 '생존과 대의'를 위한 건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한 국가가, 혹은 단일 사회가 붕괴된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카진스키가 논의하는 스케일에 따르면 '전지구적 단위의 시스템의 붕괴'를 말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체계가 무너진 시점에서 '카진스키의 제안'은 받아들여질까? '카진스키의 제안'은 '생존과 대의'라는 명목을 고수할 수 있을까? 명분을 내세운 평화 시위가 폭력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음. 괜히 프락치를 심어서 '선동'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한 쪽이 피를 보면 그때부터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됨.
'거대한 단위의 체제'가 붕괴 됐는데 거기서 '카진스키의 체제'는 붕괴되지 않고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여기서 다시 한번 미지수가 발견됨.
'언젠가 기술 체제는 자멸'함을 가정한대도 그것이 여전히 '카진스키의 붕괴'로 이어질 이유가 하등 없음. 반복한다만, 현재 기술 체제의 자멸과 '카진스키의 붕괴'가 '얼마나' 다른지 모르는 상황. '기술 체제의 자멸'이 내포한 해와 득에 대비해서, '카진스키의 붕괴'는 앞의 것보다 해는 적되 득은 많아야 함. 보다 좋은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이유가 없음. 또한, 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이룩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지니지 못함. '카진스키의 붕괴'가 지닌 해와 득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면 이 불확실한 폭탄을 도저히 떠안을 수가 없음. 더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기술의 발전은 편의와 부작용을 함께 지니고 있고, 좋으나 싫으나 우린 그것 모두를 누리고 있음.
. 카진스키의 주장은 무얼 내포하고 있지? 어떤 편의를, 부작용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행해야 한다? 나는 이게 '새로운 의미의 자살'로 보임.
이 '새로운 의미의 자살'은 최소한 카진스키와 그의 추종자들한테는 의의가 있다고 봄. 그들은 '공허한 삶을 배격하고 대의를 위해서' 행동하니까. 달리 말하면 '이 새로운 의미의 자살'은 '최대한' 카진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나 의의가 있음. 도박은 이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질 걸로 보임.
어떤 디씨 유저가 나보고 "카진스키의 주장은 결국 미래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 지금 죽자는 말에 불과한 것아닌가?"라고 한적 있는데, "새로운 의미의 자살"이 비슷한 의미인 것 같다. 하지만 기술 체제가 발전할수록 붕괴의 규모도 커진다는걸 고려해야 한다. 지표면은 유한하고, 환경 자원도 유한한데 대규모 체제(국가, 기업 등)에 의해 인류의 생활터전이될 환경 자원이 싸그리 소모되고, 이로 인해 극심해진 자연재해로 인해 기술 체제가 스스로 붕괴하는 것 보다는 환경 자원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상태에서 기술 체제가 붕괴하는게 생존률이 조금이라도 더 높을 수 밖에 없음. 또한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100억명이 죽는 것 보다는 70억명이 죽는게 공리적으로도 훨씬 낫다는 것.
추가로, 역설적으로 미래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극단적인 변혁을 일으키기 보다는 지금 사는게 낫다는 주장은 대규모 체제(국가, 기업 등)에게도 적용됨. 대규모 체제의 입장에서 환경파괴로 인한 재앙은 미래의 일이지만, 체제 경쟁에서 우위에 서는 것은 지금 당장의 일이므로, 환경파괴를 멈출 수가 없음. 예를들어, 미래 어느 시점에 대단히 환경파괴적이지만 저렴한 가격에 엄청난 에너지를 생산하는 기술이 발명되고, 북한이 그 기술을 이용해 빠르게 국력을 성장시켜 한국을 압박해온다면, 한국인들은 미래의 불확실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 해당 기술을 사용을 자제하고 지금 당장 코앞에 다가온 북한의 위협을 감수하자는 선택을 내릴 수 있겠음?
100억 명이 죽는 것보다 70억 명이 죽는 게 공리적으로 낫다. 그러나 '카진스키의 붕괴'가 이렇게 분명하게 '70억명이 죽는 것'처럼 나은 선택지인지 확인이 되지 않았음. 여기에 대한 지적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문장을 발췌함. "'기술 체제의 자멸'이 내포한 해와 득에 대비해서, '카진스키의 붕괴'는 앞의 것보다 해는 적되 득은 많아야 함. 보다 좋은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이유가 없음. 또한, 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이룩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지니지 못함. '카진스키의 붕괴'가 지닌 해와 득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면 이 불확실한 폭탄을 도저히 떠안을 수가 없음."
'카진스키의 붕괴론'은 "생존율이 조금이라도 높을 수밖에 없"는데 그게 100억:70억처럼 용인이 가능한 수치인가? 카진스키 본인도 100억:70억처럼 가시적인 수치를 제시할 순 없을텐데.
'카진스키의 붕괴론'은 이상적이다. 너의 답글은 이상으로 시작해서 이상으로 끝남. 얼마 남지 않은 환경 자원을 조금이라도 더 보존하기 위해 '카진스키의 붕괴'를 일으켰다고 치자. 그런데, "'전지구적 단위의 시스템의 붕괴'를 말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체계가 무너진 시점에서 '카진스키의 제안'은 받아들여질까?" 카진스키의 붕괴론이 카진스키가 생각하는 것처럼 얌전히 진행될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살아남은 인간들끼리 얼마 남아있지 않은 환경 자원을 토대로 또다른 경쟁을 벌이고 그에 따른 해악이 발생하면 거기선 어떻게 해야 함. 또 사보타주를 일으키고.... 그래야 하나? 또한 카진스키의 붕괴론이 적용된 세상은 삶의 질이 좋아질까?
너의 답글에서 발췌함. "카진스키는 여기에 대해 기술 발전으로 인해 인간이 자율성을 박탈당하고 우울증을 비롯한 심리적 문제들이 발생했고, 삶의 질이 오히려 떨어졌다고 주장"했다면서. 근데 카진스키의 붕괴론이 적용된 세상이, 이 지적에서 자유로울지 혹은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거나 또는 더 열악해졌는지 무슨 수로 알 수 있겠음?
내가 봤을 땐 너도 '카진스키의 붕괴론'은 결국 불완전한 '사보타주'에 머물 뿐이고, 이후의 대안이랄 것은 있지도 않고 있더라도 그것이 딱히 설득력을 지니지 못했다는 걸 충분히 파악한 걸로 보이는데.
내 주장을 일축하면 '미래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극단적인 변혁을 일으키기 보다는 지금 사는 게 낫다' 라는 게으른 태도 보다는 '미래의 재앙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극단적인 변혁을 일으키려 하는데, 이 극단적인 변혁이 제대로 이루어질지도 모르고, 변혁 이후의 삶이 변혁 이전의 삶보다 낫다고 쉽게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변혁을 부르짖는 건 단지 새로운 의미의 자살이다'에 가깝다.
카진스키가 제시한 기술 체제 이후의 대안은 수렵채집생활로의 복귀인데, 이 대안이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설득력이 없으리라는건 인정함. (심지어 카진스키 스스로도 인정함) 근데 나의 목표는 카진스키의 사상을 알리는거지,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사람들에게 카진스키의 사상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까지만 하겠다.
알겠다. 디시에서 예상치도 못한 대화 나눠서 재밌었음.